소설리스트

44화 (45/121)

44화

카르만은 어제와 같은 얼굴색으로 엘리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술 냄새라곤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어제의 일을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엘리아나도 굳이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술주정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준비해 온 자료를 카르만의 책상에 쫙 펼치고선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작가의 서쪽 부분에 남은 공방은 총 네 개에요. 하나는 위병들의 창고로 쓰고 있고, 세 개는 비어 있죠. 이 중 한 군데에선 우선적으로 모자와 장신구들을 만들어서 유통할 거예요. 이건 길게 보진 않아요. 아마 의복점 같은 데서 더 싼 가격에 팔기 시작할 테니까. 초기에 잠깐 발만 담갔다가 빼기 좋죠. 나머지 두 군데는 차례로 양초와 종이를 생산하게 할 거예요.”

“제작은 불편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사서 쓰는 것보다 낫죠. 완제품은 단가가 오르지만, 숙련공들은 기술이 올라요. 생산할 수 있는 양은 더 많아지죠. 관리만 잘 해주면 된다고요.”

“돈은 남작령에서 거둬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소.”

“그렇죠. 늘 제리크 헌터가 아들의 재정 상황을 체크하고 채워 줬으니까요. 지금 이 남작가는 독립적이지 않아요. 전혀요. 이런 작은 남작가도 제대로 못 굴리면서 커다란 헌터 가문 전체의 가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무례한 말은 삼가시오.”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무례한 것인지 사실을 직시한 말인지.”

엘리아나는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딱히 틀린 말도 없었다. 모든 주장에는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그녀는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압축적으로 준비해 온 것을 카르만에게 내밀었다.

“양초 관련해서는 이 도시에서 제일 솜씨 좋은 장인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을 고용하면 돼요. 형편이 그리 좋지 않으니, 아마 수락할 거예요. 양초 공방을 먼저 시작하고 그다음에 수익을 봐서 종이 관련 기계나 기술자를 추천받으면 좋겠죠.”

“재정이 어렵다고 하지 않았소? 당장 그 비용들을 어디서 마련할 것이오?”

엘리아나는 자신 있게 다음 장을 넘겼다. 그녀는 샤르헨의 밑에 있는 30명의 하녀 중 15명을 정리해야 한다고 적어 두었다.

“목욕 담당, 침구 담당, 꾸밈 담당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사실 한 명의 하녀가 두 세 가지를 담당할 수 있어요. 샤르헨도 자신의 밑에 하녀가 몇 명인지도 모를 거예요.”

“샤르헨의 반발이 클 것이오.”

“남작님께서 막아 주셔야죠. 그 정도는 해야 집안의 주인 아닌가요? 주방의 요리사도 대폭 줄여도 돼요. 여기가 무슨 고급 식당도 아니고, 요리사며 재료며 너무 많고 비싸다고요.”

엘리아나는 시중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들여온 것들을 비교해 가면서 말했다. 카르만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들을 가만히 보았다. 여기저기 메모와 계산식이 남아 있었다. 여러모로 고민한 흔적이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이 저택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때까지 이렇게까지 이 집안을 파헤치고 연구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카르만은 생각해 보았다. 모두 수양딸의 진짜 정체에 놀라서 도망가기 바빴다. 아니면 자신이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남작 부인의 위치에서 해야 하는 의무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달랐다. 물론 페페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을 파악하여 로즈 가문으로 보내려는 꿍꿍이가 있었지만, 그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영리했다. 가난한 집안을 위한 일과 자신이 지금 속한 가정을 위한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르만.”

“어…….”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래서 올해 페페가 빼돌린 돈만 3,000디온이 넘는다고요. 웬만한 위병의 1년치 봉급이에요. 이것도 페페가 넘겨 준 자료에서만 찾은 거지, 은폐한 건 더 많을 게 분명해요. 우선 나는 이 3,000디온을 페페에게서 받을 거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낼 거예요. 이 부분은 우리가 약속한 바가 있으니 그대로 진행해도 되겠죠?”

“그렇게 하시오.”

“좋아요.”

카르만의 허락에 엘리아나가 밝게 웃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다음 장으로 넘겨서 오늘 할 일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베니와 함께 양초를 만드는 기술공을 만나고 올 거예요. 빨리 데려올 수 있을수록 좋으니까요.”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오?”

“누가 먼저 채 가면 어떡해요? 그 아저씨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요? 진흙 속의 진주나 다름이 없어요. 하루라도 빨리 캐는 사람이 임자라고요.”

진흙 속의 진주.

그건 엘리아나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카르만은 잠시 생각했다. 그녀를 네 번째 아내로 고른 것은 순전히 그녀가 가난한 귀족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몰락한 수많은 귀족 중에서도 로즈 가문은 대대로 학자 집안으로, 모난 구석이 없었다.

단지 그 이유뿐이었다. 엘리아나 로즈의 외모나 매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엘리아나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매력을 밝게 뽐냈다. 마치 진흙 속에서 찾아낸 진주와 같았다.

“콘테르국은 콘티노국보다 양초 소비가 더 많아요. 날이 우리보다 추운 데다가 초를 피우는 문화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죠. 항상 수요가 있다고요. 콘티노국에서 팔리지 않으면 수출해도 돼요. 양초 제작은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에요. 그리고 그다음은 마구간 수리고요.”

엘리아나는 이미 집 구석구석의 탐방을 마친 후였다. 부족한 부분이 있는 곳들은 미리 체크해 두었다. 엘리아나는 긴 설명을 끝내고선 나머지는 직접 읽어 보라고 말했다.

“앞으로 삼 일에 한 번씩은 이렇게 자잘한 보고를 하러 올 거예요. 다음부터는 결과로 증명해 보이겠어요.”

엘리아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만은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뗐다.

“어제 일은.”

“그래요. 말 나온 김에 그 얘기 좀 해요.”

엘리아나는 몸을 뒤로 무르면서 말했다. 아침부터 샤르헨이 온통 뒤집어 놓은 탓에 방 안은 여태 엉망이었다.

“샤르헨이 분노해서 나를 찾아왔더군요.”

“샤르헨이?”

“내가 당신과 밤을 보낸 줄 알더라고요.”

“…….”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울고불고 난리더군요. 나는 그녀가 나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애인인 당신이 잘 나서 줘야 하죠.”

“내가 말린다고 들을 이가 아니오.”

“적어도 나보단 낫겠죠.”

“후……. 말은 해 보겠소.”

“좀 잘해 줘 봐요. 난 여기 나가기 전까지는 원만하게 지내고 싶다고요. 물론 처음에는 괘씸해서 따귀를 올려붙였지만, 솔직히 그건 걔가 먼저 시작한 거예요.”

엘리아나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다채로운 표정은 좀처럼 웃지 않는 카르만의 입꼬리도 씰룩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이성적이었지만, 기분에 따라서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이고 감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얄미워 보이는 적이 거의 없었다.

“더 말하면 남작님의 머리가 터질 테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곧바로 양초 장인을 만나러 갔다 올게요.”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마시오. 위험하니.”

“별걱정을 다 하네요. 밖보다 안이 더 위험하니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아나는 깔끔하게 말을 마무리 짓고선 남작의 방을 나섰다. 카르만은 그녀가 남긴 종이를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

엘리아나는 넓은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선 베니와 함께 양초 만드는 노인을 만나고 왔다. 엘리아나를 어릴 적부터 봤었기에, 노인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엘리아나는 그와 그의 아들을 위한 숙식까지 모두 지원하기로 약속하고선 골목으로 들어갔다.

100디온을 건네자, 남자는 좁은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아나가 정보원으로 자주 쓰는 남자였다. 그는 노예를 사고파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주로 사람에 관한 정보에 일가견이 있었다.

“엘리, 요즘 잘나가나 봐. 요즘 다들 너를 따라 하지 못해서 안달이라던데?”

“더 잘나가서 자주 찾아올 수 있게 정보 좀 풀어 봐.”

“안타깝게도 좋은 소식은 아닌데.”

“찾은 게 있어?”

“누군가 잭슨 시무스를 쫓고 있더라고. 원인은 돈 때문인 것 같고, 물 건너서 온 사람들이야. 항구에서 마주쳤다는 놈들이 있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요 며칠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

“남작가에서 나오지 않은 거야?”

“그건 아닐 거야. 시무스 부인이 사람을 시켜서 잭슨 시무스를 찾기 시작했거든. 은밀하게 말이야.”

“시무스 부인도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야?”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손을 까딱까딱하더니, 엘리아나를 가까이 불렀다.

“이건 정말 엘리라서 알려 주는 건데.”

“응.”

“잭슨 시무스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뭐?”

엘리아나가 놀라서 숙였던 고개를 들자, 남자는 군데군데 검은 때가 낀 이빨을 훤히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을 쫓는 이들은 일반인이 아니야. 숙련된 군인이거나 킬러야.”

“그걸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지. 시무스 부인이 꽤 많은 돈을 걸었는데도 아무도 안 덤비고 있거든. 덤볐다간 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단 걸 아는 놈들은 다 안다는 거야.”

“시무스 부인은 모르고?”

“알 길이 없겠지. 귀족 부인들이 우리 같은 놈들이랑 말 섞고 싶겠어?”

남자는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엘리아나는 가방에서 100디온을 꺼내서 남자의 앞에 내밀었다. 남자는 ‘유후’ 하고 소리를 내면서 돈을 집어서 품에 넣었다.

“정보를 더 알게 되면 언제든지 알려 줘. 그리고.”

“그리고?”

“너무 위험하게는 움직이지 말고.”

“헤이, 날 걱정하는 거야? 이런 남작 부인은 엘리밖에 없다니까.”

남자가 호탕하게 웃자, 엘리아나는 영광이라는 듯이 몸을 살짝 숙여 인사하고선 좁은 문을 나왔다.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베니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시무스 가문으로 가자. 상황이 위급해.”

엘리아나가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