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베니가 커튼을 걷자, 햇빛이 쏟아졌다. 엘리아나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면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엘리, 아침은 어떻게 준비할까?”
“음, 따뜻한 우유랑 빵이 좋겠어. 든든하게 먹고 싶어. 그리고 절인 올리브도.”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엘리아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을 살펴보았다. 애초에 심각하게 다친 건 아니었다. 하루를 쉬니 금세 부기가 가라앉고 상처는 아물었다.
그래도 딱딱한 가죽 신발은 신기가 어려운 터라, 부드러운 실내화를 신어야 했다. 엘리아나는 베니가 직접 만든 폭신한 실내화를 신고선 침대에서 일어났다.
협탁에 두었던 올리브 가지가 가장 먼저 햇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들어서 향을 맡았다. 아주 옅게 율리시스의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올리브 가지를 빙글 돌렸다가 다시 협탁 위로 올려놓았다.
어젯밤의 소동과 달리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엘리아나는 앞으론 문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억지로 맺는 관계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엘리아나가 몸서리를 치는 사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 됩니다! 부인께서는 방금 일어나셨어요!”
“무슨 상관이야! 놔!”
샤르헨이었다. 그녀는 베니를 밀치고선 무서운 속도로 엘리아나에게 다가왔다. 밤새 잠을 못 이룬 듯 눈 밑은 시꺼멓고, 늘 단정하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카르만이 어제 이 방에 왔었다며. 그와 밤을 보냈어?”
샤르헨은 그녀의 옷을 당장이라도 찢을 듯이 달려들었다. 엘리아나는 가볍게 그녀를 피하면서 말했다.
“밤새 무슨 더러운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어.”
엘리아나는 당당했다. 샤르헨은 산발이 된 머리와 눈물 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엘리아나를 잡고 흔들었다.
“정말이야? 정말이냐고?!”
“그래. 정말이야. 정 궁금하면 너의 카르만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술에 만취해선 방을 잘못 찾아왔어. 네 방에 가려고 했던 모양이지? 내 경호병 덕분에 자기 방으로 잘 찾아서 갔으니까 걱정하지 마. 대체 아침부터 무례하게 뭐 하는 짓이야?”
엘리아나는 샤르헨의 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그러고선 넘어진 베니를 일으켰다. 샤르헨은 엘리아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이 그녀의 침대 이불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안에는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고, 엘리아나가 잠들어 있던 곳만 조금 흐트러져 있을 뿐이었다.
샤르헨은 이불을 쥔 채로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뭐가 분한지 발까지 마구 차면서 말이다. 엘리아나는 혀를 끌끌 찼다.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네.”
“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카르만이, 내 카르만이!!”
“왜 나 때문이야?”
“뭐?”
“사랑싸움은 둘이서 해. 애꿎은 나를 끼워 넣어서 샌드위치처럼 위아래로 누르지 말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걸 왜 나한테 확인받아? 네 사랑을 그렇게 못 믿겠어? 네 애인한테 가서 묻고, 따귀라도 올려붙여야지.”
엘리아나는 독한 표정으로 말했다. 샤르헨은 여전히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치 일곱 살 아이처럼 말이다.
“여기가 무슨 휴게 공간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아무나 찾아와서 울고불고, 술주정하고. 정말 어이가 없네.”
엘리아나는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돌려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아닌 척하지 마!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나타나서 카르만이 변한 거야! 너 때문이라고!”
엘리아나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결해. 나는 이미 두 사람 사이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알겠어? 난 그저 로즈 가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게 끝나면 이 집안을 나갈 거야. 그 전에 쫓겨나도 어쩔 수 없겠지만.”
“…….”
“그게 내 처지인 걸 알잖아. 정 분하면 카르만에게 가서 말해. 네 계모를 더 이상 못 견디겠으니까 엄청난 위로금을 줘서라도 쫓아내 달라고.”
“독한 년! 그렇게 안 될 걸 알면서!”
“왜 안 되는데?”
“뭐?”
샤르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르만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샤르헨은 그것을 스스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걸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분명하게 말했어.”
“…….”
“나에게 반하지 말라고. 내게 다가오지 말고, 샤르헨에게 가라고. 이 이상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네 사랑은 너 스스로 찾고 지켜야지. 나한테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게 아니라.”
샤르헨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선 입술을 꽉 물었다. 죄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샤르헨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잘나고 똑똑한 엘리아나를 없애 버리는 것 말이다. 한시라도 더 빨리 페페와 연락이 닿아야 한다. 샤르헨은 그 생각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샤르헨을 보며 말했다.
“이제 다 울었니?”
“…….”
“그럼 나가. 네 계모는 연애나 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엘리아나는 드레스 룸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베니는 샤르헨의 시녀장인 메이를 끌어왔다.
“무례함의 극치군요. 어서 샤르헨 님을 모시고 이 방을 나가 주세요. 부인께서는 오늘부터 집사의 업무를 대신 맡으시기 때문에 남작님과의 만남이 잦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로 일일이 이렇게 찾아오신다면 남작님께 보호를 요청할 수밖에 없어요.”
샤르헨은 엘리아나만큼 똑 부러지는 그녀의 시녀장을 보았다. 그러고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스레 메이를 보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뭘 보고만 서 있어? 날 부축해야지!”
“네, 부인.”
메이가 샤르헨을 부축하자 그녀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남작 부인의 방을 나섰다. 베니는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야 문을 단단히 닫았다.
“엘리, 괜찮아?”
베니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서면서 엘리아나를 찾았다. 엘리아나는 간단하게 세안을 마치고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괜찮아. 하지만 샤르헨이 앞으로 뭘 하게 될지 모르겠네. 전혀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잖아.”
“네가 남작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이없어. 줘도 싫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엘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색 드레스를 꺼냈다. 평소에 입는 옷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일하기엔 적합한 옷이었다. 오늘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은 날에는 이 드레스만큼 적합한 옷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의 도움으로 드레스를 입고선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렸다. 그러고선 머리에 많은 장식 없이 장미 머리핀 하나만 꽂았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화장만큼은 자신이 개발한 방식대로 했다. 눈매는 더 또렷하게, 입술은 더 붉게 만드는 화장법이었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층층이 쌓인 파우더는 엘리아나의 얼굴을 더욱더 입체적이고 빛나게 만들었다.
엘리아나는 단장을 끝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그사이에 준비된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선 남작의 방을 향했다.
어젯밤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내뱉던 카르만이 생각나서 조금 찝찝한 마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남작가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고, 한시라도 빨리 고쳐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돈을 벌 수 있었다. 로즈 가문을 일으킬 만한 막대한 돈을 말이다.
***
율리시스는 한쪽 눈을 감고, 과녁을 가만히 보았다. 멀리 있는 과녁의 정중앙을 향해서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
“명중∼!”
과녁판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하인이 큰 목소리를 내면서 빨간 깃발을 흔들었다. 가장 가운데에 있는 과녁에 화살이 꽂혔다는 뜻이었다.
율리시스는 사냥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유의 피비린내도 싫고, 재미를 위해서 무언가를 죽이는 것도 싫었다. 전쟁광인 두 명의 형과 다른 길을 가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은 반드시 누군가를 죽였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말이다. 때론 가족에게 돌아가지조차 못했다. 시체를 탑처럼 쌓아 놓고 자랑스럽게 서 있는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율리시스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엔 아군이건, 적군이건 상관없었다. 그저 모두 안타까운 죽음일 뿐이었다. 율리시스는 활을 내려놓고선 탁자 위에 있는 시원한 물을 마셨다.
같이 활을 쏘던 투리스는 세 번째로 활을 부러뜨리고선 툴툴거렸다.
“콘티노국의 활들은 전부 너무 약합니다. 조금만 당겨도 부러지니 원.”
율리시스는 피식 웃었다. 투리스는 무기의 무게만 3kg가 넘는 검이나 손도끼를 사용했다. 그런 만큼 그의 손에선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활이나 가벼운 검들은 쉽게 망가져 버리곤 했다.
“어쨌든 내기는 내기야. 오늘 점심은 투리스가 사는 거라고.”
“왕자님께선 돈도 많으시면서 이 투리스의 작은 주머니를 왜 항상 다 털어 가십니까.”
“재밌잖아.”
율리시스는 일부러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흘러 다니는 소문들을 주웠다. 때론 노튼 공작의 이름을 팔아서 비싼 가게들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그 활동을 즐겼고, 그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나름 잘 활용했다.
예를 들자면, 잭슨 시무스의 현재 위치 같은 것이 그러했다. 그는 파티 이후로 자주 사라져 버리곤 했는데, 부인인 데이지 시무스조차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부부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안 좋아진 상태라고 했다.
“어이, 멜번!”
어제는 꽤 괜찮은 정보를 얻었다. 두 사람이 활쏘기를 하는 사이, 멜번은 그 정보를 확인하러 다녀온 참이었다. 멜번은 자세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선 말을 이었다.
“찾았습니다.”
그 말에 율리시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