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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3/121)

42화

늦은 밤, 방문이 열렸다. 잠옷에 가운만 걸치고 있던 엘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노크도, 부름도 없이 이 방을 들어올 사람은 카르만 혹은 샤르헨뿐이었다. 예의 없이 굴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이들 말이다.

“남작께서 이 밤중에 여긴 웬일이시죠?”

“내가 못 올 데를 온 건가?”

“그럼 아무 때나 올 곳인가요? 농담이라고 내뱉은 거라면 형편없네요.”

“그대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지.”

“전 그런 적 없어요.”

엘리아나는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카르만은 당황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대는 거절이 취미인가? 정체 모를 공작이 준 신발은 덥석 받으면서 내가 보낸 하인에게 모자나 만들라고 시킨 이유가 무엇이지?”

카르만은 진심으로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번번이 거절만 당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지만, 엘리아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모자를 만들라고 시킨 건, 남작가의 재정을 위해서예요. 지금 우리가 만들어서 팔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공방에는 거미줄이나 잔뜩 쳐 있죠. 숙련된 기술공도 없어요. 오랜 시간 버려져 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도구들도 모두 새로 사야 하고요.”

엘리아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 바보를 이해시키는 방법은 그렇게 자세히 말해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모자나, 장신구 같은 건 재료만 있으면 금세 만들 수 있어요. 일손이 부족하면 나와 베니가 달려들어도 되죠.”

“헌터 가문은 로즈 가문이 아니오. 그대가 직접 나서서 삯바느질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소.”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나도 여기까지 와서 예전처럼 일하고 싶진 않다고요. 장부를 보긴 봤어요? 엉망진창이에요. 페페가 기록을 빠뜨린 건 매달 몇십 건이 넘고, 식료품비는 멍청할 정도로 비싼 가격에 들여오고 있었어요.”

“…….”

“이 정도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모를 리가 없어요. 솔직히 말해 봐요. 카르만. 알면서도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 건가요?”

엘리아나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계산이 나올 만한 금액이었다. 이 정도는 샤르헨도 알 것이었다.

“그는 샤르헨에게 잘했소. 내가 챙겨 주지 못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그게 횡령을 눈감아 줄 이유가 될 순 없어요. 위병들의 봉급이나 위험 수당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고, 숙련공들은 죄다 해고해 버려서 공방이 텅텅 비어 있잖아요.”

카르만은 말이 없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이 남작가에 바라는 것이 많지 않아졌다. 이곳은 그저 중간에 거쳐 가는 장소일 뿐,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건 가주가 된 후에 다시 설계하면 된다. 이곳은 자신의 종착지가 아니므로, 유지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시간에 수도에 있는 헌터 가문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왔다. 이곳 남작가가 엉망이 되어 간 건 그런 계산 아래에서 묵인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엘리아나가 까발리고 나니, 한없이 창피해졌다. 한 저택의 주인으로서 책임을 저버리고 있었다는 게 다 드러난 셈이었으니까.

“샤르헨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지는 알겠지만, 내게 이 권한을 넘겨 준 후부터는 쉽지 않을 거예요. 난 페페에게서 로즈 가문을 다시 세울 만큼의 돈을 빼앗아 갈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그 정도로 페페가 빼돌리진 않았을 것이오.”

“모르는 소리 말아요. 100디온, 200디온이 모여서 1000디온, 2000디온이 되곤 하죠. 이게 한 해, 두 해 모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엘리아나는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한 가난한 귀족 가문의 일 년 치 생활비가 되어요. 땔감이 되고, 수프가 되고, 옷이 되죠.”

그녀의 말투에는 약간의 경멸이 섞여 있었다.

카르만은 모른다. 그 100디온이 필요해서 분수대로 뛰어들어 동전을 줍던 어린 소녀의 언 발과 손을. 태어나 가난 따위는 겪어 보지 못했기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샤르헨을 위한 선물은 지금 왕창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손대기 시작하면 당장 그 예산부터 잘라 낼 거니까.”

“그런 계산이라면, 그대도 나에게 보석이나 비싼 것들을 사 달라고 졸라야 하는 것 아니오?”

카르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엘리아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고, 조예도 깊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선물만 번번이 거절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내가 그대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아뇨. 그런 생각도 이젠 없고, 그냥 받고 싶지 않아요. 내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란 걸 바꿔 먹을 순 없소?”

“네.”

“어째서?”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요. 내가 말했죠, 나에게 더 이상 반하지 말라고.”

“당신은 나를 싫어하는 것이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엘리아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카르만이 싫었다. 이 사기 결혼이 싫었다. 게다가 하인들의 앞에서 모욕을 주거나, 집안의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며 협박하는 것도 싫었다.

카르만 헌터는 총체적으로 최악이었다.

엘리아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오.”

“뭘 어떻게 해요?”

“그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미쳤어요?”

“미쳤나 보지.”

엘리아나는 카르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 멀리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던 술 냄새가 났다.

“아니, 지금 나한테 술주정하러 온 거예요?”

“술주정이 아니오.”

“지금 술 냄새가 장난이 아니에요. 알아요?”

“내가 물은 말에 대답하시오. 어떻게 하면 그대가 나를 좋아하겠소?”

엘리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선 말했다.

“난 술에 취한 사람과 거래하지 않아요. 어차피 다음 날이 되면 다 까먹으니까.”

“난 거래를 원하는 게 아니오.”

“아뇨. 이건 거래죠. 내가 당신에게 상냥하게 굴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 주는 그런 행동을 하는 대신에 내가 받고 싶은 걸 얘기하는 거잖아요.”

“진심이 없는 행동을 하라는 말은 아니요.”

“뭐 때문에 술에 취해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진정한 사랑인 샤르헨에게 가 봐요. 그녀라면 기뻐서 펄쩍 뛰어 줄 테니까.”

“…그대는 분하지도 않소?”

엘리아나는 기가 막혔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건 카르만 헌터였다. 그런데 자신한테 되레 분하지 않냐는 둥, 마음을 돌려 달라는 둥 헛소리만 해 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 집안의 경제권을 지닌, 이 남작가의 주인이었다.

‘살살 달래서 빨리 보내자. 술에 취하니까 사람이 정말 이상하네. 차라리 무뚝뚝한 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엘리아나는 카르만의 팔을 붙잡고 문 쪽으로 이끌었다. 카르만은 순순히 엘리아나의 손에 이끌려 움직여 주었다. 몸이 가까이 붙으니 술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얼마나 마신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내일 다시 얘기해요. 어차피 장부 얘기도 하러 가야 하고. 몇 가지 상의할 것도 있어요.”

“내일도 그대는 나를 미워할 테지.”

“네네. 그러니까 내일부터 제가 덜 미워할 수 있게 알아서 잘 방안을 찾아보시고요. 빨리 가요. 밤이 늦었고, 모두가 자는 시간이라고요.”

잘 끌려오던 카르만은 문 앞에 서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돌처럼 굳은 그는 멀뚱히 엘리아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왜 갑자기 바닥에 붙은 사람처럼 굴어요? 빨리 가요.”

“어째서 내가 가야 하지?”

“정말 남작님 당신 술주정 장난 아니네요. 당연히 가야죠. 여긴 내 방이니까요.”

“남작 부인의 방.”

“네. 맞아요. 남작 부인 엘리아나 로즈의 방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나가 주시라고요.”

“나는 남작이오.”

엘리아나는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듯이 그를 보았다. 그러자 카르만이 자기 팔을 잡고 있던 엘리아나의 손을 붙잡았다.

“남편이 부인의 방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소.”

엘리아나는 순간 당황했다. 무력으로 치자면 엘리아나는 카르만에 비해서 턱없이 약했다. 이대로 자신을 억지로 범한다고 해도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카르만의 말마따나 남편이 아내를 안은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둘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아나는 카르만의 손을 탁 쳐 내고선 말을 이었다.

“왜 없어요?”

엘리아나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샤르헨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샤르헨은…….”

“나에게 구애하려거든. 이미 있는 여인을 정리하고 오세요. 나는 누군가의 두 번째가 되는 건 질색이니까.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거에요.”

“…….”

“완벽한 연인 옆에 방해꾼으로 남고 싶진 않거든요. 내 사랑을 원하거든, 정정당당해져 봐요. 물론 당신이 그럴 용기가 있다면.”

엘리아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문밖에는 야간 순찰을 나온 조셰프가 있었다.

“조셰프!”

엘리아나는 구원자라도 만난 듯이 조셰프에게 다가갔다. 조셰프는 굳은 표정으로 카르만을 보았다. 야심한 밤이었다. 더군다나 엘리아나는 얇은 잠옷 위로 가운만 걸친 상태였다.

“남작께서 많이 취하셨어요. 방으로 잘 모셔 주세요.”

“됐소.”

카르만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듯이 걸어 나갔다. 걸음걸이에 흔들림은 전혀 없었지만, 만취 상태인 게 분명했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조셰프가 묻자, 엘리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술주정은 딱 질색이야. 정말, 조셰프가 없었으면 난 저 술주정뱅이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했을 거야. 정말 고마워. 하필 베니가 없을 때 와서……. 더 취했으면 코라도 비틀어 놓는 건데. 어휴.”

엘리아나는 질색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을 닫으면서 틈새로 싱긋 웃어 보였다.

“덕분에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아닙니다.”

“잘 자. 조셰프.”

엘리아나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조셰프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달콤한 그녀의 목소리에 붙잡힌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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