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베니가 직접 문을 열자, 그 앞에는 르잔과 수선 담당 하녀가 함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남작께서 부인께 신발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셔서, 발의 치수를 재러 왔습니다.”
수선 담당 하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르잔은 옆에서 엘리아나와 베니의 눈치를 보았다. 베니는 엘리아나를 보았고, 엘리아나는 들어오게 하라고 손짓했다.
르잔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엉망이 된 발을 보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문밖에서 내칠 수는 없으니 들어오라고 한 것이다. 너무 기뻐하진 마.”
엘리아나의 말에 르잔은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럼 그렇지. 남작의 선물을 엘리아나가 덥석 받을 리 없었다.
“르잔. 남작께 내 발에 맞는 신발은 이미 생겼으니, 개의치 마시라고 전해.”
“그렇지만 부, 부인…….”
“차라리 그 돈으로 샤르헨의 구두를 하나 더 맞춰 달라고 해. 다음 달부터는 그녀에게 배당되는 예산이 확 줄어들 테니까. 울며불며 매달릴 때 입에 물려 줄 사탕을 미리미리 쟁여 두시라고 전해.”
르잔은 여전히 냉소 가득한 엘리아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선 옆에 있는 수선방 하녀와 함께 인사한 뒤 방을 나서려고 했다.
“잠깐. 르잔은 남작께 가 보고, 옆에 있는 아이는 잠시 남으렴.”
“부인, 저도 함께 남으면 안 되나요?”
“응. 안 돼.”
“…네, 물러가 보겠습니다.”
엘리아나는 단호했다. 르잔은 군말 없이 방을 나섰다. 수선방 하녀는 르잔이 나간 후에도 떨거나, 눈치 보는 기색 없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그녀는 늙은 농부의 것처럼 거친 손을 하고 있었다. 주근깨를 덮으려 옅게 화장하고,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소녀다운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수선방 하녀니? 이름이 어떻게 되지?”
“네, 부인. 하센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니?”
“올해 열아홉 살입니다.”
“수선방에 있는 지는 얼마나 되었고?”
“7년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구나.”
“…아, 아닙니다. 부인.”
하센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엘리아나는 베니에게 자신이 만든 모자 두세 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하센은 처음 보는 화려한 모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센.”
“네, 네. 부인.”
“이것과 똑같은 것들을 만들 수 있겠어?”
“재료만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재료와 공방을 내어 줄게. 앞으로 옷이나 커튼을 수선하기보다는 솜씨 좋은 하녀들을 모아서 이 모자를 만들도록 해.”
“이렇게 화려한 모자를 어디에…….”
“일단 만들어. 다 쓸 데가 있을 테니까.”
엘리아나의 말에 하센은 알겠다며 모자를 들고 나갔다. 베니는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엘리아나에게 물었다.
“벌써 물건을 만들어 놓게? 반응이 안 오면?”
“안 올 수가 없어. 헬렌과 저 모자를 쓰고 오델리 백작가에 방문할 거야. 곧 테네브 공작가에도 방문하겠지. 사람들은 궁금해할 거야. 저 가난한 엘리아나 로즈가 어떻게 오델리 백작 가문과 테네브 공작 가문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그런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으레 옷차림부터 뜯어보기 마련이고!”
“드레스는 아직 따라 하기엔 시기가 일러. 그러나 모자나 손수건, 우산이나 장신구는 좀 다르지. 분명 반응이 올 거야.”
엘리아나는 파티에 가기 전부터 자신이 입었던 옷과 장신구들을 통해 수익을 올릴 생각이 있었다. 수입을 확실히 올릴 수 있는 것은 재료 대비 수익률이 높은 사치품들이었다.
조르디언이나 다른 상단과 연결되어 멈춰 있는 공방들이 돌아간다고 해도 초기 비용이 훨씬 많이 들 것이었다. 그 비용들을 벌기 위해서는 작전이 필요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구상해 둔 것들을 차근차근 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페페의 서류를 다시 들고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빈틈이 많은 장부에는 엘리아나의 손길이 점점 더 많이 닿았다.
***
“아아악!!”
예쁜 꽃이 새겨진 찻잔과 주전자, 접시가 차례로 와장창 부서졌다. 접시 위에 있던 예쁜 모양의 쿠키들은 부서지거나 바닥을 굴러다녔다.
샤르헨의 하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파티가 끝난 후, 샤르헨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꽃잎을 띄운 물로 목욕을 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 뺨에 난 뾰루지 하나 때문에 오전 내내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온갖 좋은 약으로 붉게 올라온 것을 겨우 진정시켰을 무렵에는 새로운 소식이 왔다.
카르만이 엘리아나에게 신발을 맞춰 주려고 하녀를 보냈다는 소식이었다.
“엘리아나, 엘리아나, 그놈의 엘리아나!”
샤르헨은 화가 났다. 물론 엘리아나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거절하고선, 방에 틀어박혀 서류만 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도도한 척하는데 어째서 카르만의 마음이 점점 기우는 것일까? 엘리아나는 카르만의 전 부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분이 나빠서 이혼을 바로 요구하거나, 쩔쩔매거나, 어떻게든 카르만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되레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하게 요구했고, 쟁취했다. 그러다 카르만의 마음조차 빼앗은 것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금껏 어떤 파티든 그곳의 주인공은 샤르헨이었다. 예쁘게 가꾼 정원에 핀 한 떨기 꽃처럼 하늘하늘하고 아름다운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떠했던가. 모두 화려한 장미 같은 엘리아나에게 집중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뿐 아니라 차고 있던 목걸이, 머리 장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테네브 부인, 오델리 백작, 질리언 허트와 이야기를 나누니 더더욱 관심은 커졌다.
그녀가 먼저 파티장을 떠난 후에도 부인들은 머리에 꽂은 것이 메추리 깃털인지, 까투리 깃털인지에 대해서 한참 얘기했었다.
샤르헨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드레스와 장신구에 관한 관심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참을 수 없어!”
샤르헨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붕괴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게 모두 엘리아나 때문이었다. 그녀만 없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었다.
조용히 제리크 헌터가 숨질 때까지 얌전한 수양딸 행세나 하다가 이 남작가의 정식 주인이 되면 끝이었다. 그렇게 정식 귀족으로서, 남작 부인으로서 사는 삶만이 샤르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든 꿈이 부서지는 것을 샤르헨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엘리아나가 이 남작가를 나가는 것이 목표고, 카르만 헌터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카르만은 그녀에게 점점 더 노골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남작가의 행정을 신경 쓰기 시작하면 저택에 있는 하녀들이나 시종들도 그녀의 말을 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벌써 샤르헨은 이미 끈이 떨어졌으니, 엘리아나에게 잘 보이는 게 낫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녀장인 메이가 혼내 주었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는 계속해서 수군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간단해. 걔만 없어지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페페도 돌아오고, 카르만도 잠시 한눈을 팔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할 거야.”
샤르헨의 눈은 반쯤 미쳐 있는 사람의 것과 비슷했다. 메이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샤르헨은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사교계도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다들 나를 다시 좋아해 줄 거야. 내게 제일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샤르헨이 작은 손으로 테이블 위를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샤르헨은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페페를 찾아서 전해. 엘리아나가 페페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해. 집사의 자리가 아니라 목숨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부인, 하지만 집사가 남작께 이를 고하면 오히려 저희만 불리해질 것입니다.”
“그럴 리 없어. 그는 지금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거야. 그간 빼돌린 게 얼마인데!”
샤르헨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라고 보는 눈이 없어서 모르는 척했는 줄 알아? 그것 중 일부를 나를 위해 썼기 때문에 봐줬던 거야. 나의 귀걸이, 반지, 아름다운 보석들이 모두 엘리아나에게 돌아가는 꼴을 보라고?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메이는 어두운 표정으로 다른 하녀에게 말을 전하라 지시하고선 모두를 내보냈다. 그러고선 샤르헨에게 다가왔다.
“부인, 더러운 일은 페페의 손으로 처리하게 하고, 그 이후에는 페페도 제거해야 깔끔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야.”
메이는 샤르헨의 독기 어린 눈동자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녀가 선택한 바였다. 그렇다면 더 확실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함께 살길을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었다.
메이 역시 샤르헨이 남작 부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베니라는 엘리아나의 시녀장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그녀를 따르는 무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모든 하녀의 통솔권은 분명 자신에게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샤르헨 님이 버림받으면 나도 끝인 거야.’
메이는 이 일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엘리아나가 남작가에 꼭 필요한 인재이고, 남작 부인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은 샤르헨의 쪽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승리하는 쪽은 엘리아나가 아니라 샤르헨이어야 했다.
어떤 더러운 술수를 쓰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메이는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확실한 방법을 저희 쪽에서도 찾아 두겠습니다.”
“그래. 역시 메이는 내 말을 좀 알아듣네. 이 남작가의 시녀장다워. 오늘 이 방에 있었던 애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는 게 좋을 거야.”
“네, 부인.”
메이는 말을 마치고선 샤르헨의 방을 나왔다. 그러고선 주위를 살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섰다.
샤르헨의 방문 바로 옆 기둥 뒤에 서 있던 르잔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었다. 메이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화가 난 샤르헨의 목소리는 방 밖에서도 들렸다.
‘샤르헨 님이 남작 부인을 죽이려고 하다니!’
르잔은 메이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꽉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