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침에 조셰프와 함께 온 의사는 응급처치가 아주 잘 되어 있다고 베니를 칭찬했다. 그는 더 좋은 재료의 약을 발라 주고선 돌아갔다.
엘리아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남작가의 재정 상황에 대한 정보를 보았다. 페페의 집무실에서 다 털듯이 가져온 것들이었다.
엘리아나는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모두 체크하고 있었다. 마치 과외를 하던 시절, 학생들의 점수를 매기던 것처럼 말이다.
“엘리, 오늘은 조금 쉬는 게 어때?”
“발이 아픈 거지. 몸은 멀쩡해. 집사가 손 쓰기 전에 얼른 다 회수해야지. 이게 다 로즈 가문의 재산이 될 거야.”
“그 집사, 입만 둥둥 떠다니더니……. 내 그럴 줄 알았어.”
“엄청나게 큰 규모는 아마 아닐 거야. 그럴 만한 담이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치만 조금씩 좀먹는 게 더 무섭지.”
“그렇지.”
엘리아나의 생각도 그랬다. 집사 페페는 간이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 집안의 허술함은 아주 오래된 그것이었다. 며칠에 한 번 30디온, 50디온씩만 챙겨도, 한 달이면 위병 한두 명의 봉급은 거뜬히 가져갈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잘하면 이것이 남작 가문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르디언 상단과 만나려고 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헌터 남작가에서 생산할 수 있는 양초나 우유, 종이 같은 것들에 대한 조언을 받기 위해서.
엘리아나는 가문의 공방을 가동하여 재료를 주기적으로 구매하고, 양질의 상품이 나왔을 때는 역으로 판매하는 구조를 만들길 원했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가 꼭 조르디언 상단이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높은 콧대의 제데이아를 혼내 주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굳이 잭슨 시무스와 연관된 조르디언 가문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잭슨 시무스는 무슨 사업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에게 돈을 대 주고 있는 부인들이 진짜 있을까? 잭슨 시무스의 사업 수완은 별 기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도미누스 밀과 손을 잡고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도미누스 밀. 콘테르국의 장남으로, 왕위 계승 1후보였다. 그는 전쟁 중독자라고 불릴 정도로 전쟁을 좋아해서 주변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곤 했다.
둘째인 헨리우스 밀이 전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면, 도미누스는 육체파였다. 상대를 밀어붙이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전술이고 뭐고 일단 다 때려 부수고 보는 것이었다. 그런 무식한 방법이 과연 어디에나 통할까 싶었지만, 그는 통할 때까지 달려드는 근성이 있었다.
왕위 계승 자리를 치열하게 다투는 도미누스와 헨리우스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었다. 한 사람은 모든 일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어야 직성이 풀렸고, 한 사람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율리시스는 어떤 스타일일까?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아.’
엘리아나는 갑옷을 입은 율리시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썩 잘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고선, 조셰프를 호출했다.
조셰프는 어제보다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엘리아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조셰프, 덕분에 내일 정도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부인.”
“조셰프. 나 부탁할 게 있어.”
“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잭슨 시무스에 대해서 알아봐 줘. 어떤 사소한 정보라도 좋아. 은밀하게 알아보면 더 좋고.”
조셰프는 엘리아나의 말에 살짝 눈치를 보았다. 예상과 다른 태도에 엘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했는데, 조셰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제 시무스 부인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하셨다 들었는데, 그 보복 때문이신 겁니까?”
조셰프는 시무스 가문과 엘리아나가 척질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시무스 가문은 정기적으로 뛰어난 기사를 배출해 낸 가문으로,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는 집안이었다.
게다가 데이지 시무스 부인은 불 같은 성질로 유명했고, 잭슨 시무스도 만만찮은 성격이었다.
엘리아나는 조셰프의 걱정을 눈치채고선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전혀, 전혀. 그런 짓은 이미 예상했었어. 시무스 부인이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런 건 분하거나 복수해야 할 만한 거리도 되지 않아. 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인걸.”
“그렇다면.”
“나는 데이지 시무스와 동맹을 맺고 싶어. 그걸 위해서 필요한 정보들이야.”
“아…….”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캐내 봐. 못 들어줄 정도로 지저분한 소문부터 떠도는 이야기까지 전부.”
“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가 조르디언 일가와 접촉하는 일정이나 일이 있다면 반드시 알려 줘.”
“‘그’ 조르디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그 조르디언 상단. 아, 그리고 이제 위병 훈련이나 순찰 근무에서는 완전히 빠져도 된다는 것 알고 있지?”
조셰프는 엘리아나의 전임 경호병이었다. 이제 다른 이의 명령을 받을 필요도 없었고, 훈련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거운 체인 아머를 입지 않아도 되었고, 하는 일도 달랐다.
같은 위병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출세나 다름없었다. 그 일 이후로 도서관 담당 위병의 경쟁률이 치열해졌다는 웃지 못할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인.”
“이것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단 말이야? 대단해, 조셰프.”
씩 웃은 엘리아나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발이 묶여 있긴 했지만, 손은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조셰프는 바쁘게 남작가의 재정 현황을 살피는 엘리아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부인.”
“응?”
“행정권을 가져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 헌터가에 계속 남아 계실 생각이십니까?”
조셰프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엘리아나는 서류를 내리고선 조셰프에게 되물었다.
“그런 걸 왜 묻지?”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전 그저… 부인께서 행복한 곳에 계셨으면 해서……. 이곳은.”
조셰프는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인으로서 할 수 없는 범위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서류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난 조셰프를 로즈 가문의 기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어. 기억해?”
“네.”
“그러려면 당연히 떠나야 하는 거 아니겠어? 난 얼른 이 뚱보 집사의 주머니를 털어서 로즈 가문의 창고를 불릴 생각만 한다고.”
“…….”
“그러니까 이제부터 쓸데없는 걱정이나 질문은 삼가도록. 이렇게 여러 번 입에 올리는 것도 좋진 않은 일이니까. 나를 믿어.”
“…….”
“내가 그대를 믿는 것처럼.”
조셰프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선 몸을 일으켰다.
“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바로 잭슨 시무스를 조사하러 가 보겠습니다.”
“응. 너무 위험한 건 접근하지 말고. 그대와 나를 위해서.”
“네. 부인과 저를 위해서.”
조셰프는 엘리아나의 말을 한번 곱씹듯이 말해 보고선 몸을 돌려 나갔다. 엘리아나는 일부러 조셰프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쓸모없는 희망을 줘선 안 됐다. 서로가 서로에게 취할 수 있는 이득만을 가져가는 관계가 되어야 했다. 엘리아나에게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랬다.
더군다나 베니와 조셰프는 특별했다. 로즈 가문으로 데려갈, 자신의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쪽에서도 진심이 되어선 안 된다.
조셰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질리언, 율리시스, 카르만, 심지어 제데이아까지도 말이다. 모두 적정한 선까지 이용해서 이 남작가를 무사히, 아무런 피해 없이 탈출하는 데 써먹어야 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베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선물 상자가 있었다.
“엘리, 선물이 왔어.”
“선물? 누가 보낸 건데?”
“보낸 사람은 모르겠어. 근데 날 콕 집어서 불렀다길래 나가 봤더니 네게 전달해 달라고 어떤 남자가 줬어. 너무 무섭게 생겨서 열어 봤는데,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들고 왔어.”
“얼마나 무섭게 생겼길래?”
“아니 난 그렇게 덩치 큰 사람 처음 봤다니까. 우락부락하게 생겨서는 맨주먹으로 벽도 부수게 생겼어. 근육이 막.”
베니는 정말로 무서웠다면서 선물을 건넸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 상자였다. 엘리아나는 선물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한 켤레의 단화가 들어 있었다.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어느 옷에나 어울릴 법한 깔끔함이 있었다.
엘리아나는 단화 옆에 놓인 작은 올리브 가지를 들었다. 편지도, 무엇도 없었지만 누가 보낸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단서였다.
“올리버.”
엘리아나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베니는 놀라서 말을 이었다.
“아니, 올리버 공작이 보낸 거야? 어쩐지! 어제 내가 허트 가문에 너 대신 인사말을 전하고 나오는데 나를 붙잡고 물어보더라고.”
“뭐를?”
“네 신발 사이즈를.”
“아.”
엘리아나는 부드러운 가죽의 겉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절뚝거리는 것을 본 것일까? 율리시스는 눈썰미가 좋은 남자였다. 구두를 고르는 센스도 좋은 것 같았다.
율리시스의 선물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고가이든, 저가이든 상관없이 미소부터 나오게 되었다. 엘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드는 사적인 감상을 털어내면서 베니에게 대답했다.
“서로 협력하기로 한 부분이 있거든. 잘 부탁한다는 뇌물인가 봐.”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종합했을 때 그렇게 말하고, 생각해야 했다.
정치적인 관계. 엘리아나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관계는 그래야만 했다.
“아, 그랬구나. 어쨌든 편한 신발로 보여서 다행이야. 아무리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해도 마땅히 신을 만한 게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응. 다행이야.”
엘리아나는 올리브 가지를 상자에서 꺼내 자신의 침대 옆에 올려 두었다. 싱그러운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엘리아나가 막 신발을 꺼내서 신어 보려는 순간,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