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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40/121)

39화

엘리아나는 허트 남매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빠져나왔다. 엄지발가락이 빠질 것만 같았다. 이런 높은 구두를 장시간 신은 것은 처음이었다. 드레스와 어울리는 것을 찾느라 무리해서 디자인이 화려한 것을 고른 터라 발이 더욱 무겁고 불편했다.

예산이 조금 더 많이 있었다면 발이 편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아나는 기둥을 붙잡고선 숨을 내쉬었다.

‘베니와 조셰프가 오면 돌아가야겠어.’

피가 온통 발에만 쏠린 것 같았다. 아까 춤을 출 때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척할 수 있었는데,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척 샴페인 한 잔을 들고선 창밖을 보았다. 누가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할 분위기로 말이다. 사실은 신발에서 내려오고 싶지만, 고통을 참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니와 조셰프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아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베니, 조셰프.”

“부인, 괜찮으십니까?”

“발이 아파. 안 신던 걸 신었더니.”

“세상에. 부인. 일단 나가셔요. 발 상태를 살펴보아야겠어요.”

베니와 조셰프는 엘리아나를 부축해서 연회장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엘리아나는 최대한 절뚝거리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일부러 에스코트를 받는 척을 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왔어?”

“남작께서 본인의 마차를 보내 주셨더라고요. 엇갈렸던 모양입니다.”

“카르만도 뒤늦게 눈치를 챈 모양이군. 아예 머리가 없는 건 아니라 다행이야. 내가 불참하면 곤란해지는 건 카르만 본인이거든.”

“부인, 발에서 피가 나요. 아무래도 이 싸구려 가죽에 심하게 쓸렸나 봅니다. 계속 아프셨을 텐데… 참으셨다니…….”

“괜찮아. 크게 호들갑을 떨 만큼 아프진 않아. 두 사람이 왔으니까 됐어. 인사만 하고 돌아가야겠어. 조셰프는 바로 갈 수 있도록 마차를 앞에 준비해 줘. 베니는 나를 좀 부축해 주고.”

조셰프는 굳은 표정으로 몸을 잠깐 숙였다가 빠르게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베니는 조심스럽게 엘리아나를 부축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아나는 우선 파티의 주최자인 오델리 백작에게 가서 몸을 숙였다.

“오, 헌터 부인. 벌써 가시는 것이오? 아직 제대로 얘기를 나눠 보지 못했는데. 아쉽구려.”

“파티에 참석해 본 것이 처음인지라 이 훌륭한 연회에 폐를 끼쳤던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곧 백작가로 한번 찾아뵐게요. 막내 아드님께 초대받았거든요.”

“레이가?”

“네. 헬렌 허트 양과 함께요.”

헬렌 허트라는 말에 오델리의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동그랗게 말린 콧수염을 움찔거리면서 웃었다.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좋아. 좋소. 부인은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구려. 곧 봅시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소.”

“이토록 아름다운 연회를 저의 첫 사교 파티로 만들어 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려요.”

엘리아나가 예를 갖춰 인사하자, 오델리 백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엘리아나는 오델리 백작에게 인사를 마치고선 제데이아가 지키고 있는 테네브 부인에게 다가갔다.

“부인.”

“오, 엘리아나. 돌아가나요?”

“홀연히 떠나 모두의 아쉬움을 갖고 싶어서요. 그 예전에 부인이 그러셨던 것처럼.”

“정말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인 것만 같군요. 대단해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내가 더 궁금해질 정도예요.”

엘리아나는 쑥스럽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제데이아의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번 파티를 위해서 조금 준비했을 뿐이랍니다. 조만간 아름다운 정원에 초대해 주세요. 헬렌이 일전에 부인께서 보내 주신 식물들을 보여 줬는데 정말 아름다웠답니다.”

“그 아이가 그것을 열심히 키우던가요?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서 서신으로만 얘기를 들었죠.”

“직접 보시면 아마 부인의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정말 아름다웠답니다.”

“두 사람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지,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웠을 텐데 말이죠.”

“저희만의 비밀이 있답니다. 나중에 부인께만 살짝 알려 드릴게요.”

테네브 부인은 자신이 어떤 비밀 이야기에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는지 크게 웃었다. 엘리아나는 제데이아가 아닌 에이린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다음엔 함께 허트 가문에 방문해서 직접 보여 드리고 싶어요. 헬렌이 허락한다면요. 에이린 양도 함께한다면 좋겠군요. 아마 테네브 가문의 이름다운 두 분께서 오신다면 질리언 경도 기쁘게 맞이할 거예요.”

“저, 저도요? 그치만… 소, 소문이 안 좋던데요. 부인이 질리언 경을.”

“에이린.”

테네브 부인이 엄한 목소리를 내었지만,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대답했다.

“저에 관한 소문은 백 가지도 넘을 거예요. 우리 부부가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헌터 가문은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는 편이랍니다.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죄, 죄송해요, 부인. 그런 말이 아니라…….”

에이린이 제데이아와 테네브 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엘리아나는 이런 대우가 익숙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테네브 부인에게 인사를 했다. 발의 통증이 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딸의 무례를 용서해요.”

“전 솔직한 게 더 좋아요. 이렇게 직접 해명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또 뵈어요. 부인.”

엘리아나는 제데이아에게는 인사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제데이아는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으나, 휙 몸을 돌려 버리는 엘리아나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이봐요, 헌터 부인.”

“제데이아. 그게 무슨 말투니.”

테네브 부인은 연달아 자식들이 엘리아나를 무례하게 대해 곤란한 듯 말했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몸을 돌려서 제데이아를 보았다.

“아, 제데이아. 제가 아까 대화의 마무리를 잘 하지 못했었죠? 생각해 보니, 걱정하셨던 게 무엇인지 이해가 되더군요.”

“…….”

제데이아는 당황스러웠다. 조르디언 상단을 소개해 달라고 당당히 거래를 요구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지? 제데이아가 뭐라고 답하지 못하는 사이, 엘리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저의 정숙하지 못한 태도가 테네브 부인께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오늘의 충고, 고마웠어요. 그럼 이만.”

“제데이아. 너 설마 그런 말을 헌터 부인에게 했니?”

엘리아나는 돌아섰지만, 제데이아는 가타부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테네브 부인은 크게 실망했다는 듯이 아들과 딸을 바라보았다. 엘리아나는 어두워진 분위기를 느끼면서 유유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헬렌과 질리언에게는 베니가 가서 사정을 전해 둔 터였다. 엘리아나는 곧장 연회장을 벗어났다. 카르만은 자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아내의 모습을 쓸쓸히 지켜보았다.

***

“아야…….”

엘리아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발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조셰프는 베니의 말에 따라서 따뜻한 물을 받아 왔다. 그사이 엘리아나는 복잡한 코르셋과 파니에를 벗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걸을 때마다 발이 찌릿찌릿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수확이 있었다.

드레스 룸 밖에서 대기하던 조셰프는 어두운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오는 엘리아나를 부축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곁에서 부인을 도왔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 베니와 그대는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 파티는 완전히 망쳤을 거야.”

“하지만 제가 한 거라곤…….”

“내가 기대했던 것의 두 배 이상을 해 주었어. 조셰프. 나를 위해서 질리언을 찾아다니고, 베니를 데려다주고, 또 나를 이렇게 다시 남작가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었잖아? 난 이렇게 부릴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그러니 그대는 좀 더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

조셰프는 그런 엘리아나의 말에도 표정을 펴지 못했다. 엘리아나의 아픈 발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엘리아나는 조셰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선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조셰프가 나를 위해서 해 줘야 할 건 많으니까, 너무 시무룩해하지 마. 내가 다 속상하니까.”

“부인…….”

“오늘은 돌아가서 쉬도록 해. 나도 그대가 떠다 준 물로 발을 깨끗이 씻고 조금 쉬어야겠어.”

“네. 내일 일찍 의사와 함께 오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네. 수고했어, 조셰프.”

엘리아나는 조셰프를 보내고선 소파에 앉았다. 베니는 이미 상처에 바를 약과 찜질을 할 뜨끈한 수건까지 모두 준비해 둔 차였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앞에 앉았다. 베니는 아주 조심스럽게 엘리아나의 발을 닦아 주면서 말을 이었다.

“엘리.”

“응, 베니.”

“나는 엘리의 마음만큼은 이 발처럼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연회장에서 무슨 얘기를 들었구나.”

“지나가면서 들은 말들이었어. 다들 널 부러워하면서 시기하더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엘리아나 로즈의 마음엔 작은 생채기도 되지 않았으면 해.”

베니는 부드럽게 엘리아나의 뒤꿈치를 닦으며 말했다. 엘리아나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가족들이 있는 따뜻한 품으로 말이다.

이 커다란 남작 저택에 자신의 편이라고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베니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만큼은 로즈 가문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엘리아나는 고통에 눈을 찡긋거리다가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것들은 내게 들리지도 않았어. 그보다 네게 해 주고 싶은 일들이 많아.”

“무슨 일이 있었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다 얘기해 줄게.”

엘리아나는 어른에서 소녀로 돌아온 것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베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엘리아나 로즈의 사랑스럽고 여린 모습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베니는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며 발에 약을 발랐다.

“아야얏… 살살…….”

엄살을 피우듯이 말하는 엘리아나의 목소리 뒤로 부서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오늘 밤의 치열했던 일들을 모두 지운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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