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121)

38화

“그건 아직 알 수 없어요. 애석하게도.”

“알아보는 중이군요. 나한테 그 정보를 알려 준 것도, 뭔가 알게 되면 알려 달라는 뜻이고요?”

율리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콘테르국을 바라보듯이 시선을 멀리 두었다.

“왕명이에요. 모든 진실을 밝히게 되면 로즈 가문에도 반드시 답례하겠으니, 꼭 내 편에 서 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도미누스가 내게 접근할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엘리아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아요.”

엘리아나는 제가 했던 말을 돌려 주는 율리시스의 모습에 작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 로즈 가문에 관한 부분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이웃 나라의 왕위 쟁탈전에 휘말려도 되는 것일까? 아니. 그래선 안 됐다.

하지만 엘리아나의 이성과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음은 율리시스의 편으로 기울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직 파악도 할 수 없는 왕자님의 편에 말이다.

엘리아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민이 길어지고, 여러 가지 복잡한 계산이 들어갈수록 답은 꼬이기 마련이었다.

“좋아요.”

그녀는 경쾌하게 말했다. 일단 율리시스에게 왕명이 내려왔다는 건 왕의 믿음이 야심을 드러낸 첫 번째, 두 번째 왕자보다 그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거론되지 않은 세 번째, 네 번째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의 선택에 어중간한 부분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결혼이 사기 결혼이란 걸 알게 된 첫날밤부터 말이다. 그 이후로 엘리아나가 선택한 모든 선택지는 극단적이었다.

망해 버리면 다시는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랬기에 얻은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담담하면서도 대범하게 나아가야 했다. 그래야 조금 손실이 있더라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빠른 대답에 다시 한번 손뼉을 쳤다. 그녀는 관찰력도 좋고, 정보 수집력도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탁월한 것은 빠른 판단력이었다.

오델리 백작 앞에서 마치 연극을 하듯이 시무스 가문을 몰아붙일 때도 그랬다. 그녀의 순간적 판단은 매우 빠르고 대범했다. 율리시스가 그녀를 형제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아마 내가 아는 그들이라면 당신을 금세 알아볼 테죠. 이를테면 체스의 룩(Rook) 감으로요.”

“너무 후하게 쳐주는 것 아닌가요. 난 그 정도의 기동력이나 힘은 없는걸요.”

“아니요. 엘리아나.”

“…….”

“당신은 룩이 아니라 퀸(Queen)이에요.”

체스판의 퀸. 가장 강력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단호한 율리시스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율리시스의 뺨에 살짝 닿았다.

“킹(King)이 그렇게 부르시겠다면야.”

“…….”

“말릴 수 없죠.”

엘리아나의 말은 이중적인 의미였다. 체스판의 킹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율리시스가 노리고 있는 콘테르국의 왕 자리를 말하기도 했다.

율리시스는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엘리아나에게 점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율리시스의 눈동자가 오롯이 엘리아나만을 담아냈다.

엘리아나는 그 황금빛 눈동자 안에 자리한 자신을 바라보다가 손을 뗐다. 그러고선 부채를 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조만간 또 뵙죠. 올리버가 힌트를 줬으니, 잭슨 시무스에 대해서 알아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 엄청난 정보원들은 다 어디서 구한 거예요?”

“가난에 구르고, 기어 다니면서 만난 좋은 친구들이죠.”

“…….”

“돈 앞에서는 한없이 나빠지기도 하지만요.”

엘리아나는 푸흐흐 웃음을 내뱉고선 몸을 돌려 연회장 문으로 향했다. 율리시스는 그녀가 연회장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특히 꼿꼿하게 움직이려고 하지만 미묘하게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말이다.

***

엘리아나가 연회장으로 돌아오자, 헬렌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그녀는 볼이 살짝 붉어진 상태였는데, 아마도 술을 조금 마신 모양이었다.

“엘리아나!”

“오, 헬렌. 볼이 빨갛네요. 와인을 한잔했나요?”

“샴페인을 조금이요. 술을 잘 못하거든요. 어디 갔다 왔어요?”

“절 찾는 이들이 아주, 아주 많았답니다. 소란스럽지 않게 잘 처리하고 왔죠.”

“그랬군요. 오라버니가 한참 찾았어요.”

“질리언이 나를요?”

“세 번째 노래가 나오기 전에 찾고 싶어 했어요.”

엘리아나는 눈으로 질리언을 찾았다. 그는 연회장의 중앙에서 오델리 백작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쉽게 됐네요. 질리언과 춤을 춰 보는 영광을 놓치다니.”

“저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레이 오델리와는 이야기를 잘 나눴나요?”

헬렌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몸을 비비 꼬면서 말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요. 아, 오델리 백작가에 초대받았어요.”

“정말요? 너무 잘됐네요.”

이대로 레이와 헬렌이 결혼하게 된다면 그녀는 질리언에게 완전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허트 가문과 로즈 가문의 사이가 돈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레이 오델리에게도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미소를 지었다. 헬렌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이런 초대에 응해 본 적도 없고, 혼자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그… 괜찮다면… 혹시 같이 가 줄 수 있을까요?”

“헬렌을 도울 수만 있다면 나야 언제든 좋아요. 그러나 오델리 백작가에서 제 방문을 좋아하실까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엘리아나와 와도 좋다고 했어요.”

헬렌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지내 왔다. 그렇기에 더욱 사람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세상과의 연결 고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좋아요. 날 믿어요. 내가 재미있는 데이트를 만들어 줄게요.”

“데, 데이트는 아니에요. 그저, 오델리 백작가의 정원도 아름답다고 해서…….”

헬렌이 손부채질했다. 아무래도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엘리아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춤을 추느라 모양이 조금 구겨진 헬렌의 드레스를 다듬어 주었다.

“고마워요. 엘리아나. 그냥 여러모로… 전부 다.”

“친구끼리는 불필요한 말이에요. 헬렌.”

헬렌은 친구라는 말에 밝게 웃었다. 동그란 광대가 쏙 올라가는 게 사랑스러웠다.

오델리 백작과 얘기를 끝내고 돌아오던 질리언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요사이 동생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꽤나 자주 보는 듯했다. 질리언은 요즘 하루하루가 신기했다.

이혼 후 헬렌은 불이 꺼진 방 같았다. 무엇이 들어와도 그 어둠에 잠겨 버리는 것 같았다. 보석을 사 줘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사 줘도 그랬다. 어떤 때는 바깥을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오기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엘리아나는 그런 헬렌의 손을 잡고 밖으로 함께 나왔다. 처음엔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소문도 그랬다. 헌터 가문의 새로 온 부인이 질리언 허트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이 파다했으니까.

그러나 오늘 제 손에 에이린 테네브의 손이 올라가게 한 것도 엘리아나였다.

‘질투도 안 하나.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질리언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가 꼭 질투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와 에이린의 모습을 마냥 웃으면서 바라보길 바라진 않았다.

게다가 사이가 그렇게 안 좋다던 카르만과 그 모습은 다 뭐란 말인가. 둘은 마치 정다운 부부 같아 보였다. 질리언은 마음에 들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 광경에 볼을 긁었다.

그렇다고 왜 질투하지 않느냐고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헬렌과 레이를 이어 주고, 테네브 가문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게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질리언은 자꾸만 비틀어지려는 마음을 꽉 붙잡고선 헬렌과 엘리아나에게로 다가갔다.

“오라버니, 엘리아나와 오델리 백작가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갑자기 오델리 백작가에?”

“레이 오델리가 직접 초대했대요.”

엘리아나의 말에 질리언은 놀라서 헬렌을 보았다. 헬렌은 입술을 작게 다물고선 시선을 피했다. 질리언은 마음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레이 오델리는 헬렌에게 청혼했던 남자였고, 오늘 보니 여전히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헬렌이 이번엔 그에게 마음을 열어 줄 수 있을까? 헬렌을 변함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라면 안심일 텐데.

질리언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헬렌을 보다가 엘리아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걱정을 하는 거예요. 헬렌은 이미 숙녀라고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지금 표정이 딱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표정이었거든요? 그냥 데이트예요.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하는 거라고요. 나도 있을 거고요.”

“그대가 헬렌의 무엇이라고.”

자기 아내라면, 헬렌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카르만 헌터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다. 질리언이 자신도 모르게 툭하니 말을 내뱉어 버리자, 엘리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서운한 소리를 하네요. 질리언.”

“오라버니, 엘리아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요.”

“아니, 나는.”

“나는 헬렌의 친구이죠, 질리언.”

“…….”

“당신의 친구이기도 하고요.”

엘리아나는 그 사실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무구하게 말을 마쳤다. 질리언의 눈동자가 엘리아나를 향했다. 친구. 참 모호한 말이었다.

‘당신에게 나는 어디까지의 거리가 허락된 것이오?’

질리언은 엘리아나의 목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목걸이를 보았다. 허트 가문 사람이 아닌 여인에게 선물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든 지체 없이 결정하는 자신이 고르고 또 고른 물건이기도 했다.

질리언은 점점 뚜렷해지는 자신의 감정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친구’라는 단어가 자신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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