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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38/121)

37화

“잭슨 시무스 남작님은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뭐라고요? 그럼 내 남편이 남색을 한다는 거예요?”

“오, 부인. 아니요. 그런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럼 뭐예요?”

데이지 시무스는 성격이 급했다. 그녀는 당장 해답을 내놓으라는 듯이 다그쳤다. 엘리아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듯이 손등을 쓸어 주면서 말했다.

“부군께선 자신을 원조해 줄 귀족을 찾고 있어요. 주로 부인들에게 접근하는 건 맞지만, 그건 순전히 그들이 쥐고 있는 경제권 때문이에요.”

“그걸 어떻게 알죠?”

“자세한 건 여기서 다 말하긴 어렵죠. 어쨌든 남작님은 지금 사업을 크게 벌이고 싶어 해요. 제가 아는 가장 중요한 정보는.”

“정보는요? 말 좀 끊어서 하지 말아요. 감질난다고요!”

“조르디언 상단과 접촉했다는 거예요.”

“…그이가 그 장사꾼들과 왜요?”

귀족들에게 조르디언 상단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대단한 상인들이긴 했지만, 귀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데이지 시무스의 말처럼 장사꾼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보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건 이제 알아봐야 해요. 하지만 공짜로 알아볼 순 없죠.”

“얼마면 되죠?”

데이지 시무스는 당장이라도 지폐를 꺼낼 듯이 말했다. 원래도 급한 성격은 남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두 배로 급해지는 것 같았다.

“난 돈이 아니라 부인이 필요해요.”

시무스 부인은 이상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엘리아나를 보았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부인과 친해지고 싶어요.”

“오늘 그 일을 겪고도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요? 무슨 꿍꿍이죠?”

“데이지 시무스 부인. 성격이 화통해서 사교계에서 인기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죠. 어렸을 때부터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그 성격 덕분에 친구가 많잖아요.”

“많, 많지도 않아요.”

시무스 부인은 갑작스러운 칭찬에 당황한 듯이 말을 더듬었다.

시무스 부인은 명문 가문 출신으로 주변에 중요한 인사들이 많았다. 웬만한 남성들처럼 나서고, 목소리가 크기로 유명했다. 오늘 같은 일도 종종 있어서 적도 많았지만, 그만큼 그녀의 편을 들어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는, 도통 곁을 내주지 않기로 유명한 부인들이었다.

오늘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들끼리 공유하는 정보는 진짜였다. 왕실과 관련된 것들이거나 고급 정보일 때가 많았다. 그들은 온갖 알짜배기 정보들을 그들끼리만 공유하고 입을 닫았다.

사업 수완도 없고, 전쟁에 나서는 법도 없는 잭슨 시무스가 남작까지 올라간 데엔 이유가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 비법을 알고 싶었다. 은밀하고, 조용히 습득하고 싶었다.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평민들의 세계. 저질의, 귀족 영애들이 접근 불가능한 영역까지 쭉 손을 뻗어서 얻은 정보로 말이다. 그것을 교환하여 엘리아나는 로즈 가문을 더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싶었다. 학자 가문이라는 지위를 되찾고 싶기도 했다.

“절 그 모임에 끼워 주세요. 그러면 부인께 정기적으로 협력할게요. 잭슨 남작님이 그 행위를 멈출 때까지요.”

“그건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부인이 목소리가 가장 크잖아요.”

“그게 어디 목소리 크기로 할 정해지는 일이던가요? 그러면 더 쩌렁쩌렁한 사람들 말대로만 하게요.”

시무스 부인은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진짜 모르는 것인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 정말 목소리가 크다는 게 아니고요. 그만큼 영향력이 있다는 말이지요.”

“뭐, 모두 내 말을 잘 들어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 번이면 돼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한 번만 데려가 주면, 날 끝까지 돕겠다는 건가요?”

“물론이에요.”

“흥,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거기 있는 부인들은 오늘 오델리 백작처럼 멍청하게 당하진 않을 거라고요.”

엘리아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웃어 보였다. 시무스 부인은 자존심이 몹시 상한 듯 보였지만, 결국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럼 모임 날짜는 내가 따로 하인을 통해 알려 드리죠.”

“헌터 가문으로 한번 오세요. 제가 드릴 정보는 서신으로도 남아선 안 될 테니까요.”

“그이가 혹시 위험한 건가요?”

“아직 알 수 없어요. 제데이아를 통해서 알아보려고 했는데, 넘어오지 않더군요. 쏠쏠한 제안이었는데 말이죠.”

“벌써 제데이아 테네브에게도 거래를 제안했다고요? 말도 안 돼. 엘리아나, 당신 정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

시무스 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높게 들었다가 손부채질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엘리아나는 오직 미소로만 답했다.

“성사되었으면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쉬울 뿐이죠. 하지만 기회는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최선을 다할 테니, 부인께서도 저를 너무 적으로만 여기지 말아 주세요.”

엘리아나가 살랑살랑 웃음을 달고서 내뱉는 말에 시무스 부인은 입술을 움찔거렸다. 뭐라고 말대답하고 싶지만, 상대가 웃는 얼굴로 상냥히 말해 오니 할 말이 없었다.

“먼저 들어가죠. 연회 후에 그이에 대해서 알게 되는 대로 연락해요. 곧장 갈 테니까.”

“아마, 곧 뵙게 될 거예요.”

“그러길 바라요. 난 더 이상 조금도 견디기가 어렵다고요. 한계예요!”

시무스 부인은 질린다는 듯이 말을 하고선 돌아섰다. 엘리아나는 시무스 부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부인.”

“또 뭐죠?”

“오늘 한 루비 귀걸이. 꼭 부인을 위해서만 만든 것처럼 잘 어울려요.”

시무스 부인은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자기 귀를 만지작거렸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의복은 드레스에 과하게 힘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귀부인과 영애들은 으레 귀걸이나 팔찌, 목걸이 같은 곳에 포인트를 주곤 했다.

시무스 부인은 오늘 자신과 잘 어울리는 강렬한 루비를 골랐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이 잭슨 남작이 청혼할 때 선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 리가 없었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부인은 행복했던 때를 잠시 회상하다가 몸을 완전히 돌렸다.

“보는 눈은 있군요.”

차갑게 말을 내뱉고선 그녀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엘리아나는 두 가지 일을 끝내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아까부터 발이 뻐근하니 아팠다. 아마도 싸구려 가죽에 발이 쓸린 듯했다. 엘리아나가 치마를 들어 발을 보려고 하는데, 어디서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경쾌한 소리에 엘리아나는 뒤를 돌았다. 닫혀 있던 복도 창이 열리고 창틀에 앉아 있는 율리시스가 보였다. 엘리아나는 그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언제부터 거기에 숨어 있던 거예요? 남의 거래를 엿듣는 건 좋지 않아요. 올리버.”

“시무스 부인 성격이 워낙 다혈질이라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기했을 뿐이에요. 물론 엘리아나가 그녀에게 질 성격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지고 이기는 건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아뇨.”

엘리아나는 생긋 웃었다. 바람은 아까보다 조금 더 시원해져 있었다. 엘리아나는 복잡한 속내를 씻어 내듯이 바람을 맞으며 말을 이었다.

“난 지금 체스를 두고 있는 거예요. 이제 말을 한 마리씩 움직이고 있죠.”

“한 번의 움직임으로는 전체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뜻이군요.”

“올리버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아요.”

그는 영특한 편이었다. 엘리아나는 영특한 것은 때론 간편하다고 생각했다. 엘리아나의 칭찬에 율리시스는 복도 안쪽으로 넘어와 창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엘리아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엘리아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시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달처럼 밝다고 생각했다.

“눈이 참 예뻐요. 당신은.”

엘리아나는 단순한 감탄을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자 율리시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엘리아나는 그런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요.”

“그런 말?”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말이요.”

“이런 작은 칭찬에 주물러지는 마음이라면, 조금 더 단련해야겠는데요.”

“당신한테는 단련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사람들 말마따나 마법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마녀. 사람들은 아직도 엘리아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지력과 미모가 드러난 지금은 더더욱 말이다. 아름다운 마녀. 엘리아나는 그 별명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만든 허상일 뿐이었다.

“내가 고급 정보 하나 줄까요?”

“어떤 정보인데요?”

“조르디언.”

“설마, 제데이아와 내 대화까지 엿들었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율리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선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이건 내가 들은 건 아니고, 나의 기사가.”

“어쨌든요. 나쁜 버릇이에요. 올리버.”

“미안해요. 사과의 의미로 이 정보를 줄게요.”

“뭔데요?”

엘리아나는 팔짱을 낀 채로 율리시스를 보았다. 대화가 노출되는 것은 전략이 탄로 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율리시스가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건 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잭슨 남작이 조르디언 상단에 바라는 건 하나예요.”

“뭔데요?”

“민간 군수 물자 유통.”

“군수 물자?”

“아마도 첫째 형 쪽에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율리시스는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가벼운 어투였지만, 그 말에 담긴 이야기는 묵직했다. 엘리아나는 가만히 창문을 닫았다. 연회장 뒤쪽과 이어진 복도에는 율리시스와 엘리아나 외엔 누구도 없었다. 엘리아나는 아주 은밀하게 그에게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죠? 첫째 왕자인 도미누스 밀이 반역을 준비한다는 건가요?”

“그건.”

율리시스가 엘리아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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