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카르만의 춤 솜씨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엘리아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를 안은 채로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 나는 네 번째 결혼까지 망치고 싶지 않소.”
“망친다는 게 무엇인데요?”
엘리아나는 연회장의 중앙까지 부드럽게 나아가면서 말했다. 엘리아나 로즈는 그야말로 오늘 파티의 중심이자, 꽃이었다. 카르만은 아름답게 움직이는 엘리아나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똑똑한 여자요. 지금의 헌터 가문은 당신 같은 여자가 필요하고.”
“그래서요? 그래 봤자 어떻게 할 건데요? 어차피 진짜 남작 부인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
부드러운 턴이었다. 엘리아나는 마주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눈인사를 한 뒤에 다시 카르만의 품으로 돌아왔다. 카르만이 먼저 입을 떼기 전에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번엔 날 입양하기라도 할 건가요?”
“조롱하지 마시오.”
“조롱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난 당신의 아내였다가 딸이 되는 일은 겪고 싶지 않거든요.”
엘리아나는 생긋 웃으면서 카르만의 팔을 쓸었다. 카르만은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그녀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만약 그대와 이혼해 주지 않는다면?”
“샤르헨은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한 가문에 두 명의 부인이라. 그건 너무 욕심이 넘쳐요.”
엘리아나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제스처를 취하며 카르만의 가슴을 살짝 손으로 내리쳤다. 누군가 보면 춤을 추다가 짓궂은 농담을 들었다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둘의 대화는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카르만의 마음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보면 호통을 치기 일쑤던 카르만이었다.
‘역시 질투란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인가? 이 남자는 정말 어리고, 어리구나.’
어쩌면 정치적인 목적일 수도 있었다. 샤르헨에 비해서 엘리아나는 셈이 빨랐으니 말이다. 자신을 이용하면 카르만에게 본인에게 이득이 됐으면 됐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카르만은 그것을 노리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하기엔 너무 머리를 쓰지 않고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엘리아나는 박자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면서 카르만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엘리아나는 일부러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카르만은 몸을 잽싸게 피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엘리아나는 그와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속인지 알 수가 없네요, 당신.”
“물러나시오.”
“왜요? 내가 입이라도 맞출까 봐 겁이 나나 보죠?”
“…엘리아나.”
카르만이 낮게 그녀를 꾸짖자, 엘리아나는 밝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아예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카르만의 얼굴은 붉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적어도 첫날밤 자신에게 보였던 나무토막 같은 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신호가 엘리아나에게 좋은 신호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였다.
엘리아나는 그가 자기 허리를 부드럽지만, 조심스럽게 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쥐면 부서질 듯이 얹어져만 있는 꼴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을 확 끌어안지도, 화끈하게 입을 맞추지도 못하는 카르만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 짧은 시간에 자신에게 흥미를 느낄 정도로 줏대가 없다는 게 실망스러웠다. 못된 샤르헨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남자에게 평생을 바치겠다며 그의 수양딸로 들어가 세 명의 새엄마를 맞이해야 했던 여자가 말이다.
엘리아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헌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족끼리의 애정과는 다른, 어떤 뜨거운 것이 있다는 점만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아나에게는 한 번도 가족애보다 연인 간의 사랑이 뜨거워진 적이 없었다. 그토록 엘리아나를 안달하게 하는 남자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로즈 가문이 바로 서기 전까지 엘리아나에게 연정은 사치였다. 엘리아나는 마지막 턴을 마치고선 그를 안으면서 말했다.
“카르만. 사랑을 배신한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말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소?”
“그럼요.”
엘리아나가 웃으면서 그에게서 멀어졌다. 노래는 끝이 났다. 엘리아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선 적당한 거리에서 그를 불렀다.
“카르만.”
엘리아나와 카르만의 눈이 마주쳤다.
“나에게 반하지 말아요. 적어도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어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선 엘리아나는 뒤로 물러났다. 춤을 추지 않은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엘리아나는 그들을 향해서도 밝게 인사를 한 뒤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드레스 자락을 보면서 카르만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엘리아나는 정원 방향으로 트인 테라스를 향했다. 시무스 부인을 만나기 전에 한숨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잭슨 시무스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가 먼저 엘리아나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점이 미묘했다. 페페가 해고 직전이 되고, 남작가의 행정권이 엘리아나에게 넘어가기로 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아나의 문란한 소문에 흥미가 생겼다기보다는 엘리아나가 가지게 될 남작가의 재산을 탐내는 것 같았다. 엘리아나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내주고선 잭슨 시무스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았다. 잭슨 시무스는 그런 식으로 재정이 조금 넉넉한 부인들과 잦은 만남을 갖고 있었다.
질투심이 많은 데이지 시무스 부인은 그런 공작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란한 소문의 정점에 있는 엘리아나와 엮였다는 얘기를 듣자 폭발한 것이었다.
‘다른 부인이었다면 그렇게 공개적으로 공격하지 못했겠지.’
엘리아나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문도 좋지 않고, 가문도 기울었고. 옳다구나 싶어서 냅다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녀가 공격하고 싶은 건 자기 남편일 것이었다. 인제 그만 밖으로 돌고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강력한 항의인 것이었다.
“근데 왜 나한테 화풀이야?”
엘리아나는 아무리 자신의 소문이 좋지 않다고 해도 이런 식의 무시는 싫었다. 잭슨 남작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기 전에 반드시 사과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람이 불었다. 엘리아나는 시원한 바람에 눈을 감았다. 잠시 잠깐 여유를 느끼고 싶었다.
“대체 당신은 뭡니까?”
답답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엘리아나가 감았던 눈을 떴다. 제데이아 테네브였다. 엘리아나는 몸을 반쯤만 돌려서 제데이아를 보았다.
“무슨 뜻이죠?”
“연회장의 모든 분위기와 사람들을 손에 쥐고 흔들더군요.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모두 당신의 계획 아래에서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각자 알아서 말입니다.”
제데이아는 안경을 한번 치켜올렸다. 엘리아나는 테라스에 손을 올려 기대고선 말을 이었다.
“그게 어때서요?”
“뭐라고요?”
제데이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 명 한 명 찾아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 아닌가요? 제데이아, 난 당신처럼 대단한 사람이 못 돼요. 겨우 오늘에야 귀족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딘 여인이랍니다.”
“…….”
“자신만의 생각을 사실인 양 나에게 추궁하는 건 옳지 않네요. 내게 충분히 모욕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당신은 나를 예의 없는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하는군요.”
‘이건 뭐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엘리아나는 속이 답답했다. 제데이아는 보수적이고 경계심이 강한 제 아버지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재무부에서도 그가 유일하게 문제를 일으킬 때는 원칙과 맞지 않는 일에 부딪힐 때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답답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던 터였다.
엘리아나는 제 안에서 토해질 것 같은 나쁜 감정들을 억지로 삼키고선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준이 엄격한 사람들은 때론 부러져 버리거든요. 융통성이라는 게 없어서요. 제데이아가 지금 딱 그런 꼴이네요. 자신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이상한가요?”
“…….”
“그렇담 내겐 제데이아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어머니께 접근하는 게 불편하다고 했죠? 알겠어요. 테네브 공작 부인에게 먼저 향하는 일이 없도록 하죠.”
“왜 갑자기 말을 잘 듣는 겁니까……?”
제데이아는 무슨 꿍꿍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엘리아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제데이아와의 첫인상을 나쁘지 않게 마무리하려고 내뱉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좀 달라졌다. 무슨 꿍꿍이냐고 물으니, 요것 봐라? 하는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맨입으로는 어렵죠.”
“그럴 줄 알았습니다.”
“푸흡.”
“왜 웃는 겁니까?”
“당신이란 남자 참 뻔하다 싶어서요.”
“뻔한 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괜히 힘 빼지 말고 말해 볼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엘리아나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다. 제데이아는 마치 자신이 끌려가는 것 같은 대화에 불편함을 내비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좋아요. 뭐든 말해 보십시오.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을 얘기하는지 들어는 보겠습니다.”
“들어만 보겠다면 말하지 않을래요.”
“뭐라고요?”
“들어주겠다고 해야 말하겠어요. 궁금하다면 걸어 봐요.”
“…….”
“당신이 가진 칩을.”
엘리아나는 도박판을 진행하는 딜러처럼 말했다. 그녀의 환한 웃음에 제데이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