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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5/121)

34화

“미안한데, 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데요.”

“엘리아나.”

“아무것도 아닌 남작 부인.”

“그 말을 계속 걸고 넘어지는군.”

“이젠 어떤 존재가 되긴 했다는 건가요? 아하, 집사 정도?”

엘리아나는 장난스레 말했지만, 전혀 웃지 않았다. 카르만은 한숨을 쉬고선 말을 이었다.

“후, 여긴 어떻게 온 거요?”

“다 부서져 가는 마차를 보낸 게 당신인가요?”

“그럴 리가 있소. 당신이 불참하는 건 내 명예에도 문제가 생기는 일인데.”

“걸어서 오진 않았어요. 그렇게 궁금하면 범인부터 색출해 주시든지요. 누군지는 이미 아시겠지만.”

엘리아나는 시종일관 카르만과의 대화를 어서 끝내고 싶다는 듯이 말했다. 카르만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범인은 색출하겠소. 어떻게 온 것이오?”

“지나가던 올리버 공작의 마차를 얻어 탔어요. 아니었으면 못 왔겠죠. 마차 상태가 어땠는지 말해 줄까요? 다리가 후들거리는 늙은 말과 곧 죽을 것 같은 마부도 모자라, 출발도 전에 바퀴가 빠지더군요. 오히려 다행이었죠. 타고 나서 빠져 버렸으면 어느 길가에서 사고사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해치려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겠죠.”

“자꾸 비아냥거리지 마시오. 엘리아나.”

엘리아나는 카르만을 똑바로 바라보고선 말을 이었다.

“고압적인 태도로 나를 짓누르려고나 하지 마세요. 카르만 헌터.”

“…….”

“여긴 남작가가 아니라 왕실에서 제공하는 연회장이에요. 오델리 백작이 여기서 부부 싸움이나 하는 남작 내외를 좋아할까요?”

엘리아나는 싱긋 웃으면서 카르만에게 다가갔다. 그러고선 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세심히 털어 주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봐요. 여기서 소동을 일으켜 봤자, 제리크 헌터 공작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예요. 그러면 당신의 샤르헨이 아주 곤란하겠죠?”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뇨, 여보. 생각해 주는 거랍니다. 당신과 당신의 애인을. 이런 아내도 드물죠?”

엘리아나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카르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자기 어깨에 올려져 있는 엘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다음 춤은 나와 추시오.”

“나랑 춤을 추겠다고요? 우스운 꼴 아닐까요?”

“이 이상 남작 부부에 대한 헛소문이 돌게 하고 싶지 않소.”

“좋아요. 그 청을 받아들이겠어요. 이제 손을 놔 주시겠어요?”

“엘리아나.”

“네.”

“도대체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

카르만이 혼란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뒷말을 잇듯이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천박하죠.”

엘리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아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데이지 시무스 남작 부인이었다.

“같은 남작 부인이라는 게 창피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 옷차림새하며 이 연회장에 있는 온 남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웃음을 흘리는 것하며, 술집 접대부가 따로 없겠어요.”

목소리가 큰 시무스 남작 부인은 대놓고 엘리아나를 곤경에 빠뜨리겠다는 듯이 굴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를 뒤로 보내면서 말을 이었다.

“말조심하시오. 시무스 부인.”

“왜요? 내가 남작의 편을 들어 주는데 외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금 전까지 두 분이 얘기하는 걸 다 들었어요. 부부 사이가 참 안 좋더군요. 듣던 대로요. 역시 아내가 바깥으로 나돌면 남편이 고생하는 법이죠!”

시무스 남작 부인은 모두에게 엘리아나를 망신 주는 게 목적이라는 듯이 아예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마치 웅변하듯이 큰 목소리였다. 엘리아나는 자신을 막아 주고 있는 카르만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내가 할게요. 당신은 이런 난잡한 말싸움에 끼기엔 너무 고귀해요. 시무스 남작은 어디 갔죠? 아내가 남의 부인에게 천한 작부라고 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 저급한 단어는 쓴 적 없어요!”

엘리아나는 너무 속상하다는 듯이 데이지 시무스의 양팔을 잡았다.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가 몹시 슬픈 표정이었다.

“저를 창피주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소란을 피우는 건 곤란해요. 시무스 부인.”

그녀는 말을 내뱉고선 시무스 부인이 그랬듯이 몸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은 시무스 부인과 엘리아나를 향해 있었다.

“이 파티는 오랜만에 열린 연회죠. 그동안 사교 파티가 없어서 편하게 혼담을 나누지 못했던 가문끼리 만남을 갖는 장이기도 하답니다. 얼굴도 보고, 춤도 함께 추고, 이야기도 꽃피우면서요.”

엘리아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레이와 헬렌을 보았다. 두 사람은 엘리아나의 시선에 볼을 빨갛게 붉혔다. 엘리아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오델리 백작을 보았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오델리 백작께 무례가 되는 행동은 자제해 주세요, 시무스 부인. 제 욕은 광장에서 하셔도 좋고, 남작가에 찾아와서 해 주셔도 좋아요. 어차피 먹던 욕, 어디서 한 번 더 먹는다고 해서 배가 터지진 않더라고요.”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율리시스였다. 율리시스의 웃음소리에 여기저기서 참고 있던 웃음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엘리아나는 몸을 돌려 시무스 부인을 안아 주면서 속삭였다.

“잭슨 시무스가 바람을 피운 건 아쉽게도 내가 아니야. 누군지 알고 싶다면 두 번째 노래가 끝나고 연회장 밖 오른쪽 복도 끝으로 와.”

“너…….”

엘리아나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시무스 부인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너라뇨, 시무스 남작 부인. 저는 엘리아나 로즈. 헌터 남작 부인이랍니다. 카르만, 제가 잘 타일렀으니 이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실 거죠?”

엘리아나가 몸을 돌려 묻자, 카르만은 한숨을 짧게 내뱉고선 말을 이었다.

“그대 뜻대로 하겠으니 이리로 오시오. 위험하니까.”

“네.”

엘리아나는 웃으며 카르만에게 다가가선 팔짱을 꼈다. 카르만은 그런 그녀를 데리고 샤르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세 사람 사이엔 곧 깨질 듯 아슬아슬한 공기가 흘렀으나, 엘리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샤르헨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깜찍한 짓을 했더구나, 우리 딸.”

“소름 끼치니까 손 떼요.”

샤르헨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로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면서 말했다.

“귀여워라.”

“…….”

“다시 그런 짓을 하면, 그땐 내가 너를 그 마차처럼 만들어 버릴 거야.”

샤르헨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박살을 내 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의 팔을 붙잡고선 말했다.

“엘리아나. 샤르헨을 겁박하지 마시오.”

“겁박이라뇨. 그 마차가 뭔지 모른다면 샤르헨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거예요. 그치? 우리 아가?”

“…….”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 사람이 뭔가 정다운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은 위태로운 밧줄 위에서 줄타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부인이 누구한테 욕을 먹었다고요?!”

그때 헝클어진 옷차림의 잭슨 시무스가 연회장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나타났다. 엘리아나는 낮게 말했다.

“아무도 시선을 주지 말아요. 우리가 아니어도 한마디 쏘아붙여 줄 사람은 많으니까.”

엘리아나의 말에 카르만과 샤르헨은 처음으로 군말 없이 따랐다. 시끄러운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무스 가문은 이 연회를 망칠 생각으로 참석한 것인가? 상대편 가문이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는데도 또다시 시끄럽게 하는군. 이건 연회 주최자인 나 잉그 오델리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엘리아나의 예상대로였다. 파티의 주최자인 오델리 백작이 큰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제야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서 시무스 가문 내외를 보았다. 그러고선 카르만을 잡아 흔들면서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괜히 저희가 죄송스럽잖아요.”

“새엄마, 괜찮아요. 저흰 할 도리를 다했잖아요.”

샤르헨이 울먹이며 나와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럴 때는 죽이 잘 맞았다. 비록 엘리아나의 팔을 붙잡은 그녀의 악력이 너무 강해서 악 소리가 날 정도였지만 말이다. 엘리아나는 샤르헨을 으스러뜨릴 듯이 안아 주면서 카르만의 뒤로 숨었다.

잭슨 시무스는 오델리 백작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면서 한참이나 사과해야 했다. 엘리아나는 샤르헨을 품에 안고선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거 놔. 마녀야.”

샤르헨이 조그맣게 속삭이자, 엘리아나는 그녀를 보면서 웃었다.

“미안한데, 다음 곡이 시작될 때까진 이렇게 있어 줘야겠어.”

“다음 곡이 시작되면 카르만을 꼬드겨서 춤을 추러 나갈 테지!”

“정확해. 나도 추기 싫어 죽겠지만, 한 번만 빌려 쓰자.”

“…비, 빌려 써?”

“그럼. 내 것도 아닌데.”

엘리아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두 번째 곡의 전주가 시작되자, 카르만은 엘리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엘리아나는 샤르헨을 놔 주고선 카르만의 손을 잡았다.

타이밍이 좋았다. 시무스 부인이 한바탕 깽판을 치고 난 후여서 그들에겐 더욱 이목이 집중될 터다. 불화설이 꽤 오래 돌았던 두 사람에게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엘리아나가 카르만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실수로 발을 밟아도 이해해요. 난 춤을 잘 못 추니까.”

“당신은 고의로 밟고 실수라고 할 것 같소.”

“이제 날 좀 아는군요.”

엘리아나가 웃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를 따라 헛웃음을 지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 웃는 게 참 멋있군요.”

“…….”

“내내 찌푸리고 있어서 이제 알았네요.”

“엘리아나.”

카르만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라려는 찰나, 두 번째 무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엘리아나가 웃으며 먼저 발을 움직였다. 카르만은 졌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선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서 몸을 움직였다.

남작 부부의 춤사위에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다. 그 시선엔 율리시스 밀, 질리언 허트, 제데이아 테네브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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