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121)

33화

“테네브 공작 부인의 첫째 아드님은 조금 무례하군요. 인사보다 날을 세우는 게 먼저라니.”

“…….”

“당신이 제데이아 테네브인 걸 어떻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알았냐고요? 당신의 억양이 고압적이고, 관료적이었거든요. 그런 말투는 재무부 사람들이 주로 쓴다더군요. 말꼬리가 뚝 떨어지는, 재수 없는 말투죠.”

“…정말 이상한 여자로군요.”

“이제 아셨다니, 조금 둔하네요. 제데이아.”

“내 이름을 함부로…….”

엘리아나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돌려서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제데이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엘리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 로즈에요. 카르만 헌터 남작의 ‘그’ 네 번째 부인이죠.”

제데이아는 자존심이 잔뜩 상한 표정이었다. 그는 안경을 한 번 올리고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숙한 나의 어머니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첫 곡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엘리아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선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아버지를 쏙 빼닮았군요.”

“뭐라고?!”

“정숙한… 푸흐흐. 재밌었어요, 제데이아.”

그녀는 대화를 강제로 마치고선 저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율리시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시스는 자신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끄덕인 그녀를 보며 웃으며 다가왔다.

“레이디, 저는 아직 춤을 신청하지 않았는데요?!”

“몰랐어요?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건데.”

율리시스가 당했다는 듯이 무릎을 살짝 굽히고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엘리아나는 그 손을 잡으면서 시선을 제데이아에게 두었다.

“아버지를 흉내 내지 마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이봐요. 엘…….”

제데이아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율리시스는 그녀를 연회장의 가운데로 이끌었다. 제데이아의 입은 닫혔고, 엘리아나는 율리시스의 센스에 미소를 지었다.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하죠. 이런 걸?”

“생각보다 더 꽉 막힌 타입이네요. 제데이아 테네브.”

“저런 남자는 좀 귀여운 면이 있죠.”

“예를 들면 카르만 헌터 같은?”

율리시스의 말에 엘리아나의 웃음이 흩어졌다.

“올바르지 못한 예네요.”

“어째서?”

“딱히 뚫고 싶지 않으니까.”

율리시스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노래에 맞춰 인사를 했다. 무곡의 시작과 함께 남녀는 인사를 나누고 박자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우아하게 서로에게 몸을 기대어서 추는 춤이었다.

엘리아나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아름답게 움직였다. 마치 하나의 물결이나 구름처럼, 화려한 의상은 그녀를 더욱더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만일 당신이 다르게 대답했더라면.”

“했더라면?”

“난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엘리아나는 음악에 맞춰 율리시스와 잠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며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엘리아나는 율리시스만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왕자님.”

율리시스는 달콤한 밀어처럼 속삭여지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콘테르국에서 온 노튼 공작과 헌터 남작 부인이 마치 서로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즐거워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외모가 출중한지라, 춤을 추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카르만의 눈 역시 자꾸만 두 사람을 좇았다. 질리언을 가장 경계했었는데, 경호병인 조셰프부터 시작해서 새로 나타난 노튼 공작에, 제데이아까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아얏!”

춤에는 노련한 카르만이 샤르헨의 발을 밟을 정도였다. 카르만은 곧바로 사과하며 발을 뒤로 물렀지만, 샤르헨의 눈은 세모나게 변했다.

“이 순간만이라도 나한테 집중할 수 없는 거예요, 카르만?”

“그게 무슨 소리야.”

“요즘 당신은 이상해요. 자꾸 엘리아나를 보고 있다고요.”

“문제를 일으킬까 봐 걱정하는 거야.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니까.”

“그럼 나도 문제를 일으킬래요.”

“샤르헨.”

“그러면 당신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춤을 추는 동안, 샤르헨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심해졌다. 카르만은 그녀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듯이 토닥이면서 말을 이었다.

“어리광은 이제 그만.”

“……!!”

“난 진짜 네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알잖아.”

카르만의 그 말에 샤르헨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만 같았다. 엘리아나가 내뱉을 법한 말을 카르만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만은 얼어붙은 샤르헨을 부드럽게 이끌면서 말을 이었다.

“남작 부인이 되려면 이렇게 어리광쟁이여선 안 돼.”

“날 그 자리에 올릴 생각이 있긴 하고요?”

“네가 그 자리에 오를 생각이 없어 보이긴 하지.”

“카르만!”

“소리를 낮춰.”

두 사람은 한껏 붙어 있었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 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엘리아나가 웃으며 다른 남자와 춤을 추기 때문이 아니냐면서 수군거렸다.

샤르헨은 그런 수군거림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분명 엘리아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이목은 샤르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값비싼 장신구와 아름다운 외모, 몇 번이고 찢어서 다시 마련한 드레스 등. 모두 부러워하는 시선과 어여뻐하는 말투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엘리아나가 등장한 이후로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다. 오가는 말이 곱진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서는 흥미가 읽혔다. 그녀의 드레스, 머리 장식, 그녀가 하는 말이나 그녀가 어울리는 사람들까지 모든 게 궁금한 듯 보였다.

더군다나 어울리는 사람도 족족 잘난 사람들뿐이었다. 질리언 허트, 제데이아 테네브, 올리버 노튼. 전부 등장하자마자 영애들이 관심을 가졌던 남자들이었다.

‘분해. 분해서 미칠 것 같아.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분명 마차는 빼돌렸는데!’

샤르헨은 입술을 꽉 물었다. 어느새 카르만의 시선은 또다시 엘리아나를 향해 있었다.

***

첫 번째 춤이 끝나자, 질리언은 테네브 공작 부인을 자리까지 에스코트했다. 부인은 가볍게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선 후련하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얼마 만에 춰 보는 춤인지 모르겠군요. 완전히 엉망이었어요.”

“전 좋았습니다. 부인의 웃음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는 영광도 얻었고요.”

“질리언이 아니었다면 넘어지고 말았을 거예요. 질리언, 무례가 아니라면 우리 딸에게도 춤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요? 이 아이는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춤을 잘 모른답니다.”

에이린이 큰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질리언을 보았다. 질리언은 상황이 엘리아나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용케 감정을 숨기면서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 연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죠.”

질리언이 예를 갖춰서 몸을 낮췄다. ‘가장 아름다운 영애’라는 말에 에이린은 자기 뺨을 만졌다가 놓았다. 괜히 뺨이 뜨거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데이아는 두 사람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지만, 입을 뻥긋하지도 못했다. 엘리아나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제데이아는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누구보다 그를 닮았다. 자신도 알고 있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만난 여자에게 간파당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옷차림이 요란하고, 웃음소리가 크고, 화장기가 짙은 여자였다. 자신이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건만, 제데이아의 시선은 자꾸만 그녀를 향했다.

엘리아나는 춤을 춘 후에 헬렌과 레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제스처와 유머에 얼어 있던 두 남녀는 조금씩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파티의 주최자인 오델리 백작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기까지 했다.

‘대체 뭐 하는 여자일까. 원하는 게 무엇이지? 남편과는 사이가 그렇게도 안 좋으면서 이 파티를 휩쓸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제데이아는 엘리아나의 꿍꿍이가 알고 싶었다. 그녀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제데이아는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잡았다. 그녀에게 또다시 다가갔다간 이상한 소문에 휩싸일 게 뻔했다.

“아무래도 엘리아나가 마음에 드나 보구나. 제데이아.”

“당치도 않습니다, 어머니.”

제데이아는 테네브 부인의 말에 발끈하며 대답했다. 테네브 부인은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이야. 그리고 너무나 똑똑한 아이지.”

“그저 정숙하지 못한 여성일 뿐입니다.”

“그것마저 계산한 것이라면 어떨 것 같니?”

테네브 부인이 우아하게 말하자, 제데이아는 얼어붙었다. 정숙하지 못한 행동거지를 계산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테네브 부인은 자신이 아끼는 헬렌을 파티에 데리고 나온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몇십 년 만에 춤을 추게 했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인 질리언 허트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나선 헬렌이 오델리 백작의 막내아들과 이어지도록 다리를 놓아 주고 있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너무나 대단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테네브 부인은 자기 친구와 꼭 닮은 헬렌이 레이 오델리와 수줍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따라 눈가가 뜨거워지는 일이 많았다. 그녀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엘리아나는 테네브 공작 부인을 힐끗 보고선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엘리아나의 앞을 막았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소.”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카르만 헌터 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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