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121)

32화

엘리아나의 등장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엘리아나는 연회장에 있는 시종의 도움을 받으며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왔다. 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선 큰 소리로 떠들었다. 마치 엘리아나가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어머, 저 헐벗은 드레스 좀 봐요.”

“다 드러난 가슴하며, 꽉 죈 허리라니? 그냥 속옷을 입고 나오는 게 낫겠어요.”

“누가 아니래요. 남사스럽게 부풀린 엉덩이까지, 정말 천박하지 않아요?”

동시에 남성들도 쑥덕거렸다. 못생긴 계모라고 소문이 났던 엘리아나의 외모가 예상과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그 모든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 끝까지 당당한 걸음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두 남자가 다가가서 엘리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기 직전이었다.

두 남자 중 한 명은 질리언 허트, 한 명은 올리버 노튼이었다. 곧 자작이 될 해군 교관과 콘테르국에서 온 명문 가문의 공작이 에스코트를 하는 여자라니. 사람들의 술렁거림은 조금 더 심해졌다.

엘리아나는 두 남자에게 양손을 맡기고선 그대로 사뿐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고선 제일 먼저 헬렌 허트에게 가서 가볍게 포옹했다.

헬렌은 오랜만에 돌아온 사교계에서 약간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의 등장과 함께 표정이 조금 자연스럽게 풀렸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헬렌과 엘리아나가 함께 옷을 맞췄음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아나가 턱짓하자, 질리언은 두 사람을 테네브 공작 부인이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테네브 공작 부인은 가장 안쪽에 앉아서 늘 파티를 지켜보는 역할을 맡았던 터였다.

그들이 걷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갈라졌다. 모두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감히 가까이 가진 못했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나타난 헬렌과 엘리아나의 모습에 테네브 부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공작 부인께 처음 인사드립니다. 엘리아나 로즈입니다.”

“공작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허트 가문의 헬렌이에요.”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테네브 부인의 눈에서 살짝 물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옛날을 떠올렸다가 금세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이 깜찍한 짓은 누구의 생각이죠?”

“제 생각입니다. 제 첫 사교계 데뷔에 어울릴 만한 의상을 찾다가 눈을 뗄 수 없는 드레스를 발견해서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구닥다리로 불릴 법한 옷인데도?”

“보석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돌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부인이 선택하셨던 현명한 아름다움도 제게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떠들어 대든 간에요.”

엘리아나의 정확한 발음은 그녀를 욕하던 부인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그녀들은 과묵한 테네브 부인이 저렇게 말을 많이 했다는 것에 놀랐다. 게다가 엘리아나의 복장이 테네브 부인과 연관이 있음을 알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테네브 공작 부인은 엘리아나와 달리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심지어 오늘은 그녀의 아들인 제데이아와 딸인 에이린이 함께 온 날이었다.

“엘리아나, 무슨 꿍꿍이로 이 늙은이를 가장 먼저 찾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솔직히 기쁘군요. 최근 10년간 내가 참석했던 모든 파티에서 만난 어떤 영애보다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부인.”

엘리아나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제데이아가 엘리아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료한 표정에 안경을 쓴 모습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분명히 엘리아나를 담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에게 오래 시선을 두지 않고 그 옆으로 향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에이린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입은 옷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에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가 시작되었다. 곧 있으면 짝을 맞춰서 첫 춤을 추는 시간이 다가올 것이었다.

“엘리아나, 그대가 누구와 첫 춤을 출지 궁금하군요. 헌터 남작은 아닐 것 같고.”

“조금 곤란하게도 그렇게 사랑받는 아내는 되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죠.”

테네브 공작 부인이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평생 애정 표현에 서툴렀던 테네브 공작과 함께 지냈으니 말이다. 하물며 엘리아나는 헌터 남작의 네 번째 부인으로, 집안에서 박대받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데이아는 안 됩니다, 엘리아나.”

테네브 공작 부인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서 말했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맑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조금의 당황스러움도 없었다.

“저런, 저는 이미 결혼한 몸. 이제 혼기가 꽉 찬 멋진 청년의 첫 춤을 감히 가져갈 순 없죠.”

“그건 소문과 조금 다르군요. 엘리아나.”

“저는 다만 보고 싶어요.”

“무엇이?”

“부인의 첫 춤이요.”

테네브 공작 부인은 소리를 내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 순간 질리언 허트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의 첫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테네브 공작 부인.”

부인의 웃음이 멈췄다.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엘리아나와 질리언을 번갈아 보았다.

***

연회 며칠 전, 광장.

“그 테네브 공작 부인께 첫 춤을 신청하라는 말이오?”

엘리아나의 말에 질리언은 깜짝 놀라 소곤거렸다. 누가 들으면 안 되는 비밀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 그 테네브 공작 부인이요.”

“부인은 춤을 추지 않소. 항상 의자에 앉아서 젊은이들이 노는 거나 구경하시다가 적당한 때에 가 버리신단 말이오. 파티를 자주 오시긴 하지만 그렇게 즐기시는 타입이 아니오.”

“그렇게 즐기지 않으신다라.”

“엘리아나. 말꼬리를 잡을 생각은 말아요.”

질리언은 엘리아나의 말솜씨에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히 말했다. 옆에 있던 헬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엘리아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이야기를 이어 갔다.

“테네브 공작은 매우 보수적인 분이었어요. 해서 결혼 이후에 부인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죠. 아마 부인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겠지만, 젊고 밝았던 부인의 날개를 꺾은 것이나 다름이 없죠.”

“그건 젊었을 때 얘기잖소. 지금 부인은 중년이오.”

질리언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중년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요? 가슴은 여전히 똑같은 것에 설레고, 똑같은 것에 아름답다고 느껴요. 오히려 경험으로 인해 더 강렬한 끌림을 느끼죠.”

“내가 부인께 첫 춤을 추자고 하면 뭐가 달라진단 말이오?”

“당신의 두 번째 춤 상대가 달라지죠.”

“그게 누구요?”

“에이린 테네브.”

질리언은 에이린이라는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 자신에게는 너무 과한 여인이었다. 좋은 집안과 어린 나이, 아름다운 얼굴과 발랄한 성격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지만, 질리언과는 접점이 없었다.

“말도 안 되오. 그녀와 나는 접점이 전혀…….”

“첫 춤의 상대가 접점이 되겠죠.”

엘리아나의 말에 질리언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과 에이린의 접점을 만들고자 테네브 공작 부인을 이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걸 공작 부인이 모를 것 같소?”

질리언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엘리아나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때론 알면서도 당해 주는 일이 있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소.”

“내 말대로 해 봐요. 밑져야 본전일 테니까.”

“그러다가 나와 춤을 추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그땐 제가 먼저 손을 내밀죠. 질리언 허트 예비 자작님.”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엘리아나의 말에 질리언은 ‘하’ 하고선 몸을 의자에 깊이 기댔다. 헬렌은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작게 손뼉을 쳤다.

“헬렌, 너는 누구 편인 거야?”

질리언의 질책에 헬렌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헬렌이 웃자, 질리언은 별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엘리아나를 바라보았다.

***

테네브 부인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에 당황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말까지 더듬었다.

“나, 나는 춤을 안 춘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스텝도 모두 꼬일 거고, 엉망이……. 망측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그러나 제안과 함께 붉어진 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질리언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엉망인 춤이라도, 이곳에서 가장 우아한 여인과 출 수 있다면 저에게 그보다 큰 영광이 있을까요?”

질리언의 말에 엘리아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못 하겠다고 내빼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말이 여자를 설레게 하기 딱 좋았다.

“경이 간청하니, 정말 어쩔 수 없군요.”

테네브 공작 부인이 숨을 길게 내쉬고선 질리언의 손을 잡았다. 엘리아나는 활짝 웃으면서 헬렌을 바라보았다. 헬렌 역시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면서 엘리아나를 마주 보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헬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헤, 헬렌 양. 저, 저와 첫 춤을 춰. 춰. 춰 주신…….”

그는 헬렌이 이혼한 후에 그녀에게 가장 먼저 혼담을 넣었던 레이라는 남자였다. 헬렌이 볼을 붉히고선 엘리아나를 보자, 엘리아나가 속삭였다.

“내가 그랬죠? 헬렌은 아름답다고요. 어서 그의 손을 잡아 줘요. 오늘만을 기다려 왔을 거예요.”

헬렌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선 레이의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올렸다. 그러자 레이 오델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선 손을 덜덜 떨었다.

“정, 정말 저랑 춤을 추, 추시는 겁니까?”

“네. 좋아요.”

헬렌의 작은 목소리에 레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엘리아나는 계획 외의 수확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가 다름 아닌 연회 주최자인 오델리 백작의 막내아들인 레이 오델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미소 짓는 순간 누군가 엘리아나의 뒤에서 속삭였다.

“당신, 뭐 하는 사람입니까?”

엘리아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