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121)

29화

질리언의 질문에 엘리아나는 웃었다. 그러고선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이어 갔다.

“그래야 그 드레스가 의미가 생기거든요.”

“의미요?”

엘리아나는 자신이 오려 온 책의 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베니와 드레스를 만들 때 함께 보았던 그림 속 두 여인의 모습이었다.

“테네브 공작 부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바로 돌아가신 허트 부인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저희 이모님이요? 하지만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는걸요.”

헬렌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질리언도 전혀 몰랐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모님은 결혼과 동시에 콘테르국으로 이민을 갔고, 몸이 아파서 콘티노국에 자주 오지 못하셨소.”

“네. 그렇죠. 하지만 두 사람은 사교계 데뷔 때 비슷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맞출 정도로 친했답니다. 서로 결혼한 이후로 소원해졌지만요.”

“정말 몰랐어요.”

헬렌은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두 사람의 어머니인 허트 부인도 일찍이 생을 마감한지라,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줄 사람이 없었기도 했다. 질리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물었다.

“대체 이런 정보는 어디서 다 알게 된 거요? 엘리아나 당신 정말.”

“마녀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책을 뒤져 보다가 찾았어요. 왕립 도서관과 헌터 남작가엔 이런 정보가 많더군요. 아무도 안 읽는 것 같지만.”

엘리아나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서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질리언은 그런 엘리아나의 표정에 웃음을 터뜨렸다.

헬렌은 그림을 유심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한 여인을 가리켰다.

“저희 어머니와 정말 닮았어요. 이모님을 한 번도 실제로 뵌 적이 없는데, 정말 비슷했었나 봐요.”

“헬렌의 얼굴과도 비슷해요.”

“저요? 저는 이렇게 아름답지 못한걸요.”

헬렌이 자기 자신을 낮추려고 하자, 엘리아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헬렌. 당신은 너무 사랑스러워요.”

“엘리아나.”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상냥하고 자상하죠. 낯선 나를 따뜻하게 친구로 맞아 주었잖아요. 자수나 식물처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것들에도 재능이 있고요.”

“…….”

헬렌의 볼이 붉어졌다. 그녀는 그런 노골적인 칭찬을 많이 들어 보지 못한 듯했다. 엘리아나는 말을 더했다.

“내가 카르만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런 헬렌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남편을 바보라고 생각하는군.”

“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카르만이 나한테 그러더군요. 아내가 아니라고요.”

“그런 머저리 같은 말을.”

“헬렌에게도 했었을 거예요. 그렇죠?”

헬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에게 시선을 옮겨서 말을 이었다.

“테네브 공작 부인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그녀와 인연이 있는 헬렌과 질리언을 보살펴 주고 싶을 거예요. 단지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할 뿐이죠.”

“엘리아나, 당신은 무얼 하려는 것이오?”

“난 그 다리가 되려고 해요. 테네브 공작 부인과 허트 가문을 다시 이어 주는 다리요.”

“테네브 부인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거로군.”

“그렇담 나의 데뷔는 엉망이 되지 않겠죠. 그녀는 사교계에서 가장 조용하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거든요.”

질리언은 엘리아나의 계획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한 가지 중요한 부탁이 있어요, 질리언.”

“무엇이오?”

“그대의 첫 춤을 주세요.”

“나의 첫 춤?”

사교 파티에서는 노래가 흐르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춤을 추는 사람이 매우 중요했다. 질리언의 얼굴이 붉어졌다. 엘리아나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말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질리언은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녀에게 끌림을 느끼고 있어도 그녀는 헌터 남작의 부인이었다. 카르만에게 적대적인 자신이 그렇게 할 경우, 자칫하면 치졸해 보일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춤은 안 되겠소?”

“안 돼요.”

“하지만 첫 번째 춤은… 그렇게 비열한 짓은 할 수가 없소.”

“아.”

엘리아나는 자신이 가장 중요한 단어를 빼먹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채고선 빙긋 웃었다.

“질리언.”

이어진 엘리아나의 말에 질리언은 놀랐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은 엘리아나에게 최고의 지략가라면서 엄지를 들어 올릴 정도였다.

세 사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힐끗힐끗 살폈다.

연일 화제의 중심인 문제의 남작 부인에 대한 소문은 그날의 만남 이후로 더욱더 부풀려져 갔다. 누구도 이제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로즈 가문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허트 가문과의 친분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엘리아나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다. 어떤 이는 실제로 보니 심각한 추녀였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엄청난 미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단 한 부분은 정정되지 않았다. 악독한 계모인 데다가 원하는 남자는 모두 손에 넣는 여인이라는 것. 남자들로 하렘을 만들고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마녀 같은 계모라는 이야기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

율리시스는 뒤늦게 도착한 자금을 받았다. 형제들이 모르게 움직이다 보니 모든 게 조금 느렸다.

“파티 전에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군. 하마터면 노튼 공작이 아니라 웬 거렁뱅이로 참석할 뻔했어.”

“파티에 들어가시지도 못하고 쫓겨나셨을지도 모릅니다.”

“설마 이 아름다운 외모의 사나이를 내칠까?”

“잘생긴 거렁뱅이보다 못생긴 공작들이 낫죠.”

“멜번은 너무 냉정해.”

율리시스는 상처받았다는 듯이 침대에 풀썩 앉았다. 얼마 전까지는 허름한 숙소를 썼기에 침대도 딱딱했다. 하지만 지금은 푹신푹신했다. 친구인 노튼 공작의 별장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영광인걸? 하지만 따라 할 거면 제대로 따라 하라고.

자신의 가문을 빌려 쓴다는 말에 노튼 공작은 화를 내기는커녕 별장을 통째로 내주었다. 게다가 자신의 가문이 전용으로 쓰는 의복점에서 옷을 열 벌 넘게 보내 주었다.

“올리버 공작이니까 올리브색으로 입을까?”

“농담이신 거겠죠. 조금 더 진지하게 골라 주세요.”

“올리버 공작님이니까 올리브색인 거, 좋은데요? 재밌잖아, 멜번!”

“재미없어. 투리스.”

멜번이 단호하게 말하자, 투리스는 너무 냉정하다며 투덜거렸다. 율리시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옷을 살펴보다가 검붉은 벨벳 소재의 옷을 들어 올렸다. 몸을 탄탄하게 감싸 주면서 적당히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색깔도 마음에 들었다.

“독을 가득 머금은 장미 같지 않아?”

“그럼 시든 거 아닌가요?”

“아니야. 그 반대지.”

“…….”

“절대 시들지 않는 장미인 거야.”

“오, 그건 정말 좋은 장미 아닙니까? 꽃이 시들지 않을 수 있다니 엄청납니다.”

투리스는 커다란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멜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선 말을 이었다.

“왕자님, 그거 중증의 상사병입니다.”

“상사병?”

“엘리아나 로즈를 생각하신 거 아닙니까?”

“맞아.”

“하긴 요즘 왕자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절반은 장미 얘기이고, 절반은 엘리아나 로즈의 이야기이니까요.”

둔한 투리스가 눈치챌 정도였다면 말을 다 한 셈이었다. 멜번은 심각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그는 카르만 헌터 남작의 부인입니다. 유부녀라고요. 게다가 계모에 악독하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사실이 어찌 됐든 귀족들은 소문만으로도 존폐가 결정되곤 합니다. 조심하셔야 할 대상입니다.”

“그럴까?”

율리시스는 옷을 내려놓고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노튼 공작의 별장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었다. 율리시스는 멀리 보이는 헌터 남작의 저택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소문이라면 나도 만만치 않지. 바람둥이, 놈팡이, 노름꾼, 방랑자, 바보, 술꾼……. 또 뭐가 있더라?”

“왕자님.”

“그중에 사실인 게 하나라도 있던가?”

“하지만 그건 왕자님께서 일부러 만드신 소문들 아닙니까.”

“엘리아나 로즈도 그렇다면?”

율리시스는 장난스러웠던 표정을 거두면서 말했다.

“멜번.”

“네, 왕자님.”

“나는 그대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좋아해. 비열한 것, 비겁한 것, 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가차 없는 점도 사랑하지.”

“…….”

“그러나 그것이 종종 그대의 한계를 정하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율리시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몸을 돌려서 창밖을 보았다. 남작의 저택은 모든 곳이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곳에 그녀가 있다.

엘리아나 로즈. 헌터 남작 부인이 아닌 로즈 가문을 일으킬 혁명적인 여자가. 율리시스는 자신이 왕이 되는 데 필요한 인물 중 가장 첫 번째에 그녀의 이름을 올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아주 조금의 사심도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절반이 넘는 마음은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녀는 자신이 만나 본 어떤 인물보다 똑똑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무엇일까? 어디까지가 그녀의 목표일까?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갖게 할 수 있을까?

율리시스 안의 질문들이 개수를 늘려 갈 때, 투리스가 입을 열었다.

“왕자님, 엘리아나 로즈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저는 멜번 같은 기준은 없지만 잘 모르겠는데요.”

투리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율리시스는 몸을 뱅글뱅글 돌려 투리스를 보았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그 대답은.”

“대답은…….”

율리시스가 뜸을 들이자 투리스는 작은 눈을 번쩍거렸다. 율리시스가 종종 이렇게 짓궂게 굴 때면 투리스는 항상 당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멜번은 초롱초롱한 투리스를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율리시스는 투리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더니 아주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파티에서 직접 확인하도록.”

“네?! 왕자님! 알려 주실 것처럼 하시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있지. 멜번, 제리크 헌터에 관한 소식은 도착했나?”

“네. 도착했습니다.”

멜번은 협탁 위에 두었던 서신 하나를 율리시스에게 전했다. 율리시스는 서신을 풀어 보고선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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