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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9/121)

28화

“내가 만일 허락한다면.”

“…….”

“그대는 이 남작가를 직접 고쳐 나갈 마음이 있소? 나의 아내가 아닌 남작 부인으로서 말이오.”

“사랑은 샤르헨과 하고, 나는 가문 재건에 이용하겠다는 뜻인가요?”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겠소.”

“좋아요.”

값을 치르겠다는 말에 엘리아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실 개선안을 쓴 문서보다 직접 바꿔 놓은 모습을 제리크 헌터에게 보여 주는 편이 더 나았다. 자기 능력을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그 힘으로 로즈 가문을 더 튼튼하게 만든다.

어차피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남작 부인의 자리였다. 이곳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취해야 했다.

“얼마를 줄 수 있죠?”

“얼마면 되겠소?”

“조셰프를 저의 전임 경호병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현재 임금의 두 배를 주세요. 베니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제겐 집사 페페가 받고 있던 월급을 주세요.”

“페페를 해고할 순 없소. 그는 오랫동안 이곳을 맡아 왔소.”

카르만은 한 수 졌지만, 이대로 모든 걸 내줄 수는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지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고 월급을 전부 줄 수도 없죠. 뒤로 빼돌린 돈이 없지 않을 테니 한 몇 달은 괜찮잖아요. 안 그래요, 집사?”

“부인.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절대 남작가의 재산에 손을 대, 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엘리아나는 페페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카르만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정정할게요. 난 내가 찾아낸 페페의 비자금 규모만큼 돈을 받겠어요 남작께서 이해할 만한 증거와 함께 제시하죠. 그럼 제 임금을 주는 건 남작이 아니라 페페가 되겠네요. 그렇죠?”

“그가 비리를 저지른 적이 없다면 당신은 받아 가는 돈이 없을 것이오.”

엘리아나는 웃으면서 카르만을 보았다.

“그거 알아요?”

“무엇을 말이오?”

“당신이 생각보다 순진한 도련님에 멈춰 있다는 사실을요.”

“……!”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죠. 결혼으로 맺어진 동맹자인 아내가 전체 집안을 통솔하는 행정권을 갖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에요.”

“…….”

“나는 네 번째 부인이고, 이 집안은 안주인이 부재한 채로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됐어요. 당신과 샤르헨이 소꿉장난 같은 사랑놀이를 할 동안, 모든 전권은 집사에게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당신 앞에서 립서비스를 하면서 한 푼, 두 푼 챙겨 가던 돈은 이제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을지도 모르죠.”

페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작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엘리아나가 그 모든 것을 이리도 또렷하게 파악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반박해야 한다. 지금 반박하지 않으면 인정하는 꼴이 될 거야!’

페페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지만, 정작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목구멍도 열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엘리아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일종의 선언 같은 말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 집안을 박차고 나갈 때는 로즈 가문을 다시 일으킬 재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안 그런가요, 집사?”

엘리아나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는 페페를 한 번 힐끗 보고선 웃으면서 돌아섰다. 자신이 원했던 바는 모두 이룬 셈이었다. 조셰프를 위병에서 경호병으로 진급시켰고, 베니의 봉급을 올렸다. 그리고 돈을 벌 방법도 찾았다.

집사 페페가 빼돌린 돈은 한두 푼이 아닐 것이었다. 그 돈을 모두 회수하기만 해도, 로즈 가문의 1년 생활비를 족히 채울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썩어 빠진 이 남작가를 직접 고쳐 볼 기회까지 얻었으니, 엘리아나에게는 완전한 승리나 다름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의기양양하게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문밖에서 옥신각신하고 있는 베니와 샤르헨의 모습이 보였다.

“비켜. 이 저택에서 나를 막을 수 있는 하녀는 없어.”

“남작님의 명이십니다. 남작 부인께서 나오시기 전까지는 샤르헨 님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남작님의 명은 내가 바꿀 수 있어. 나는, 비키라고 말했어.”

샤르헨은 화를 억누르면서 말하고 있었다. 곧장 베니를 밀어낼 것처럼 말이다.

“내 시녀장에게 무슨 볼일이 있나요? 샤르헨.”

“남작님께 확인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제 길을 막더군요.”

“남작님의 명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샤르헨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의 명령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의미가 없다고 말했지만, 부인의 시녀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군요.”

“내가 그렇게 하라고 명했으니까.”

“부인.”

“…….”

“부인은 남작이 아니잖아요.”

샤르헨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 끝은 경련하듯이 떨렸다. 그녀는 지금 동요하고 있었다.

“내가 백수정 목걸이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확인하러 온 거지? 그렇다면 안 받았다는 진실을 알려 주지. 내 것이 아니더라고.”

“…부인의 것이 아니면 그럼 누구의 것인가요? 저는 이미 장신구를 모두 맞췄는걸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엘리아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 목걸이는 엘리아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엘리아나는 괜한 입씨름을 하던 베니에게 괜찮냐고 물은 후에 발걸음을 뗐다.

“부인.”

“말해요.”

“저와 남작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지 마세요. 비겁하고 의미 없는 행동입니다. 우린, 그렇게 갈라질 사이가 아니에요.”

“난 그에게 관심이 없다고 계속 말해 왔는데, 샤르헨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군. 베니, 가자. 계속 있어 봤자 입만 아파.”

“네, 부인.”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엘리아나의 태도에 샤르헨은 갑자기 꺄아악!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맞거나 봉변을 당했을 때나 날 법한 소리였다.

문이 급히 열리고 집사 페페와 카르만이 나올 때까지 그녀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바닥에서 뒹굴었다. 마치 장난감을 얻지 못한 일곱 살 귀족 아이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바깥의 소란에 카르만과 페페가 서둘러 문밖으로 나왔다. 샤르헨은 그제야 몸부림을 멈추고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남작님. 부인께서 저를 때리려고 하셨어요. 남작님 앞에서는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일지 몰라도, 제게는 무섭기만 한 계모예요……! 제발 이 모든 일을 막아 주세요, 제발요…….”

샤르헨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지나가던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분명 그녀의 눈물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었다.

“틀렸어.”

엘리아나는 차갑게 잘라 냈다. 저번에 썼던 얕은수가 이번에도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엘리아나는 샤르헨이 이제껏 어떻게 카르만의 사랑을 유지해 왔는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혀를 ‘쯧’ 하고 차고선 몸을 숙여 헝클어진 샤르헨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딸아, 난 네게 가장 친절한 거란다.”

“…….”

샤르헨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로 엘리아나를 보았다. 엘리아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르만에게 말했다.

“이런 걸 받아 줘 버릇하니까 집사가 딴 주머니를 차도 모르는 거예요. 이런 어리광은 일곱 살 때 끝냈어야죠. 샤르헨을 모두가 남작 부인으로 인정한다고요? 그렇다면 이 남작가의 모든 시종들은 해고되어도 될 정도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인 거예요.”

엘리아나는 카르만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한 게 아니라며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이미 이 행동의 진실을 카르만은 알고 있을 터였다.

뭐, 모른대도 어쩔 수 없었다.

엘리아나는 카르만에게서 더 얻고 싶은 게 없었다. 앞으로 페페의 주머니를 어떻게 하면 알차게 털 수 있을 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엘리아나가 차분히 걸음을 떼자, 베니가 속닥거리면서 물어 왔다.

“부인, 괜찮으세요?”

“물론이야. 좋은 소식이 많아. 얼른 방으로 돌아가자.”

엘리아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남작의 방 앞에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샤르헨과 그 앞에 서 있는 카르만, 집사인 페페와 르잔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네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엘리아나를 향할 뿐이었다.

***

엘리아나는 파티를 며칠 앞두고 헬렌을 만났다. 헬렌이 드레스에 대한 보답으로 아름다운 귀걸이를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광장의 안쪽에 있는 찻집에서 만났다. 귀족들이 주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고급 찻집이었다.

“어머나.”

엘리아나는 화려한 귀걸이를 보고선 깜짝 놀랐다. 그때 그 시절 테네브 부인이 찼던 그 귀걸이었다.

“엘리아나가 말해 준 게 생각나서, 나도 좀 찾아봤어요.”

“세상에나. 이 물건은 찾기가 힘들었을 텐데.”

“오라버니가 수출입업자들을 잘 알거든요. 그래서 도움을 받았어요.”

헬렌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질리언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마치 칭찬이 쑥스럽다는 듯이 말이다. 엘리아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귀걸이를 쓰다듬었다.

“질리언, 수완이 대단하군요. 목걸이 선물도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인사가 늦었어요. 고마워요.”

“거,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헬렌과 똑같은 걸 맞춘 거니까. 두 사람이 드레스를 비슷하게 맞춘다기에 선물한 것이오. 헬렌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참석하는 파티니까, 잘 부탁한다는 뇌물로.”

질리언은 쑥스럽다는 듯이 코를 문질렀다. 헬렌은 손뼉을 살짝 치고선 말을 이었다.

“내 목걸이는 노란색이에요. 오라버니가 직접 고른 것들이랍니다.”

“헬렌과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벌써 기대가 되는 걸요.”

“그런데 한 가지 상의할 게 있어요.”

“음?”

“엘리아나의 파티 입장 말이에요.”

입장은 큰 문제였다. 그녀는 본래 카르만의 손을 잡고 입장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르만은 샤르헨과 입장하겠다고 선언한 뒤였고, 이것은 동네방네 소문이 나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장부터 망신을 당할 엘리아나의 모습을 말이다. 헬렌과 질리언은 그것에 대해서 몹시 걱정하는 눈치였다.

“경호병과 함께 입장하려고 해요. 이미 그를 위한 의복도 만들어 뒀고요. 두 분과 함께 입장하면 허트 가문에 누를 끼칠 수도 있고, 헌터 가문에도 그리 좋지 않을 테죠.”

“그 말은 혼자 입장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 아닌가요? 오, 엘리아나.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헬렌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선 말했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헬렌, 질리언.”

“부탁이요?”

“내가 두 사람의 다음 차례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줘요.”

엘리아나는 매우 재미난 일을 말하는 사람처럼 개구진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다음 차례를?”

두 사람의 표정에서는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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