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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8/121)

27화

“들어오시죠, 부인.”

페페는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남작의 방문을 열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에게 바깥을 부탁했다. 페페가 밖에 세워 둔 게 다름 아닌 르잔이었기 때문이었다. 르잔 혼자서 샤르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베니, 부탁할게.”

“네, 부인. 걱정하지 마시고 필요하시면 언제든 절 불러 주세요.”

“응.”

엘리아나는 페페와 함께 남작의 방에 들어갔다. 카르만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서 엘리아나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그녀의 목걸이에서 멈췄다. 엘리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의 진정한 사랑인 샤르헨이 백수정은 싫다고 하던가요?”

“그건 헌터 남작 부인의 위신을 위한 것이었소.”

“언제부터 그렇게 제 위신을 따졌죠? 이 목걸이를 본 순간부터요?”

“정신 차리시오, 엘리아나. 외간 남자가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사교계에 첫 등장 할 셈이오? 그건 본인의 정숙함에도 상처를 입히는 행동이오.”

“누가 누구한테 정숙함을 논하죠?”

엘리아나가 큰소리를 냈다. 페페는 깜짝 놀라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러뜨렸다.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낸 고함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나와 샤르헨을 불온한 시선으로 보는 건 당신뿐이오.”

“그런 착각에 살고 싶은 거겠죠. 수양딸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게 정상인가요?”

“말했지만 샤르헨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당신은 비겁해요.”

“부, 부인. 말씀을 삼가세요! 남작님께 너무 무례합니다.”

“페페, 됐어.”

“집사는 이 대화에 낄 생각 마요. 당신 차례는 이다음이니까.”

엘리아나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페페는 한 걸음을 물러섰다.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이토록 화내는 이유를 좀처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엘리아나는 화를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질리언은 내 친구예요. 친구가 준 장신구를 하고 다니는 경우는 많죠. 내 정숙함에 상처가 난다고요? 그건 당신의 착각이겠죠. 내가 어느 침대에서 외간 남자와 난잡하게 뒹굴었단 소리라도 있나요?”

“엘리아나. 일부러 천박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거라면 그만두시오.”

“천박하게 듣고 싶으면 천박하게 들리겠죠. 나는 사실을 얘기한 것뿐이에요.”

“나는 그대를 보호하려고 했을 뿐이오.”

“보호?”

엘리아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한 번도 카르만에게 보호받은 적이 없었다. 페페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이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땀을 폭포수처럼 흘려 댔다. 엘리아나는 냉정함을 되찾고선 말을 이었다.

“조셰프는 나를 구해 줬어요. 며칠 전 광장에서 있었던 소란도 못 들었다고 하진 않겠죠? 그때 남작님은 내게 뭘 해 줬나요? 내 안위를 물었나요? 아니면 사건을 조사하게 했나요?”

“그대가 다른 사람을 때린 일이었소.”

“아뇨. 그때 조셰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맞았을 거예요. 당신은 진상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었으니 몰랐겠지만요.”

“그대가 다른 남성과 노닥거리기 위해서 한 행동까지 내가 감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정말 뻔뻔하군!”

카르만이 쾅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카르만이었으나, 지금은 누가 봐도 성이 난 얼굴이었다.

“내가 노닥거리는 걸 봤나요? 아니면 입이라도 맞추는 걸 봤나요?”

“엘리아나!”

“그는 콘테르국에서 온 올리버 공작이에요! 못 믿겠다면 이번 파티에서 당신에게 소개해 주죠. 나는 내 편이 될 것 같은 사람을 놓치지 않아요. 적어도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내게 힘을 줄 테니까요. 이게 내가 하는 보호에요. 당신이 오해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나를 옥죄려 한다면 다른 문제죠.”

“당신은 내 아내요!”

“내가 이 남작가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엘리아나의 칼날 같은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카르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는 여자는 엘리아나가 처음이었다. 엘리아나는 언성을 낮추면서 말을 이었다.

“이 남작가에서 내 편이 얼마나 있을 거로 생각하죠? 나는 내게 가장 안전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요. 조셰프를 나의 경호병으로 허락해 주세요.”

“허락할 수 없소. 그 위병과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내 눈으로 봤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건……!”

“또 뜬소문을 믿고 나를 오해하는군요. 당신은 애초에 나를 믿을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호하죠? 이 망해 가는 남작가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고요?”

“부, 부인! 망해 가는 남작가라뇨!”

카르만은 눈썹을 찌푸렸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가져온 문서를 카르만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나에게 이런 족쇄를 채우고 괴롭힐 시간에 이 집안이 어떻게 망해 가고 있는지나 다시 살펴보세요.”

“그대가 이 저택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는 것이오.”

카르만의 말에 엘리아나는 비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알 수 있죠. 당신의 눈과 귀는 집사와 샤르헨이 막았을지 모르겠지만요.”

“부, 부인! 당치도 않습니다.”

“정말 당치도 않은지 이 문서로 확인해요. 그동안 방만했던 당신의 행정 능력을 모조리 까발려 두었으니까.”

페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인지 엘리아나라면 없는 실수도 찾아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 몇 년간 편안하게 집사 생활을 해 왔던 것은 맞았다. 뒤로 숨긴 돈도 꽤 되었다. 그런 것을 모두 알아봤다면? 페페는 손수건이 축축해지도록 땀을 닦았다. 그러나 닦아도, 닦아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페페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왔소.”

“그가 해 온 게 최선이 아니라는 건 남작께서 더 잘 아시겠죠. 그러니까 저의 이 무례한 말들을 다 들어 주고 계신 게 아닌가요?”

“엘리아나 당신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소?”

“네. 있어요.”

엘리아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카르만은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이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디 한번 그 잘난 입으로 떠들어 보시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식료품비를 내달부터 3/4로 줄이세요. 목표는 지금의 1/2입니다. 사람 수에 비해서 너무 많은 식자재가 들어오고 있어요. 샤르헨도, 남작님도 입이 짧고 많이 먹지 않아요. 한데 그에 비해 식료품 창고는 매번 집사의 배처럼 빵빵하죠.”

“헙.”

페페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자신의 배를 꾹 누르면서 홀쭉한 척을 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필요 없는 하녀와 시종들은 다른 집안으로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고 내보내세요. 특히 샤르헨에게는 과할 정도로 많은 하녀가 있죠. 그들을 내보내고 남은 봉급으로 위병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세요. 이대로 왕국에서 출전 명령이 떨어진다면 제대로 검을 들 사람이 이 저택에 있을 것 같나요?”

“…….”

“그리고 사치품에 쓸 돈을 모아 대충 풀포기나 심겨 있는 정원을 다시 가꾸세요. 정원은 그 가문의 얼굴이에요. 정원만 잘 가꿔도 좋은 가문과 원활한 교류가 가능하단 걸 나는 허트 가문에 가서 직접 보았어요.”

엘리아나가 목구멍 밑으로 삼키고 있었던 문제였다. 저택은 안주인의 오랜 부재로 인해 부실해진 지 오래였다. 거만한 표정으로 떠들어 보라던 카르만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엘리아나는 그가 이런 문제에 정말 무감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저 집안이 좋아서 한 저택을 떠맡은 얼간이일 뿐이었다. 반반한 얼굴과 단조로운 성격 탓에 그것이 숨겨져 있었을 뿐.

엘리아나는 딱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양초, 천, 우유, 종이 같은 것들은 전부 이곳에서 만들 수 있는데 어째서 사고 있죠? 그런 것들을 전부 관리하기 싫기 때문이겠죠. 그렇죠, 집사?”

“…….”

페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작가에 있는 공방들은 거미줄이 쳐진 지 오래였다. 사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페페의 지침 때문이었지만, 실상은 귀찮기 때문이 맞았다. 그걸로 부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카르만은 그런 세세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로부터 그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받은 카르만의 표정은 사나워졌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페페에게로 향했다. 페페는 고개를 숙이고선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이 관리는 모두 집사인 페페와 남작께서 하셔야겠죠. 아니면 ‘진짜’ 남작 부인인 샤르헨이 하든지요. 그냥 내 눈에만 보이는 것만 해도 이 정도에요. 이 집이 왜 엉망진창이라고 하는지 아시겠어요? 이 저택을 사용했던 선대의 사람들은 분명 이러지 않았어요.”

“…….”

카르만은 말문이 막힌 듯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고선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 저택의 책임자는 제리크 헌터가 아니에요. 언제까지 그의 그림자에서 살 거죠? 제발 책 좀 읽고, 주변을 살펴요.”

“…….”

엘리아나의 시선은 정확히 카르만을 향했다. 이내 그녀는 부드럽게 시선을 돌리면서 페페를 향해 말했다.

“내 말 알겠죠, 집사? 이런 부분을 남작께서 일일이 신경 쓰지 않도록 잘해야 할 거예요.”

“…….”

“이 귀중한 조언에 대한 대가로 나는 위병 조셰프를 경호병으로 데리고 가야겠어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막마저 주지 않는다면.”

“…….”

“이 망할 저택을 내 발로 나가겠어요.”

엘리아나는 초강수를 둔다는 마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페페도, 카르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자 카르만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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