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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7/121)

26화

“부인, 남작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며칠 보이지 않던 르잔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치장하고 있던 차였다. 엘리아나를 대신하여 베니가 먼저 다가가서 물건을 확인했다.

“선물은 목걸이에요.”

엘리아나는 기가 차서 ‘하’ 하고 소리를 내면서 드레스 룸을 나왔다. 분명 질리언이 보낸 목걸이에 시기 질투해서 구했을 게 뻔했다.

카르만의 행동에는 매우 이중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녀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면서도 정작 그녀와 관련된 일에서 자신이 배제되거나 다른 남자의 이름이 거론되면 몹시 기분 나빠했다. 그리고 직접 본인의 의사를 전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통보했다.

선물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질리언의 경우는 다른 가문이었지만, 카르만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내게 직접 선물하는 것이 그렇게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아니면 샤르헨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없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생긴 건 똑 부러지게 생겨서 왜 그렇게 우유부단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수정을 곱고 세밀하게 가공하여 만든 목걸이는 객관적으로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목걸이를 내려다보는 엘리아나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카드 한 장도 없네. 남작께서 전하신 말씀은 없었니?”

“그, 경호병의 일은 따로 선발해 주신다고……. 위병에 관련해서는 지목할 권한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집, 집사님께서요!”

“지랄하는군.”

“……!”

엘리아나는 독한 욕을 쏘아붙였다. 하루라도 잠잠할 날이 없으니 신경질이 났다. 이 저택의 사람들은 매일 제 성질을 돋우는 방법만 연구하는 듯했다.

엘리아나는 르잔의 손에 있던 목걸이를 케이스째로 베니에게 넘겼다. 그러고선 르잔과 눈을 마주쳤다.

“르잔. 너는 남작의 하녀가 되기로 한 모양이지?”

“아닙니다. 저는……. 다만 갈 곳을 잃어버려서.”

“난 아직 널 해고하지 않았어. 하지만 넌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지.”

“부, 부인. 그렇지만 샤르헨 님은 저를 방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부인께선 샤르헨 님에게 가라고 하시고 저는…….”

“그래서 남작에게로 갔다? 새로 둥지를 틀 곳을 빠르게도 잘 찾았구나.”

“그, 그것이 아니오라…….”

르잔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제가 느끼기에도 논리가 부족할 것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르잔을 이용하기 위해서 페페가 부른 것이리라.

그날 이후로 페페는 복도에서 엘리아나의 드레스 자락만 보여도 달아나기 바빴으니 말이다. 이런 목걸이를 전달하는 것조차 껄끄러웠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편하게 이 방을 드나들 수 있으면서 샤르헨의 눈 밖에 나지도 않을 르잔은 페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엘리아나는 집사의 눈에 들었다는 생각에 박쥐처럼 입장을 갈아 치워 버린 르잔의 태도에 혀를 끌끌 차고 싶었다.

“그 편이 너에게는 더 낫겠지. 언제 이 저택에서 나가떨어질지 모르는 나나 변덕이 심한 샤르헨보다는 말이지. 르잔, 너를 공식적으로 해고해 주마.”

“부인……!”

“베니, 앞으로 르잔은 남작과 집사에게 소속된 하녀다. 내 방에 베니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게 해 줘.”

“네, 부인.”

“르잔, 이 목걸이는 다시 가지고 돌아가. 점심 이후에 내가 직접 남작께 방문하겠다고 전해.”

“다, 다시 가지고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내가 받을 거로 생각했어? 어림도 없는 소리. 여기에 독이 묻어 있을지 아닐지 어떻게 알지?”

“그, 그럴 리가요. 집사님께서 어렵게 구하신 최상품 백수정 목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페페의 말이고. 난 집사의 말을 믿지 않아. 가지고 돌아가. 그리고 내 말을 그대로 전해. 이유를 더 묻거든 기다리시라고 해.”

“남, 남작님께 기다리시라고… 전하라고요?”

“그래. 궁금하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고 이곳으로 쳐들어오시든가.”

엘리아나가 몸을 돌리자, 베니는 르잔의 품에 목걸이를 안겨서 방 밖으로 내쫓았다.

엘리아나는 곧장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은 방 밖에서 엿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안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 정말 값비싼 목걸이는 맞아 보였어. 그런데 남작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질리언이 선물한 목걸이를 하고 가지 말라는 뜻이야.”

“뭐?”

“기분이 나쁘다는 거야. 다른 남자가 선물한 목걸이에 기뻐하는 내가.”

카르만의 수법은 어설펐다. 마치 수컷이 영역 표시를 하듯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통제하려고 들었다. 조셰프를 경호병으로 붙여 달라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었다.

“기분이 나쁘긴 뭐가 나빠? 정말 어이없어. 자기가 저지른 일은 생각도 안 하나? 수양딸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면서!”

베니는 엘리아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듯이 소리쳤다. 엘리아나는 어떻게 해야 카르만의 이런 행동들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카르만의 이상한 소유욕은 샤르헨의 질투와 돌발 행동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앞길을 방해할 뿐이었다.

“엘리. 어떻게 할 거야? 샤르헨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고, 그럼 분명 난리가 날 텐데.”

“샤르헨이 난리 치기 전에 담판을 지어야지. 그쪽도 샤르헨이 이상한 짓을 하면 곤란할 테고, 적어도 파티 전에 날 쫓아내는 건 무리일 테니까.”

엘리아나는 짙은 남색 드레스를 골랐다. 독특하거나 튀지 않고, 얌전한 드레스였다. 깊게 파인 스퀘어 네크라인은 목선을 훤히 드러냈다. 하지만 엘리아나가 요즘 입는 옷들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었다.

코르셋도, 파니에도 입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게 떨어지는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엘리아나는 일부러 그 드레스를 골랐다. 옷에 힘을 줄 필요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엘리, 전투복인데 그걸로 괜찮겠어?”

“호통 치기엔 이 옷만 한 게 없지. 그리고 전투복은 이걸로 충분해.”

엘리아나는 자신의 드레스 룸 한가운데에 있는 아마조나이트 목걸이를 가리켰다. 베니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엘리아나의 긴 머리를 높게 올렸다. 어느 각도에서도 목걸이가 잘 보이도록 말이다.

엘리아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잠시 빼두었던 머리핀을 꽂았다. 카르만은 자신을 잘못 평가한 것이었다. 그가 어리숙하게 굴 동안, 엘리아나는 이미 질리언 허트와 율리시스 밀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었다. 아직 휘둘러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것도 없이 당했어야 했던 첫날밤과는 달랐다.

“샤르헨이 찾아오지 않을까?”

“내가 아니라 남작을 찾아가겠지. 나는 목걸이를 거절했으니, 나한테 와서 난동을 피우기는 민망할 거야.”

“남작은 뭐라고 설명할까?”

“모르겠어.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야.”

“그 이유가 너 때문일까?”

엘리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핑계일 뿐이야. 둘 사이는 그전부터 갈라지고 있었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수양딸로 삼았다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면서 아내를 셋이나 갈아 치울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배짱도 없고, 야망도 없고.”

엘리아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이곳에 카르만이 있다고 해도 이대로 말했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동안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만들어 놓은 노트를 들었다. 이 저택의 문제점들을 발견할 때마다 적어 놓은 것들이었다.

원래라면 남작 부인이 된 순간부터 저택을 관리할 수 있는 통솔권을 받았어야 했지만, 카르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페페는 무능력하다 못해 게을렀고, 샤르헨은 관심이 없었다. 카르만은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있는 부잣집 아들일 뿐이었다.

그는 마치 세상살이를 다 배우지 못하고 밖에 던져진 것처럼, 매사 마냥 도련님 같아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헌터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될 인물이자, 남작이었다. 이젠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사실 이 문서는 카르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제리크 헌터에게 제안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이 망해 가는 저택을 올바르게 일으킬 개선안이자, 엘리아나의 현명함을 보여 줄 지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제 생각보다 카르만이 더 아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리크 헌터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이 남작가가 망해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샤르헨이 일을 칠 수도 있었고, 사기를 당할 수도 있었다. 혹은 카르만이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질리언에게 덤볐다가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엘리아나에겐 망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길이 보였다.

로즈 가문은 아직 충분히 원조받지 못했다. 가이아도 이제 수업을 시작했고, 질리언이나 율리시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 완전한 신뢰를 받기까지도 시간이 더 걸릴 터였다. 적어도 그때까진 망해선 안 됐다.

엘리아나는 문서를 들고선 꼿꼿한 자세로 방을 나섰다. 복도에서 집사인 페페가 허둥거리면서 자신의 방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페페는 엘리아나를 발견하자마자 새하얗게 질려선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부, 부인. 남, 남작님께서 오후 일정이 있으셔서, 지금, 오, 오실 수 있냐고.”

“마침 가려던 참인데, 잘됐군. 샤르헨은?”

“샤르헨 님은 왜…….”

“저런. 아직 소식이 안 닿았나 보군. 다행일지도 모르지. 나와 남작이 이야기할 동안, 샤르헨이 남작의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줘.”

“그러나 샤르헨 님의 고집은…….”

“남작의 명이라고 해. 허락은 내가 받겠어. 그리고 집사도 따라 들어와야 할 거야.”

“제, 제가요?”

엘리아나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참석하지 않았다가 이유도 모르고 맨몸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페페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엘리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작의 방으로 걸음을 뗐다. 엘리아나의 목걸이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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