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121)

24화

“후우.”

엘리아나는 읽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어디에도 율리시스 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그를 어렸을 적에 가르쳤던 스승이 모든 분야에서 천재에 가깝다고 적어 준 것 정도였다. 그 뒤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산 듯했다. 이렇다 할 존재감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도, 왕의 앞에 나서서 자신을 봐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종전의 기쁨을 자기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눌 뿐이었다. 다른 형들이 그를 견제하지 않도록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왕권에 관심이 없는 한량일 뿐일까?

엘리아나에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전자라면 깊이 관여할수록 좋았고, 후자라면 적당한 선에서 끊어 내야 했다.

엘리아나의 직감은 그가 이제야 목적을 드러내는 중이라는 쪽이었다. 콘티노국에 온 것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외교적인 인사들을 파악하고 미리 손을 써두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왜 수도가 아닌 수도 옆에 있는 이 도시로 왔을까? 엘리아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저택에 있는 보고서는 더 이상 줄 수 있는 답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엘리아나는 결혼 전에 입었던 수수한 드레스를 꺼냈다. 머리엔 모슬린 스카프를 두르고, 어깨 위로 낡은 케이프를 둘렀다. 마치 가난한 평민인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낯설어진 차림새였지만, 이게 바로 원래 엘리아나가 입던 옷이었다.

‘이때를 잊어선 안 돼. 돌아가서도 안 돼.’

엘리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그때보단 지금이 나았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었다. 그 길에 율리시스 밀이라는 징검다리 하나가 생길 수 있을까?

엘리아나는 채비를 서두르고선 시내 왕실 도서관을 향했다. 남작가보다 훨씬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곳이었다. 그곳에 제발 율리시스 밀에 대한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길 바라면서 엘리아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

“이렇게 정보가 없을 수가 있나?”

율리시스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로즈 가문의 정보에 혀를 찼다. 예전엔 왕립 대학의 전임 교수를 배출하던 학자 집안이었다는 것 말고는 큰 정보가 없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오래전 일이었고, 지금은 아예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유일한 정보는 엘리아나 로즈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그 이야기들은 전부 뜬소문에 가까웠다. 율리시스가 사과를 깨물며 고민에 잠기자, 투리스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뒤져 보겠습니다!”

“아직 왕립 도서관은 가 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오늘 곧장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투리스의 말에 멜번도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누군가의 뒷조사를 해 왔지만, 이렇게 털어서 먼지 하나 없는 집안은 처음이었다.

그냥 빈털터리 귀족 가문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참았다. 율리시스가 아무리 편하게 대해 주고 있더라도 그는 왕자님이었다.

율리시스는 사과를 한 입 더 크게 베어 물고선 말을 이었다.

“아니야. 도서관엔 내가 가 볼게. 바깥 구경도 좀 하고.”

“호위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 튄다고. 투리스는 너무 몸집이 크고, 멜번은 누가 봐도 성기사인 게 티가 나.”

“조심하겠습니다.”

“모, 몸을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면 작아 보이지 않을까요?”

율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해도 전혀 일반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투리스는 무게가 3kg이 넘는 검인 클레이모어(Claymore)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전장에서 적을 베거나 찌르는 것보다는 칼로 때려죽이는 스타일이었다. 온몸은 굵은 근육으로 덮여 있었고, 아무리 천으로 된 옷을 입어도 두툼한 몸을 모두 가릴 수가 없었다.

멜번은 평소에도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r)를 모두 갖춰 입고 다닐 정도로 예의를 중시하는 기사였다. 지금은 콘티노국의 평민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곧게 펴진 허리와 딱딱한 자세는 누가 봐도 그가 보통 사람은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 중에 가장 의심을 덜 살 만한 사람은 율리시스 본인뿐이었다. 화려한 머리카락 색이 이목을 집중시킬 순 있었지만, 류트(*음유 시인들이 주로 들고 다니던 작은 현악기) 하나를 들고 돌아다니면, 유흥을 좋아하는 여행자로 보였다.

율리시스는 먹던 사과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선 테이블 위에 있던 모자를 꾹 눌러썼다. 신문 배달하는 소년들이나 쓸 법한 갈색 팔각모였다.

“다녀올게!”

“와, 왕ㅈ… 아니, 공작님! 노튼 공작님!”

“그동안 나를 찾아다니는 친애하는 형제들을 잘 따돌려 주도록.”

율리시스는 소년처럼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 손을 흔들었다. 투리스와 멜번은 몸을 숙여 명을 따르겠다는 표현을 해 보였다. 철없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도 전부 계획이 있었으니까.

***

엘리아나는 확실히 도서관으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율리시스 밀의 왕위 계승 후보자 임명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어 놓은 책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콘테르국에서는 다른 야망이 있는 왕자를 두고 어째서 율리시스가 후보가 되냐는 여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왕실 기사단장인 커스버트 가문과 재상인 노튼 가문에서 강력하게 그를 밀어붙였다고 했다. 당시 여론은 두 집안의 장남과 율리시스의 친목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상 군사력과 재정력이라는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두 가문의 신임을 이미 얻은 자라는 점에서 그를 주목해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율리시스의 다음 행보는 그런 면을 숨기기 위한 것들이었다. 일부러 왕위 계승 후보식에 지각하거나, 파티에서 졸아 버린다거나, 류트를 연주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등.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공적을 세우려는 형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엘리아나는 그의 기이한 행동이 정리된 부분을 한 번 더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똑똑.”

엘리아나는 누군가 자기 어깨를 톡톡 치면서 입으로 내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책 속에 있어야 하는 율리시스가 있었다. 그는 류트를 들고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올리버.”

“여기서 또 만나네요. 이렇게 일찍 다시 뵙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게요. 그 차림은 도서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무슨 일이죠?”

“로즈 가문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율리시스는 조금의 숨김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엘리아나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도, 비꼬는 것도 아님을 알았다. 정말로 로즈 가문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거라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나랑 교환할래요?”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내가 갖고 있다면요.”

율리시스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더 활짝 웃어 보였다.

“갖고 있을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죠?”

“율리시스 밀에 관한 거니까요.”

율리시스는 순간 웃음을 멈췄다. ‘율’이라는 한 글자로 그녀는 금세 자신의 이름까지 알아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왕립 도서관을 뒤져서까지 자신에 대해서 찾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시 흥미로워. 너무 흥미로운 여인이야.’

율리시스는 모자를 벗으며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모자 밖으로 쏟아지듯이 흩어졌다.

“이렇게 훅 들어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인생은 원래 예상하지 못한 일의 연속이죠.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진 않겠죠? 올리버.”

엘리아나는 이미 다 읽은 책을 제자리에 꽂으면서 말했다.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두 사람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율리시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창가에 털썩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죠. 딱 세 가지만 묻기로 해요.”

“내게 궁금한 게 세 가지뿐이군요.”

“아니요.”

“그럼 왜 세 가지죠?”

“그 이상을 알려줬다간 내가 당신에게 모든 걸 들켜 버릴 것 같아서요.”

“현명하네요.”

엘리아나는 자신에 대한 칭찬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율리시스는 먼저 질문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로즈 가문은 왜 가난해졌죠?”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엘리아나는 책장에 몸을 기대고선 대답했다.

“원래도 부유한 편은 아니었어요. 근근이 귀족의 명분을 지킬 뿐이었죠. 가난해진 건 선대 가주님이 왕립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부터예요. 28대 가주께서 학장의 비리를 밝히려다가 적발되어서 잘렸거든요.”

“저런.”

“그 이후로 왕립 대학의 힘 있는 자들은 로즈 가문에 대한 정보를 모두 지우기 시작했어요. 지금 제 아버지는 32대 가주고, 이제 우리 가문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똑똑한 머리 덕분에 귀족 영애들의 과외를 알음알음 맡아서 하고 살았죠.”

율리시스는 명쾌한 엘리아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리를 밝히려다가 적발된 것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학장과 그의 주변 귀족들은 어떻게든 로즈 가문을 매장하려고 했을 것이었다. 아니면 자신들이 다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실제로 로즈 가문은 매장당했고, 살길이 막힌 와중에도 대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의 차례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엘리아나는 그런 율리시스와 눈을 마주치고선 말을 이었다.

“그는 왕이 되고 싶나요?”

그녀의 질문은 간결했다. 하지만 율리시스의 전체를 쥐고 흔드는 질문이었다. 율리시스는 엘리아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엘리아나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율리시스는 입가에 웃음기를 완전히 거두고선 담백하게 말했다.

“네.”

율리시스의 대답에 엘리아나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선 몸을 반쯤 옆으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다음 질문.”

“더 캐묻지 않는군요.”

“내가 원했던 답을 들었으니까요.”

“시원시원하군요.”

“다음 질문은?”

“다음 질문은.”

율리시스의 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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