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121)

23화

「친애하는 엘리아나 로즈에게. ―질리언 허트」

엘리아나는 화를 금세 가라앉히고선 ‘친애하는’이라는 글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질리언이 보낸 보석과 헬렌이 보낸 동전이었다.

앞면. 이건 자신의 계획에 협조하겠다는 뜻이었다.

“어머나. 이 귀한 아마조나이트를……!”

아마조나이트는 엘리아나의 눈 색깔을 닮은 초록색 보석이었다. 베니는 목걸이를 보자마자 엘리아나를 거울 앞에 앉혔다. 그러고선 긴 머리를 들어 올려 아름다운 목덜미가 잘 드러나도록 했다. 베니는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들어 그녀에게 걸어 주었다.

“어쩜 좋아, 엘리. 정말 너무 예쁘다. 네 눈에서 쏟아진 별 같아. 너무 아름다워.”

엘리아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처음 가져 보는 보석 목걸이였다. 기껏해야 골목 가짜 보석상에서 산 진주로 눈속임하려고 했는데, 질리언은 그것까지 미리 알아챈 것일지도 몰랐다. 엘리아나는 초록색 보석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아마조나이트도 색깔이 여러 개일 텐데, 어쩜 이렇게 딱 맞는 반투명한 초록색을 찾았을까? 네 남편이란 머저리 빼곤 곁에 있는 놈들이 다 괜찮은 놈 같아 보여.”

엘리아나는 푸스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남편이 너무 못났기 때문일지도 몰라.”

“일리가 있는 말이야.”

“베니, 이 목걸이는 증표야. 나는 이제 다신 물러설 수 없고, 앞으로만 나아갈 거야.”

“물론이야. 이건 다 잘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어. 자신감을 가져. 자, 얼른 옷을 마저 가봉하자. 연회장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남작 부인이 되려면 서둘러야지.”

“좋아.”

엘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던 가운이 벗겨지고, 거의 완성 단계의 드레스가 엘리아나의 온몸을 조이기 시작했다. 엘리아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자신을 조여오는 모든 압박을 마주하듯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

“미, 미친 들소처럼 화를 내셨습니다. 이미 이 남작가가 썩은 가시밭이라면서 저의 전문성을 의심했습니다! 제게 꺼지라고도 했어요!”

집사 페페는 카르만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질리언 허트에게 선물이 도착한 순간, 페페는 곧장 그것을 들고 카르만에게 찾아왔다. 엘리아나만의 일이라면 상관없었지만, 곧 자작이 될 질리언과의 일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어제는 광장에서 술 취한 도박쟁이들과 어울리다 싸움에 휘말리시기도 했고요. 누군가를 패기도 했다더군요. 헌터 가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요.”

“…….”

“마지막엔 웬 금발의 어린 공작과 함께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건 절대적으로 이혼 사유입니다. 그녀는 남작가에 어울리지 않아요, 남작님. 이건 위대한 헌터 가문에 먹칠하는 꼴입니다!”

페페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자리에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양옆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수치심을 참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카르만은 고개를 들어 페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머리는 땀에 흠뻑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집안이 그렇게 엉망이던가?!”

“네?! 당치도 않습니다! 헌터 가문은 개국 공신의 가문으로 명망이 높고, 귀족들 사이에서 신뢰도도 높습니다. 재정은 늘 풍족했고, 비록 이혼이… 약간 많긴 했지만, 요즘은 어떤 귀족이든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하니까요. 하물며 왕실에서도 이혼을 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지 않습니까?”

“페페의 말은 아버지의 이름을 빼면 이 가문은 별 볼 일이 없다는 말이군.”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재정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지. 샤르헨의 사치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하녀들도 저택의 크기에 비해 많은 편이야. 쓸데없는 지출은 많지만, 저택 내부에 정원이나 서재 같은 곳은 잘 관리도 되지 않고 말이지.”

“그… 그것은…….”

“엘리아나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으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처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겠군.”

“…….”

“집사 페페.”

카르만은 절대 자기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페페는 억울했다. 그 모든 것을 방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카르만 남작이었다.

그는 샤르헨의 거취 문제로 가주와 크게 싸운 이후로 마치 생명력을 잃은 나무와 같았다. 그녀를 수양딸로 입양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페페의 일도 쉬워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페페는 기름지고, 좋은 음식들을 들여오는 데 집중했고, 다른 것들에는 소홀했다. 특히 샤르헨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고,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지출을 메꾸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페페는 자신이 꼼꼼하고 똑똑한 집사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충성심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남작이 진즉에 자신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지시했더라면 그대로 따랐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껏 말이 없다가 자신의 탓을 하다니!

페페는 엘리아나가 자신을 표독스러운 말로 공격했을 때보다 더 큰 수치심을 느꼈다. 정말로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르만은 얼굴이 붉어졌다가 파래졌다가 하는 페페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녀는 좋아하던가?!”

“…….”

“그 목걸이.”

“…네. 뭐, 보석을 싫어하는 여인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먼저 그 선물을 확인했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마녀도 그런 마녀가 없었습니다!”

페페는 내심 카르만을 원망하는 와중에도 엘리아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만의 귀에는 그런 것들이 들리지 않았다. 그 목걸이를 들고 미소 짓고 있을 엘리아나의 얼굴이 떠오를 뿐이었다.

엘리아나의 초록색 눈동자를 닮은 목걸이. 카르만은 그런 것을 선물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엘리아나에게 변변찮은 장신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사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정말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샤르헨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명확하게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이걸 사 주세요’, ‘이것이 갖고 싶어요’ 그녀가 말할 때마다 카르만은 원하는 것을 사 주었다.

언제나 부족함 없이 사 주었기에 선물은 끊이지 않았다. 이번 파티에서 착용할 머리핀과 팔찌,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모두 새로 한 참이었다.

드레스를 함께 봐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는 무리할 정도의 장신구를 원했다. 카르만이 처음으로 그것을 지적했더니, 샤르헨은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 버렸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사 주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 더 서먹해진 참이었다.

샤르헨은 뒤늦게 반성하는 듯이 카르만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지만, 카르만은 큰 감흥 없이 덤덤했다.

그날. 현관에서 외출하고 돌아온 엘리아나에게 가문의 일원으로서 함께 갈 수 없다고 한 것이 시발이었다. 샤르헨은 당장 그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겼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가 당신의 여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세요. 이 샤르헨이 진짜 남작 부인이라는 것을요.

―샤르헨. 어째서 불안해하는 거지? 어차피 파티에는 늘 너와 함께 입장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했고.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에요! 어떤 계략을 써서라도 저를 혼자 그 파티장에 입장하게 할 거예요. 그러면 전 정말 혼자가 되겠죠

―그럴 일은 없어, 내가 약속하지.

―약속만으로는 부족해요. 모두의 앞에서 선언해 주세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카르만. 내 사랑.

요즘 들어 샤르헨과 나누는 대화가 점점 더 피로해졌다. 카르만은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엘리아나에게 이를 재차 못 박았다. 원래도 정해져 있던 바였기에 엘리아나가 눈물까지 흘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릴 것이란 것도 말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질리언의 등장은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다.

그 무뚝뚝한 질리언 허트가 카드와 함께 목걸이를 선물했다. 그녀는 그것을 목에 걸고 입장할 것이었다. 카르만의 예상이 맞다면, 질리언 허트와 함께 말이다.

쾅. 카르만이 책상을 내리쳤다. 페페는 깜짝 놀라서 혀를 깨물 정도였다.

“괜찮은 목걸이를 알아봐.”

“목걸이요?”

“백수정이면 좋겠군.”

“서, 설마 엘리아나 로즈에게 선물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페페는 혀를 씹어서 짧아진 발음으로 펄쩍 뛰었다. 카르만은 눈앞에 있는 서류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이었다. 말투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다른 남자가 선물한 보석을 떡하니 목에 걸고 나타나는 꼴을 내가 봐야겠나? 그렇게까지 한심한 남편이 되고 싶진 않은데.”

“아, 물론 그야 그렇죠. 저가에 구할 수 있는 백수정 목걸이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네?!”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가격은 상관없어.”

카르만은 쥐고 있던 펜을 더 꽉 쥐었다.

“지금 당장 알아봐.”

“네? 네!”

“그리고 엘리아나가 말했던 이 남작가의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도 조속한 시일 내에 문서로 볼 수 있으면 좋겠군. 내가 나서기 전에 말이야.”

“…네, 네!”

페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고선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카르만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새하얀 목에 자리 잡고 있을 초록색 보석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됐다.

이번엔 샤르헨이 반대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카르만은 그것만은 절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다면 입장도 자신과 함께하는 쪽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것이 이 관계의 엉킨 실을 풀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왜인지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카르만은 쥐고 있던 깃펜을 결국 부러뜨렸다. 자신의 요동치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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