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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3/121)

22화

허름한 여관, 맨 꼭대기 방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기사 멜번과 투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자님!”

“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자신들이 모시는 왕자님이 제멋대로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행방이 묘연해진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율리시스는 복장이 엉망이고 입가는 터져 있었다.

“쉬이, 그 호칭은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투리스.”

“죄, 죄송합니다.”

율리시스는 체스 도박으로 딴 돈을 테이블 위에 던져 두고선 그대로 싸구려 침대로 몸을 던졌다.

“여기 분위기 좀 조사할 겸 체스를 몇 판 두고 왔지.”

“돈내기를 하신 겁니까? 너무하십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체스를 져 보신 적이 없는 분께서 또 누구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오신 겁니까?”

“난 코는 안 눌렀다고, 대신 그 자식이 내 입가를 터뜨렸지.”

“또 살살 봐주시는 척 약 올리셨겠죠.”

“그래야 재밌단 말이지.”

율리시스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직 자신의 주변에 오늘 만난 그녀의 향수 냄새가 맴도는 것 같았다.

엘리아나 로즈. 요즘 이 도시에서 유명한 남작 부인이었다. 헌터 가문의 차기 가주, 카르만 헌터의 네 번째 부인. 거기까지는 평범했다.

그러나 소문은 그녀를 흡사 마녀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결혼 첫날부터 수양딸을 사정없이 팰 정도로 악독한 성격이라 했다. 화장과 옷차림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술집 여자들과 같은 드레스를 입는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듣던 대로 마녀였던가?

그건 아니었다. 차림새가 이제껏 만난 영애들과 다르긴 했지만, 무섭다기보다는 아름다웠다. 화려한 아름다움이었다. 꽃이 만개한 것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미모였다.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율리시스가 주목한 건 그녀가 남자를 때렸을 때였다. 그녀는 날카롭고 표독스러운 척했지만, 때리는 동작은 어설펐다. 아마도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이 더 아팠을 것이었다.

사람을 때리는 게 서툴지만, 티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 왕가의 문양을 그 찰나에 알아보았다. 왕가의 표식이 목 뒤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문양의 모양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적었다. 특히나 이웃 왕국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 표식 하나를 믿고 곤경에 뛰어들었다. 자신을 올리버 공작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 내면서 말이다.

“미쳐 버리겠군. 환상적이야.”

“네?”

“정말 기가 막히게 똑똑하단 말이지.”

율리시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멜번과 투리스는 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거기서 그 이야기를 모두 지어내지? 내가 만약 제대로 받아쳐 주지 않았다면 자기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율리시스는 아주 가끔 혼자 몰두해 주변의 목소리를 차단해 버리곤 했는데, 지금이 딱 그때였다.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일 때 멜번과 투리스는 ‘먹잇감을 찾았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의 흥미를 이끄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번엔 대체 누굴까?

투리스가 멜번의 눈치를 보았다. 멜번은 고개를 젓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한테도 알려 주시라고요. 꼭꼭 숨기지 마시고.”

“아! 그래!”

“…….”

“알아봐 줘! 헌터 가문에 대해서.”

“네? 이 나라의 개국 공신인 헌터 가문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아, 틀렸어. 틀렸어. 헌터 가문에 있는! 아니, 아니. 헌터 가문에 있지만 헌터 가문에 있는 게 아닌!”

“왕자님, 지금 본인이 무슨 말씀하는지는 알고 계신 거죠?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고요.”

“엘리아나 로즈!”

“…….”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어.”

율리시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투리스는 어리둥절해선 그 이름을 제 입으로 중얼거렸다.

“엘, 엘리아나 로즈? 로즈라는 이름의 귀족 가문이 있었나?”

하지만 멜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는 이미 엘리아나의 이름을 들어 본 터였다.

“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여성이던데요. 정숙하지도 못하고요. 얽혀 봤자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멜번.”

“네.”

“내가 이 콘티노국으로 향할 때만 해도 엘리아나 로즈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어.”

“…….”

“단시간에 이 작은 도시를 집어삼킨 여자야. 독이 될 수도 있겠으니, 조심할 필요도 있겠지, 하지만.”

율리시스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 빛났다.

“재밌잖아!”

투리스와 멜번이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해맑아 보이는 이 왕자님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먹잇감을 쉬이 놓아 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만만찮았다. 먹으려다가 먹힐지도 모르는 상대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율리시스의 흥미를 더 자극했다.

율리시스는 침대에 다시 몸을 뉘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위장해야지. 누가 좋을까.”

율리시스는 절친한 친구들의 가문을 쭉 떠올려 보다가 핑거푸드를 집듯이 하나를 골랐다.

“노튼. 노튼 가문이 좋겠군. 올리버 노튼. 어때?”

“올리버는 어디에서 나온 이름입니까? 친우이신 애덤 노튼 님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애덤은 여기저기 얼굴을 비치고 다녔을 확률이 높아. 애덤의 동생이라고 대충 둘러대지, 뭐.”

“애덤 노튼의 동생이라면 적어도 비슷한 이름이라도…….”

“올리버가 좋아.”

율리시스는 피식 웃으면서 ‘올리버, 올리버, 올리버’라고 읊조렸다. 그는 대뜸 고개를 돌려 멜번과 투리스를 보았다.

“근데 왜 하필 올리버였을까?”

멜번과 투리스는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질문에 작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아침에 먹은 올리브밖에 생각이 안 났어. 그런데 사람 이름을 올리브라고 할 순 없으니까. 조금 응용했지.”

왜 올리버 공작이라는 이름을 지었냐는 베니의 물음에 엘리아나는 대답했다. 베니는 엘리아나의 머리를 손질해 주면서 재밌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생각난 음식이 베이컨이었으면 베이컨, 빵이었으면 팡 같은 거였겠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올리브가 생각난 게 다행인 거 같기도 하네.”

엘리아나도 베니를 따라 푸흐흐 웃었다. 오늘은 파티 전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가봉하는 날이었다. 엘리아나는 평민들이 주로 입는 질이 낮은 모슬린으로 만든 슈미즈를 걸친 상태였다. 거친 질감의 옷임에도 엘리아나가 입고 있으니, 마치 실크 드레스 같아 보였다.

엘리아나는 모처럼 코르셋으로 조이지 않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테이블에 있던 올리브를 보았다.

“올리버. 이름 참 잘 지었는데 말이야.”

“자꾸 그가 생각나나 봐?”

엘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선 올리브 한 알을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베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베니는 그런 엘리아나의 뺨을 만져 주며 말했다.

“넌 예나 지금이나 재밌는 걸 발견하면 꼭 이런 눈이 되곤 해.”

“베니 앞에선 아무것도 못 숨기겠다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이 너무 기대돼. 내 생각보다 더 높은 곳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아.”

“옛날 신화에 나왔던 밀랍 날개를 기억해. 자유롭게 날 수 있다고 너무 신이 나서 높이 가 버리면 안 돼. 햇빛에 밀랍이 다 녹아 버린다고.”

“명심하겠습니다, 베니 양.”

둘 사이에 푸흐흐 하고 웃는 웃음이 퍼졌다. 동시에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베니는 재빨리 가운을 가져와서 엘리아나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선 직접 문을 열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페페였다.

집사 페페는 마땅찮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을 내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허트 가문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보낸 사람은 질리언 경인가요? 아니면 헬렌 양?”

“질리언 허트 경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선물이군요. 이리 줘요.”

“부인.”

엘리아나가 손을 뻗자 페페는 표정을 굳히고선 말을 이었다.

“너무 많이 튀지 마세요. 남작께서 움직이시지 않는다고 해서 헌터 가문에 눈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보다 더 날뛰신다면 부인이 위험해지실 수 있습니다.”

페페는 답지 않게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엘리아나는 페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선물을 미리 열어 봤군요, 페페.”

“이 집에 도착하는 물건들은 검수가 필요하죠. 저는 검수 절차를 거친 것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선물을 보낸 이가 안주인과 터무니 없는 염문이 돌고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아나는 그에게 다가가 선물을 빼앗듯이 들었다. 그러고선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안주인 취급을 해 줬다고 안주인, 안주인 거리는지 모르겠네. 그 얘기를 샤르헨 헌터에게도 똑같이 한 적이 있던가?”

“부, 부인.”

“그랬다면 이 집안이 이 꼴까지 오진 않았겠지. 문제가 없는 척, 아무런 위기도 없는 척, 그렇게 편안하게 집사 생활을 하니 남작 부인인 나도 우스운가?”

“…….”

“이 집안은 이미 썩은 가시밭이야. 그건 집사인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 나에게 튀지 말라고? 건방진 소리!”

엘리아나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그 말은 페페의 뚱뚱한 몸을 마구 그어 버릴 듯 냉정했다. 페페는 순식간에 땀을 흘리면서 엘리아나를 보았다.

“감히 누가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가,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부인. 그저 저는…….”

“그저 전달만 한 것이겠지.”

“……!”

“카르만 헌터에게 전해. 이런 비겁한 짓으로 나를 옭아매려고 하지 말라고. 나는 첫날밤부터 지금까지 이 남작가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

“그가 직접 내게 그렇게 말했어. 그랬으면 그 말에 책임을 지셔야지. 안 그래?”

엘리아나는 빠르게 말을 내뱉고선 페페의 어깨 한쪽을 툭 밀었다.

“나가.”

엘리아나의 말에 페페는 식은땀을 흘리다가 그대로 방을 나갔다. 엘리아나는 문이 닫히는 사이로 겁을 잔뜩 먹은 르잔을 보았지만, 무시했다. 그러고선 자기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열었다.

그곳엔 동전 앞면과 아마조나이트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있었다. 엘리아나는 선물 케이스의 위에 붙어 있는 짧은 카드를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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