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 제데이아 테네브와 재혼하실 건가요?”
헬렌의 목소리가 떨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데이아 테네브. 그는 왕실 재무부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이자, 테네브 공작 부인이 끔찍하게 아끼는 장남이었다. 왕실과 연관된 가문이 아니고선 혼담도 넣을 수 없다던, 그 제데이아 테네브였다.
“뭐, 그가 나에게 첫눈에 반해서 울고불고 절박하게 매달린다면요?”
“그게…….”
“푸흐흐… 그럴 일이 있겠어요?”
엘리아나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헬렌은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아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이혼을 결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에요. 우리 집은 헌터 가문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그는…….”
“그래요. 나에게도 첫날밤에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엘리아나는 그날 밤이 생각난다는 듯이 먼 곳을 응시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은 마음이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헬렌의 앞에서는 공감과 동정심을 일으켜야 했다.
잠시 뜸을 들인 엘리아나는 상념에서 벗어난 듯이 눈을 맑게 뜨면서 말했다.
“난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남고 싶지 않아요. 카르만 헌터의 부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떵떵거리면서 잘살고 싶어요. 내가 그렇듯이 헬렌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고통받은 세 명의 여인이 가여웠다. 두 사람은 재혼했지만, 헬렌은 어디에도 나가지 않은 채로 상처받은 마음을 여전히 안고 있었다.
카르만 헌터는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겁하고 무책임했다. 엘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의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보다 본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말이다. 그녀는 한 가문, 한 가문 문턱을 넘어서서 로즈 가문의 가주로서 바로 설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숙하지 못하고, 남자의 덕을 보는 여자라는 비난을 들어도 상관이 없었다.
자신은 떳떳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발판으로 삼기는 할 테지만, 그중 누군가와 결혼으로 엮이고픈 마음은 없었다. 무엇보다 카르만과 제 쪽의 문제로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이 결혼이 깨졌을 때의 책임은 카르만 헌터와 샤르헨이 온전히 지게 만들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은 그래야 했다. 그래야 다섯 번째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엘리아나의 꿈은 분명하고 원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헬렌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헬렌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나와 함께해 줄래요?”
헬렌은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용기를 내 말을 이었다.
“조금만 고민해 볼 시간을 줄 수 있어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엘리아나는 조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헬렌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선 식은 홍차를 마셨다.
엘리아나는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 줄 주제를 찾아 입을 열었다.
“아, 테네브 부인이 선물했다는 식물들은 잘 자랐나요?”
“몇 개는 시들어 버렸지만, 몇 개는 최선을 다해서 살렸어요. 꽃이 정말 예뻐요. 전부 콘테르국에서 온 귀한 식물들이에요. 아! 꼭 보여 주고 싶은 꽃이 있어요. 잠시만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헬렌은 식물 얘기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러더니 화려한 정원의 안쪽으로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상상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영애였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가 자신과 똑같이 박정한 말을 들어야 했던 그 언젠가를 떠올렸다.
카르만 헌터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조금도 알지 못하겠지. 엘리아나는 씁쓸하게 미소를 삼켰다. 그러고선 높이 솟은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았다.
부대에서 용무를 마치고 돌아온 질리언의 시선이 그런 그녀의 옆모습에 오래 머물렀다. 질리언은 정신을 차리고 큼큼 소리를 내었다. 엘리아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질리언을 보았다.
“일찍 오셨네요.”
“별일 아니었소.”
“헬렌은 화분을 가지러 갔어요. 제가 테네브 부인에게 받은 귀한 꽃을 구경시켜 달라고 졸랐거든요.”
“내가 없으니 더 죽이 잘 맞았던 모양이군?”
“살짝 빈자리가 느껴지긴 했어요. 질리언 경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없어서.”
푸흐흐, 웃는 엘리아나 로즈의 얼굴에 질리언의 시선이 다시 멈췄다. 그는 입가를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이름만 로즈 가문이 아닌 모양이군.”
“그게 무슨 뜻이죠?”
“큼……. 그런 뜻이 있소.”
“싱겁군요.”
엘리아나는 더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선 쿠키를 한입 물었다. 질리언의 시선은 그녀의 도톰한 입술로 향했다.
가시가 많이 돋아 있지만 감히 꽃들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한 아름다움. 그것이 엘리아나에게 있었다. 평민 못지않게 어렵게 살았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아한 태도가 곳곳에서 묻어났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장미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오라버니, 이것 좀 같이 들어 주세요.”
헬렌의 목소리가 정원 안쪽에서 들려왔다. 질리언은 그제야 엘리아나에게서 시선을 떼고선 헬렌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관심이 없어 보이던 엘리아나의 눈이 질리언의 등에 꽂혔다.
“로즈.”
엘리아나는 자신의 성을 조용히 읊조린 후에 피식 웃었다.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이름의 무게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
엘리아나는 남작가로 돌아오는 도중 마차에서 내렸다. 헬렌에게 가방째로 선물을 줘 버린지라, 짐은 없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와 가볍게 길을 걸었다. 시내에 잠깐 들러 장신구를 사기 위해서였다. 싸구려 목걸이나 귀걸이라도 상관없었다. 엘리아나는 원래도 귀중품이 없었고, 가짜일수록 오히려 더 화려한 법이었다.
“가격이 저렴하면 몇 개 더 집어 와도 될 것 같아. 집사가 웬일로 파티 준비에 드는 비용에 한해서는 남작가에 청구해도 좋다고 했으니까.”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를 노릇이지만, 있을 때 알차게 써 볼까?”
엘리아나의 미소에 베니가 따라 웃었다.
집사 페페는 유독 엘리아나에게 짜게 구는 면이 있었다. 이번 사교 파티 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르만에게 무슨 지시라도 받은 것인지 예산을 대폭 늘려 주었다. 물론 그마저도 비싼 의복사를 쓰는 샤르헨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지만.
“귀걸이는 역시 진주가 좋겠어. 다른 보석은 너무 티가 나.”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보석들도 작은 것들 위주로 사서 드레스 위에 반짝이도록 하는 게 좋겠어. 큰 것들은 아무래도 정밀하게 세공을 못 하는 것 같아.”
“좋아. 그럼 부탁할게, 베니. 나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엘리아나는 가짜 보석상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 엘리아나의 복장은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지나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복장과 화장을 하는 여인이 헌터 가문의 새로운 계모이자, 남작 부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가짜 보석상에 드나들었다는 걸 꼬투리 잡고 길길이 날뛸 카르만을 떠올렸다. 진절머리가 나는 느낌이었다. 베니 역시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듯이 손을 젓고선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내가 잘 골라 올게.”
“베니의 안목을 믿을게. 그럼 난… 분수대 앞쪽에 있는 게 좋겠지?”
“응. 사고 나서도 사람이 붙을지 모르니까 나는 한 바퀴 돌고 올게. 혹시 치근덕거리는 놈 있으면 발로 확 차 버려. 어딜 말하는지 알지?”
“그런 건 자신 있지.”
엘리아나와 베니는 서로를 바라보고선 까르르 웃었다. 가짜 보석상은 골목 바로 안쪽에 있었다. 엘리아나는 광장에 들어서기 전에 베니와 갈라졌다. 마치 일행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분수대 앞쪽으로 가서 부채를 펴고선 얼굴을 반쯤 가렸다. 햇볕이 좋아 다행이었다. 엘리아나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드넓은 남작가는 엘리아나에겐 좁은 새장과 같았다. 겨우 숨을 내쉬고 있긴 했지만,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마치 엘리아나의 몸을 꽉 조이고 있는 코르셋같이 갑갑했다.
엘리아나는 ‘후’ 하고 숨을 내쉬면서 물이 시원하게 떨어지는 분수대를 보았다. 이 분수대에 관광객들이 소원과 함께 던진 동전들을 주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늦은 밤, 등불 하나 없이 차디찬 분수대를 더듬으면서 가져온 동전들이 절실하던 시절이었다.
엘리아나가 아직 과외 선생을 하기엔 어리고 배움이 짧았던 시기였다. 그때 얼어붙었던 빨간 손을 떠올리면서 엘리아나는 새삼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느꼈다.
검은 장갑에 가려진 손을 내려다보는 순간, 광장 오른편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술집에서 금발의 남자가 걷어차여 나왔다. 그는 굴러서 광장의 중심부까지 올 정도로 세게 밀쳐졌지만, 금세 자리에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앉았다.
“아니, 왜 때리고 그래요? 게임에서 진 건 그쪽인데.”
“속임수를 둔 게 틀림없어. 이 노름꾼 새끼!”
“체스를 무슨 수로 속여요?”
“내가 안 본 사이에 말을 옮겼겠지!”
“보는 눈만 열 개가 넘었고, 다 당신 패거리잖아요!”
“그래서 어쩌라고! 난 절대 돈 못 줘!”
앉아 있던 남자의 풍성한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가늘고 숱 많은 머리칼은 연한 갈색과 금발의 사이에 있는 오묘한 색깔이었다. 뒷모습만 봐도 천하의 한량일 것 같은 어린 남자였다.
엘리아나는 괜한 일에 휘말릴까 봐 시선을 떼려고 했지만, 순간 그녀의 눈에 뭔가가 걸렸다.
그의 목 뒤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이었다. 남자는 금세 옷을 추슬렀지만, 이미 엘리아나의 눈에 표식이 보인 후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웃국 콘테르의 왕족을 뜻하는 문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