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세 사람의 대화는 즐거웠다. 질리언의 따끈따끈한 무용담과 헬렌이 가꾸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주제였다.
엘리아나는 귀족들이 자신의 취미에 대해서 신나게 말하도록 부추기는 걸 잘했다.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몇 마디를 대답만 해 줘도 그들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으니 말이다.
한창 대화를 이어 갈 무렵, 질리언의 수하가 나타났다. 상관이 급한 용무로 질리언을 호출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엘리아나에게 짐짓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투도 호칭도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내가 갔다고 해서 헬렌에게 헛된 소리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요, 엘리아나.”
“그 무용담을 듣고서 감히 질리언 허트의 동생에게 헛된 소리를 할 사람이 있겠어요?”
질리언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엘리아나는 그가 완전히 저택을 나갈 즈음에야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열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거예요.”
“엘리아나.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드레스는 처음 봐요.”
자수에 관심이 많은 헬렌을 위해서 솜씨 좋은 베니가 화려한 꽃을 새겨 둔 터였다. 헬렌은 꽃 자수를 쓰다듬으면서 기뻐했다. 엘리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내뱉고 싶었던 본론을 꺼냈다.
“헬렌.”
“네?”
“이 옷은 40년 전 테네브 공작 부인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 입었던 옷을 모티브 삼은 옷이에요.”
“테네브 공작 부인이요? 그 점잖은 분이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하겠는걸요.”
“테네브 공작과 결혼하기 이전에 부인께서는 이런 것에 관심이 정말 많으셨답니다. 지금도 꽃을 좋아하시죠.”
“네. 맞아요. 종종 저에게 꽃을 나눠 주기도 하세요. 물론 직접 만나 뵙진 못했고, 하인을 통해서 전달해 주시지만요.”
“헬렌을 좋게 보는 공작 부인들은 한둘이 아니니까요.”
“아, 아니에요.”
헬렌이 볼을 붉혔다. 헬렌은 한 번 이혼한 전적이 있음에도 여전히 좋은 배필로 여겨졌다. 허트 가문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도 했고, 헬렌을 좋아하는 어른들이 워낙 많기도 했다. 자수와 식물에만 관심이 있는 순수하고 맑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헬렌은 여전히 재혼에 관한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겪은 바로 결혼은 슬픈 일이었고, 헬렌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를 테네브 공작 부인의 며느리로 추천하실 건가요?”
헬렌은 떨린 음성으로 물었다. 자신에게 친구가 돼 주겠다며 다가와 선자리를 주선하던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헬렌은 엘리아나를 그런 사람들과 똑같이 여기고 싶지 않았다.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어서 그녀가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엘리아나는 헬렌의 질문에 씩 웃더니 말을 이었다.
“헬렌은 눈치가 빠르네요.”
“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엘리아나는 밝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금 틀렸어요.”
“틀렸다니요?”
“내가 테네브 공작 부인에게 소개하고 싶은 건 헬렌이 아니라, 질리언이에요.”
“……!”
테네브 공작 부인에게는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이 있었다. 딸은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했지만, 아름답고 총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아직 혼담이 오가진 않았지만, 질리언의 혼처로는 그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곧 자작이 될 질리언의 앞길을 더 크게 트여 줄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리언은 정략결혼이라면 질색했다. 헬렌이 고통받는 것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는… 정략결혼은 싫어할 거예요. 모두 저 때문이죠.”
“왜 헬렌 때문이에요. 그 망할 놈의 카르만 헌터 때문이겠죠.”
“망…망할 놈의…….”
“난 정말 그놈이 싫어요. 헬렌이 그놈에게 마음을 줬다는 사실도 싫어요. 그놈은 아주 괘씸해요. 몇 명의 여인을 울리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와 헬렌을 포함해서 말이죠!”
“…….”
헬렌은 속이 뻥 뚫리도록 카르만을 욕해 주는 엘리아나가 좋았다. 카르만을 좋아한 시간이 길었지만, 그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이었다.
벌써 네 번째 부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성격이 좋은 엘리아나는 세간에서 안 좋은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카르만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다.
헬렌은 집안이 좋았기에 이혼 사유가 집안끼리의 지참금 협상 결렬로 결론 지어졌고, 첫날밤도 치르지 않은 형식적인 결혼으로 남았다. 사교계에서 크게 흠이 잡히지도 않았다.
물론 실제로는 카르만의 노골적인 거부로 인한 것이었다. 헬렌은 끊임없이 기다리려고 했으나 샤르헨에 의해서 방출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엘리아나에겐 자신과 같은 탄탄한 집안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물러설 곳이 없기에 헌터 가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헬렌은 그것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일종의 동지애였다. 그 귀여운 얼굴의 샤르헨이 얼마나 악독한지는 헬렌도 겪어 봐서 알고 있는 터였다.
망할 놈. 카르만은 망할 놈이 맞았다. 그리고 그 망할 놈 때문에 질리언의 혼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헬렌은 한숨을 푹 쉬고선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의 고집을 꺾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고집을 꺾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네?”
“사랑에 빠지게 만들면 되잖아요.”
“어,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엘리아나는 우리 오라버니를 좋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나요?”
엘리아나는 자신이 퍼뜨렸던 소문을 생각하며 웃었다. 질리언 허트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은 저잣거리에 잘 퍼져서 헬렌의 귀에도 닿은 모양이었다.
‘조셰프가 생각보다 일을 잘하는군.’
엘리아나는 흡족해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질리언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나의 술수에요.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라고 소문 난 내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집까지 드나드는 질리언 허트.”
“…….”
“그가 곧 자작이 될 거라는 이유 말고,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도록 만드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엘리아나 로즈의 관심을 끌었는지 말이에요. 아마 테네브가의 아가씨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걸요?”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엘리아나가 얻는 건 뭐죠? 그건 너무 오라버니에게만 좋은 일이에요.”
헬렌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나쁜 소문의 중심에만 있고, 헌터 가문에선 벗어나지도 못해요. 그런데 우리 오라버니는 그 훌륭한 가문과 결혼하게 되고, 나는 사교계에 다시 발을 들여 놓게 되겠죠. 하지만 그러면 엘리아나는요? 엘리아나는 누가 구해 줘요?”
헬렌은 짧은 시간에 엘리아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버린 듯했다. 엘리아나는 감동했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선 헬렌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헬렌.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 찾아왔군요.”
“엘리아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요. 아니요, 못 하죠. 가난하거든요.”
“그럼 뭘… 얻어 가는 거예요?”
“나는 얻는 게 많아요. 명망 있는 허트 가문과 사교 파티에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망신을 피할 수 있어요. 게다가 질리언의 혼담이 이어지기만 하면 나는 테네브 가문과 허트 가문, 두 가문과 친분을 쌓을 수 있죠.”
헬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로즈 가문이 두 가문과 친분을 쌓는다는 건 큰 이득이었다. 게다가 테네브 가문은 돈이 많기로 유명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엘리아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헬렌은 셈이 느렸지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짧은 시간 만났지만, 엘리아나는 머리가 명석하고 좋았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뚜렷하게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하고 매력적이었다. 헬렌은 이렇게 두꺼운 화장이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녹색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아름다웠고, 직접 만들었다는 드레스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외적인 매력뿐만이 아니었다. 질리언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고, 질리언이 가진 군사술에 대해서 진지한 얘기가 가능할 정도로 똑똑했다.
‘엘리아나가 오라버니의 짝이 되면 정말 좋을 텐데…….’
헬렌은 질리언과 엘리아나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둘이 인연을 맺으면 질리언의 동생인 자신도 매번 엘리아나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정원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헬렌은 질리언이 그렇게 많이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헬렌.”
엘리아나는 헬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나도 허트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나는 질리언의 앞길에 좋은 사람이 되어 줄 수 없어요. 우리는 카르만 헌터라는 이름으로 한번 엮어 버렸죠. 사람들은 구설수를 생각보다 좋아해요. 질리언을 자작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게 만들 테죠.”
“엘리아나…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좀 매력적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으니까요?”
헬렌은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생각까지 읽을 줄 아는 엘리아나는 정말 총명했고, 유머 감각까지 있었다. 헬렌을 따라 웃던 엘리아나는 입꼬리에서 웃음을 거둬 내면서 말했다.
“헬렌, 나는.”
“네.”
“제데이아 테네브를 원해요.”
제데이아 테네브. 그 이름에 헬렌이 눈을 깜빡였다.
“제, 제데이아 테네브와 재혼하실 건가요?”
헬렌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