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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121)

16화

엘리아나는 조셰프의 호위를 받으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조셰프는 엘리아나가 농담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제가 파티 때 뭘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베니가 옷을 보내 줄 거야. 그 무거운 체인 아머를 대신할 가벼운 옷이지만, 질 좋은 모슬린으로 만들었으니 움직이긴 편할 테지.”

“그런 것을 제가 받아도…….”

“돼. 나의 기사는.”

조셰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의 기사. 엘리아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조셰프를 쥐고 흔들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와 조셰프의 것까지 옷을 준비했다. 자신의 사람들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가 내 사람들이라는 표식. 이제부터 이 표식을 늘려 갈 것이고, 곧 정복하고 말리라는 야심이었다.

엘리아나는 걸음을 멈췄다. 복도 하나만 지나면 자신의 방이었다. 그러나 그 길 한가운데에는 뚱뚱한 집사 페페와 카르만이 있었다.

조셰프는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그들이 있는 쪽에서 엘리아나를 살짝 가려 보호했다. 엘리아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조셰프의 호위를 받았다. 물론 몸을 약간 낮추어 인사하긴 했지만, 그를 철저히 남처럼 대하는 행동이었다. 카르만은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왜 의복사를 거절했지? 또 기가 막힌 복장으로 헌터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이오?”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어디 덧나나. 엘리아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선 말을 이었다.

“제 분수에 맞지 않기에 거절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홀로 입장하는 제가 헌터 가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가 한 행동은 분명 엘리아나를 헌터 남작가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콕 집어서 말했다. 그러자 카르만은 미간을 좁히고선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와 입장하지 않겠다는 게 그렇게 큰 의미인가? 그대가 구태여 헌터 가문이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대가 남작 부인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면 기분이 나아지나요?”

“비꼬지 말고.”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당연하죠. 당신은 내 얼굴에 침을 뱉었고, 나는 그 상태로 파티에 나가게 되는 거니까요.”

“돌려 말하지 마시오.”

“수많은 하인 앞에서 나와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사교 파티에 뒤늦게 데뷔하는 저를 혼자 내버려 두겠다는 뜻. 그러면 누가 계모인 데다가 가난하고, 정숙하지 못한 남작 부인을 상대해 주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연회장에서 저는 혼자 서서 눈만 굴리고 있겠죠.”

“…….”

“당신과 샤르헨이 웃으며 잔을 부딪치는 걸 보면서 말이에요.”

엘리아나는 숨 쉴 틈도 없이 쏘아댔다. 그가 한 찰나의 선택이 자신을 얼마나 짓밟았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카르만은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홀 안에선 혼자 있는 일이 없도록 하겠소. 의복사에게 원하는 드레스를 맞추시오. 그대가 헌터 가문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게 할 테니.”

‘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엘리아나는 그 말이 웃겼다. 이미 자신은 헌터 가문의 바깥에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소문이 카르만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에겐 샤르헨이라는 큰 약점이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엘리아나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지만, 자신은 그렇게 비신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을 터였다. 귀족들은 으레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시혜적인 행동들을 갑작스럽게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것이 고까웠다. 그 리듬에 맞춰 춤을 춰 줄 생각도 없었다.

“아뇨. 전 남작께서 부른 의복사의 옷을 입지 않겠어요.”

“…….”

“남작께서 인제 와서 아량을 베풀어 주신다 한들 누가 알아주겠어요. 소문은 빠르고, 저의 초라한 입장을 기대하고 있을 호사꾼들이 이미 줄을 지어 서 있을걸요?”

“…….”

“전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에요. 당신의 뜻대로.”

“엘리아나!”

“남작님께서 드레스를 함께 골라 주지 않아서 샤르헨은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

“이럴 시간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가 보세요. 아무것도 아닌 제게 동정을 베푸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나요? 조셰프, 가죠.”

“네. 부인.”

카르만은 조셰프의 호위를 받아서 사라지는 엘리아나의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유난히 옅은 화장기의 엘리아나는 며칠간 지독하게 마음고생 한 티가 났다. 식사도 변변치 않고, 방에서만 지냈다고 하더니… 몸이 안 좋은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제 와 자신이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카르만도 어쩔 수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충동이었다.

특히나 그녀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창문을 닫아 버렸을 때. 카르만은 도저히 그곳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창문을 닫은 것이냐고 그녀에게 당장 따져 묻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답답했다.

이 모든 게 그녀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그녀에게 사소한 잘못을 했기 때문이리라. 카르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완전히 돌아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원래도 못된 말을 내뱉던 입술은 아예 차갑게 얼어 버렸다. 독설만 내뱉는 입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 곁에 있던 위병이 눈에 거슬렸다. 엘리아나와 좋지 않은 소문이 났던 위병이었다. 어째서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곁에 두는 것이지? 설마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도 되는가? 카르만은 무표정한 얼굴 밑으로 지독한 생각들을 하면서 걸음을 뗐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안에 요동치는 질문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남작 부인의 되바라진 행동에 화가 나 버린 남작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더욱 안 좋아졌다는 소문이 사용인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졌다. 요즘 최고의 화제인 남작과 남작 부인의 이야기였다.

하인들은 역시 남작과 샤르헨 님 사이를 가를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며 떠들어 댔다. 샤르헨은 여유로운 듯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길게 가지 못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남작의 관심이 자신에게서 서서히 떠나 가고 있음을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붙잡아야 할지, 그 방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엘리아나, 엘리아나. 그 이름을 찢어서 짓밟는 꿈만을 꿀 뿐이었다.

***

엘리아나와 베니는 헬렌의 드레스를 챙겨 들었다. 질리언 쪽에서 마차를 보내 준 덕에 그것을 타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아나는 챙이 넓은 보라색 모자를 쓰고선 짙게 화장했다. 요 며칠 힘이 없던 남작 부인의 모습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녀는 레이스로 만든 긴 장갑을 끼고선 우아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걸음이 막혔다. 저번에는 카르만이었고, 이번에는 샤르헨이었다.

‘커플이 쌍으로 난리를 피우는군.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이라니까.’

엘리아나는 표정 변화 없이 샤르헨을 보았다. 샤르헨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양손을 뻗어서 문을 막았다.

“부인, 이 이상 추문을 만들지 마세요. 남작님의 명예를 얼마나 더 실추시킬 생각이시죠?”

엘리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샤르헨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샤르헨은 따박따박 말대답을 할 줄 알았던 엘리아나가 말을 하지 않고 있자,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입 안에 품고 있던 독설을 내뱉었다.

“전 부인과 현 부인의 만남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게다가 질리언 허트를 남몰래 사모하고 있다죠? 세상에,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정숙하지 못한 남작 부인이라는 소문을 가주께서 얼마나 참아 주실 거라고 생각하죠?”

“길진 않겠지. 하지만 가주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

“나 혼자 이곳을 떠나게 되진 않을걸.”

“엘리아나 로즈!”

“난 너와 남작 사이에 아무런 훼방도 놓지 않아. 사랑? 좋아, 하라고. 내가 방해한 적 있던가? 의복사도 거절했잖아. 그런데 너는 왜 내 외출조차 막으려고 하지?”

“…….”

“계모는 나야. 그러니까 착하고 가여운 딸은 빠져 있어. 이 이상의 소문이 돌더라도 난 이상할 게 없을 만큼의 여자가 되어 있으니까.”

“…당신은, 미친 여자야.”

“고마워. 르잔, 샤르헨 님을 방으로 모셔라. 또 쓰러지셔서 남작께서 걱정하실라.”

“대체 무슨 개수작이야!”

내내 무표정하던 엘리아나가 밝게 웃으면서 샤르헨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녀의 턱을 붙잡아 올렸다.

“이, 이거 놔!”

“어머니한테 존댓말을 하지 않는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

엘리아나 로즈의 녹색 눈동자 속에서 샤르헨이 흔들거렸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털어 내면서 말했다.

“벌은 나중으로 유보하마. 내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까지 반성문을 써 오렴. 착한 내 딸, 샤르헨.”

샤르헨은 엘리아나의 말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엘리아나와 그녀의 사이에 틀린 말은 없었다. 카르만이 자신을 딸로 입적시켜 두었기 때문에, 카르만의 부인인 엘리아나는 제게 어머니가 되는 것이 맞았다.

“…남작께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엘리아나는 샤르헨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날 가만두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난잡하고 정숙하지 못한 여인에게 빠져 내 드레스를 들추고 싶어 안달이 난다면? 그게 과연 너한테 좋은 일일까?”

“더러운 년……!”

샤르헨은 한쪽 귀를 막으면서 엘리아나에게서 멀어졌다. 엘리아나는 그제야 문을 막고 있던 방해물이 사라졌다는 듯이 도도하게 걸음을 떼었다.

남작가의 대문을 나서자, 말 두 마리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엘리아나는 멀리서 걸어오는 자신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는 하인을 바라보았다.

헬렌 허트와 질리언 허트. 엘리아나는 그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목적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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