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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21)

15화

엘리아나의 친정에 다녀온 베니는 좋은 소식을 여러 가지 가져왔다. 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았으며, 둘째 동생 가이아는 유명한 하프 연주자의 눈에 들어서 레슨을 받고 있다고 했다.

“가는 길에 칠면조 한 마리를 통째로 사 갔어. 오븐이 그렇게 돌아간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 엘리,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너무 행복했을 텐데! 모두가 너를 그리워했어.”

베니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저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기름기가 덕지덕지 묻은 입술로 자신을 보고 싶다고 얘기하는 어린 동생들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입술을 꾹 물고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헬렌에게서 답장은 도착했어?”

“물론이야. 기다리고 있겠대. 질리언이 만남 자리에 동석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그럼 이제 가져갈 선물을 마무리해 볼까?”

“선물?”

엘리아나는 베니를 이끌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에는 두 벌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딱 보기에도 화려한 드레스였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넓게 벌어져 있으나 레이스로 주름을 잡은 앙가장트(engageantes)는 엘리아나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었다. 그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더 가볍고 섬세한 소재들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옆에 있었다.

체형이 엘리아나보다 작고 통통한 여인을 위한 드레스 같았다. 베니는 보자마자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아챘다.

“엘리, 헬렌 허트에게 직접 만든 파티 드레스를 선물하려는 거야? 너는 정말 천재야!”

“그렇지? 너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이 드레스를 내가 어디서 착안한 줄 알아?”

엘리아나는 신이 나서 베니에게 말을 이었다. 40년 전 테네브가 입었던 드레스 그림을 보던 베니는 두 개의 드레스를 보고선 손뼉을 쳤다. 하나는 완벽한 재현이었고, 하나는 지금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부인의 마음에 쏙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헌터 남작이 의복사를 보내 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한 거구나.”

“꼭 그것만은 아니야. 카르만이 왜 갑자기 변심해서 나한테 의복사를 붙여 주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닐 거야. 쓸데없이 샤르헨을 더 부추기기나 할 뿐이지.”

“그래. 확실히 남작의 태도엔 일관성이 없지.”

“순수한 의도였다고 해도 그렇게 읽지 않을 거야. 그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거든.”

“좋은 생각이야. 널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은 남자를 용서할 순 없지. 난 두 연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손으로 다 찢어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야.”

베니는 씩씩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행복한 로즈 가문을 보고 왔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엘리아나가 겪어야 하는 고초를 옆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자매이자 친구인 베니가 좋았다. 엘리아나는 베니를 한번 꼭 안아 주고선 말을 이었다.

“난 반드시 이곳을 벗어날 거야.”

“엘리.”

“처절하게 후회하는 이 남작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면서. 당당하게.”

“좋아. 내가 뭐부터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헬렌 허트의 드레스를 내가 마저 맡는 게 좋겠지?”

“응!”

엘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선 바늘과 실을 집어 들었다. 엘리아나와 베니는 손이 빨랐다. 그래야만 바느질거리가 더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두 사람은 빠르고 꼼꼼한 마감으로 유명했다. 수선집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냐면서 서로 킥킥거릴 정도였다. 게다가 지금은 이미 있는 옷을 뜯어서 장식을 다시 하는 정도이니 옷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덜 힘들었다.

엘리아나는 신중하게 러플이나 프릴을 만지면서 더 고민했다. 40년 전, 아름다웠을 테네브 부인을 얼마나 재현할 수 있을까. 분명 파티의 모든 사람이 주목할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중심인 샤르헨 헌터를 못살게 구는 계모이자, 남편에게 버림받기 일보 직전의 남작 부인이었으니 말이다.

엘리아나는 이 모든 상황이 한 자리에서 폭죽처럼 터질 생각을 하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베니.”

“응?”

“귀족들의 삶은 너무 재밌고 우스워.”

이리도 간단하게 손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자 하는 허상을 엘리아나는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듯이 살아왔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귀족들이 원하는 명예와 가치는 헛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헛된 것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엘리아나는 알았다. 생존의 방식으로 말이다.

베니는 그런 말을 내뱉고선 미소를 거둬들이는 엘리아나의 입꼬리를 오래 쳐다보았다. 씁쓸함이 잠시 맴돌았다가 사라진 그 모습을 말이다.

***

엘리아나는 오랜만에 도서관을 향했다.

문지기는 조셰프였다. 조셰프는 엘리아나를 보자마자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작가에 도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터였다. 그의 눈엔 짙은 동정과 연민이 보였다. 엘리아나는 그 감정이 싫지 않았다. 그건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엘리아나는 일부러 화장기 없는 얼굴에, 드레스 중에서도 가장 얌전한 드레스를 골라 입은 참이었다. 마치 그날 카르만 헌터가 자신을 그렇게 면박 준 이후로 심하게 상처받은 것처럼 말이다.

“부인.”

“조셰프, 오랜만이네.”

“며칠 영지 순찰을 맡아서 돌고 어제 돌아왔습니다.”

“그래. 따라 들어와 주겠어? 따로 하고 싶은 말도 있고.”

“…….”

“꽤 보고 싶었거든. 그대가.”

조셰프는 옆에 서 있는 다른 위병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처연한 그녀의 표정에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아나는 지금의 행동이 상처받은 남작 부인이 위병과 놀아났다는 소문으로 퍼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그것을 원하기도 했다.

어차피 사실이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엘리아나는 몸과 마음이 외롭지 않았다. 불꽃 같은 야망이 가슴에서 이글거릴 뿐이었다.

도서관의 문이 닫히자, 엘리아나는 습관처럼 도서관의 창을 환히 열었다. 그러고선 창틀에 앉아서 조셰프를 나른하게 보았다.

“나에 대해서 뭐라고 소문이 나 있지?”

“그것이…….”

“솔직하게 말해 줘. 조셰프 말곤 내게 이런 소식을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조셰프는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그는 차마 엘리아나를 쳐다보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남작 부인이 사교 파티에서 큰 망신을 당하게 되실 거라고……. 구경하러 가고 싶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불쌍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요.”

“또.”

“또… 곧… 쫓겨나시고 다섯 번째 부인이 들어올 거라는 소리도…….”

조셰프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 이야기들이 별것이 아니라는 듯이 바깥을 바라보면서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셰프는 그 소문 중 어디까지를 믿어?”

“전, 저는……!”

“그대는?”

엘리아나가 나른한 시선으로 조셰프를 보았다. 조셰프는 분하다는 듯이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말했다.

“부인을 지키고 싶습니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이라도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요. 제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분할 뿐입니다.”

“그 자리에 네가 있었더라면, 뭘 해 줄 수 있었는데?”

“큿…….”

조셰프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면, 틀렸어.”

“부인.”

“그대는 존재만으로도 내게 힘이 돼. 내 편이라곤 한 명도 없는 이 남작가에서.”

“…….”

조셰프의 눈동자가 더 짙어진 충성으로 빛났다. 엘리아나는 사람의 신임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파티에서 나를 경호해 줘. 조셰프.”

“…….”

“난 그대가 필요해.”

언제고 대체될 수 있는 한 명의 위병이 아니라, 특별한 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그것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부탁할 때는 말이다. 다름 아닌 엘리아나 본인이 느껴 봤던 감정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조셰프가 무릎을 꿇었다. 엘리아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다시 밖을 보았다. 역시 몸으로, 경험으로 얻은 지식은 틀리지 않았다.

산책 중이던 카르만 헌터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엘리아나는 가슴께에 살포시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도서관의 창문에서 떨어져 나와 창문을 굳게 닫았다.

“갑자기 창문은 왜 닫으십니까, 부인?”

“남작께서 불쾌해하시는구나. 산책하다 나를 보신 모양이야.”

“…….”

조셰프의 눈썹이 아래를 향했다. 그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남작에 대한 노골적인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카르만의 시선에선 불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빛나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아나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조셰프가 단단히 결심한 듯이 말을 이었다.

“만일 부인께서 이 남작가를 떠나신다고 해도.”

“…….”

“제게 한 푼의 봉급도 주시지 못한다고 해도.”

“…….”

“저는 로즈 가문을 따르는 병사가 되겠습니다.”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조셰프의 어깨를 쥐었다.

“고마워, 조셰프. 진심으로 기뻐.”

“…….”

“앞으로 누군가 내가 빈털터리로 이 남작가에서 쫓겨날 거라고 한다면 헛소문이라고 일침을 날려 줘. 나는 적어도 그대라는 충직한 기사를 얻게 될 테니까.”

“기사…….”

조셰프가 입술을 꾹 물었다. 한낱 위병이 꿈꿀 수 없는 자리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더 높은 자리에서 나를 모시겠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렇지만…….”

“나는 그대를 기사로 만들 거야.”

“…….”

“그러니 그대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두도록. 로즈 가문을 지키는 최고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 말이야.”

엘리아나는 똑 부러지게 말을 하고선 한 걸음, 한 걸음 더 꼿꼿하게 나아갔다. 마치 짓밟히고 상처받아서 더 성숙해진 어떤 여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엘리아나의 속에서는 어려운 계산이 바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존을 향한 치열한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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