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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21)

14화

쨍그랑.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샤르헨의 방에서 울려 퍼졌다.

샤르헨은 샤워 가운을 풀지도 않은 채로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장미가 가득 찬 욕조에서 여린 살결을 조심조심 다듬었던 시간이 무색해졌다. 하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샤르헨은 의복사가 밤새 만들어 온 드레스를 모조리 찢어 버릴 기세였다.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엘리아나 로즈 따위가 나와 같은 의복사를 쓴다고? 싫어! 싫다고!”

“샤르헨 님! 진정하세요. 샤르헨 님……!”

“진정 못 해! 싫어!”

샤르헨은 머리카락을 다듬기 위해서 꺼내 놓았던 미용 가위를 들고선 자신의 진줏빛 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인 아름다운 백조들이 가위질에 갈가리 찢어졌다.

샤르헨은 예쁜 얼굴이 벌겋게 익도록 울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르만이 변하고 있었다. 분명 엘리아나의 그 발칙함에 마음이 동한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그 풍만한 가슴과 도회적인 얼굴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도 남자다 보니, 그런 쪽으로 눈이 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샤르헨과 카르만은 아주 예전부터 약속한 사이였으니까.

그가 길거리에 혼자 버려져 있던 자신을 구해 준 그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되었다. 이제껏 그 마음이 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남작 부인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제리크 헌터가 자신을 못살게 굴어도 도망가지 않고 버텼던 이유도 그것 하나였다.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 그것이 연민이든, 동정이든 상관없었다. 카르만에게 그런 감정을 받는 여인은 오직 샤르헨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감정이 둘로 쪼개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나을 게 없는 가난한 여인에게 말이다.

“메이.”

“네. 샤르헨 님.”

“페페에게 가서 전해. 샤르헨은 울다 지쳐서 쓰러져 잠들었다고. 남작님께서 함께 골라 주시지 않는다면 이 샤르헨 헌터에겐 파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랬다고!”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게 다 그 여우 같은 엘리아나 로즈 때문이야! 그 눈물은 전부 쇼라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마녀가, 감히 우리 사이를 뒤흔들어?”

샤르헨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 어떤 여인이 와도 견고했던 그와의 사이가 고작 그 발칙한 계모 때문에 뒤집힌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아아악!!!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절대 의복사를 그녀의 방에 들이지 마. 절대!”

“네, 샤르헨 님.”

시녀장 메이는 고개를 숙이고선 구석에 있는 르잔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지기 전에 알아서 잽싸게 샤르헨의 방을 나섰다.

남작 부인이 새로 오고 나서 이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가엾은 르잔 자신의 목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승기는 엘리아나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게 아닐까? 카르만 남작의 총애가 끝나는 순간, 샤르헨은 르잔과 다를 바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 그녀 자신은 그 사실이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샤르헨의 하녀들은 모두 그녀를 우러러보면서도 마음 한편에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만약 카르만이 조금 더 여자를 밝혔다면, 그 자리는 자신들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는. 가주인 제리크 헌터가 조금만 더 모진 사람이었다면, 샤르헨은 자신들과 함께 남작가에 숱하게 쌓이는 빨래나 하며 지냈어야 할 운명이었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엘리아나 로즈한테 신임을 얻어서 살아 나가는 수밖에 없어. 이젠 샤르헨은 끈이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야.’

눈치가 빠르고 셈이 빠른 르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리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

엘리아나는 자신이 방에서 책을 읽는 사이 벌어진 한바탕의 소란을 전해 듣고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웬 바보들의 행진이란 말인가.

르잔은 엊그제까지 눈물을 짓던 남작 부인이 오늘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깔깔 웃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이 눈물을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아주 크게 웃었네. 고마워, 르잔.”

“부, 부인…….”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작의 마음은 변한 게 아니야. 남작이 나를 대하는 걸 봤잖아? 그는 그저 나를 이용해서 한심하고 어린 자신의 애인을 정신 차리게 하고 싶은 거지. 제리크 헌터가 언제까지 이 이상한 남작가를 두고 볼 것 같아?”

“가주님께서요?”

“예의 주시하고 있을 거야. 아마 샤르헨이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든 그녀를 없앨 테고. 카르만은 그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지.”

엘리아나는 그럴듯한 가설을 지어 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상상해 이야기를 꾸며 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물론 카르만이 왜 갑자기 변덕을 부렸는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오롯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듯이 눈동자를 굴리는 르잔 앞에서는 이런 얘기가 필요했다. 엘리아나는 아직 르잔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쉽게 말해, 르잔이 샤르헨에게 아직 붙어 있을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남작은 아직 샤르헨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엘리아나 로즈가 아니라 샤르헨 쪽에 바짝 붙어서 움직여야 한다고 말이다.

르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분명히 이 문을 열기 직전까지 엘리아나의 마음에 쏙 들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엘리아나의 손바닥 위였다. 엘리아나는 해탈했다는 듯이 연기를 이어 갔다.

“내가 그 꼴을 당하는 걸 보고도 그렇게 생각하다니, 연인들의 사랑싸움이란 한심하다니까.”

“…….”

“난 의복사를 부르지 않을 거라고 샤르헨에게 전해. 만약 남작이 나를 괘씸히 여겨 당일에 드레스가 도착하지 않으면? 난 또 한 번의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아.”

반쯤은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카르만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 남작가에는 베니를 제외하고선 자신의 사람은 없었다.

위병 조셰프가 제 역할을 잘해 주고 있긴 했지만, 그는 힘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지금 자신이 더 높게 도약하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려야 할 때란 걸 알았다.

“남작님께서 그렇게까지… 치졸하게 하실까요?”

르잔의 물음에 엘리아나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치가 빠르네, 엘리아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르잔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사랑놀이에는 모두 치졸해지는 법이지. 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아. 창피함은 엊그제 겪은 걸로 충분하지. 불쌍한 남작 부인. 안에서는 이렇게 치이고, 밖에서는 계모라고 치이고.”

“…….”

“어서 나가 봐. 샤르헨이 지금 가장 궁금해할 소식을 르잔 너 혼자 알고 있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부인!”

르잔은 눈치를 보더니 잽싸게 엘리아나의 방을 나섰다. 엘리아나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리나케 뛰어가는 르잔의 뒷모습을 살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 엘리아나는 책을 덮었다. 카르만 헌터의 변심은 무슨 일인 것일까? 그날 있었던 쇼로 떨어진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일까? 그렇게 치자면 값싼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위신에 신경 쓰는 이였다면,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뭐야? 후회라도 한다는 거야?”

엘리아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카르만 헌터는 차갑고 냉혈해 보이지만 은근히 속내가 여린 면이 있었다. 그러니 샤르헨에게 잡혀서 이렇게 신세를 죽 쑤고 있는 것이었다. 첫 번째 결혼했던 가문과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면 벌써 작위가 바뀌었을 것이었다.

귀족들의 결혼은 으레 그랬다. 작위를 올리고, 재산을 부풀리고, 영지를 늘린다. 눈물 나는 사랑 이야기 따윈 없었다. 결혼이란 일종의 거래였고, 하나의 사업이었다.

카르만 헌터가 일개 가난한 귀족인 로즈 가문과 연을 맺었어야 했다는 것부터가 결혼 사업에 소질이 없단 뜻이었다.

결혼 사업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로 잘나가는 귀족은 없었다.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 끝에 샤르헨이 이 자리에 앉더라도, 그가 헌터 가문의 가주가 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명제였다.

“하여튼 부잣집 도련님들은 물러 터져서.”

엘리아나는 카르만 헌터의 호의를 훌훌 털어 내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지개를 한껏 켠 그녀는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틀었다. 사교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디자인도, 색깔도, 장식도 말이다.

엘리아나는 오래된 책에 그림으로 그려진 드레스를 보았다. 40년 전, 어거스타 테네브 공작 부인의 첫 사교계 데뷔를 알리는 드레스였다. 그때만 해도 재상의 딸이었던 그녀는 당대에 가장 유행하는 아이템들을 모아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금은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기록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해진 것은 보수적인 성향의 테네브 공작과 결혼한 이후였다.

몇 년 전, 테네브 공작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결혼 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른 남자와 춤조차 춰 본 적 없는 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를 이번 파티의 목표로 삼았다. 그녀는 비록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하진 않았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또한 그녀와 친해져야만 닿을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녀와 단숨에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40년 전 그녀의 드레스를 그대로 입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여자가 여기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엘리아나 로즈는 화려한 드레스의 장식을 따라 그리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이것만으론 부족하리란 걸 알았다. 대놓고 뀌는 알랑방귀는 잠깐의 주목만 이끌 뿐이었다.

엘리아나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각인되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녀의 아들과도 닿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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