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집사 페페는 카르만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카르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에 있는 헌터 가문에서 내려온 일들을 처리했다.
남작가 내부의 일은 페페가 전담하고 있었기에 카르만은 보고된 내용만 파악했다. 그렇게 해도 일은 많았다. 원래라면 남작 부인이 맡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샤르헨은 그럴 역량이 되지 못했고, 엘리아나에게는 줄 수 없었다.
카르만이 일에 집중할 때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묘하게 말이다. 무언가 어색한 듯한 느낌이었다. 카르만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모셔 왔던 페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고민에 빠졌다.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음 안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가 잡은 문서를 한 시간째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페페는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유려하게 움직이던 펜을 멈추고선 입을 뗐다.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샤르헨 님 말씀이십니까? 지금 피부 관리를 받고 계십니다. 정기적으로 관리사가 오는 날이지요.”
“아니. 샤르헨 말고.”
“샤르헨 말고 누구를…….”
“엘리아나. 엘리아나 로즈.”
“아! 부, 부인께서는…….”
아뿔싸. 큰일이었다. 페페는 엘리아나가 무얼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카르만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페페는 급하게 하인에게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라고 시켰다. 카르만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놀리시려는 걸까?! 아니면 엘리아나가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게 내가 감시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뭐지?’
페페는 속이 불편했다. 점심때 먹은 소시지가 장에 꽉 낀 것처럼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서둘러 카르만의 서재를 나섰던 하인이 돌아와 페페에게 귓속말했다. 페페는 하인에게 들은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다듬어 그에게 보고했다.
“부인께서는 오늘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도서관에도 가질 않고?”
“네. 식사도 모두 방에서 하셨다고 합니다.”
“무얼 먹었지?”
“네?”
두 번째 아뿔싸였다. 남작 부인의 식사는 페페가 사사로이 챙기지 않았다. 그녀가 알아서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주문할 뿐만 아니라, 까다로웠던 지난 부인들과 달리 무엇을 준비하든 커다란 불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페는 축축해진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카르만은 손을 저었다.
“됐어. 쓸데없는 걸 물었군.”
“…샤르, 샤르헨 님께서는 오늘 갓 구운 빵 한 조각과 올리브, 아몬드와 우유를 드셨습니다. 후식으로는 콘테르국에서 공수해 온 에끌레어를 드셨습니다.”
“그래.”
페페는 오늘따라 그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샤르헨은 원래 입이 짧으니 식사를 보충하라거나, 영양소를 더 골고루 하라거나 하는 말을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저 짧게 대화를 끝내 버릴 뿐이었다.
페페는 식은땀이 났다. 괜히 자신이 잘못한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남작 부인의 식사를 알아 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카르만이 괜한 것이라고 이미 말했기에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옳지 않았다.
페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카르만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형식적으로 보고 있던 문서를 덮었다.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독해 보였던 엘리아나가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듯이 눈물을 툭 떨궜던 순간이 자꾸 생각날 뿐이었다.
사교 파티에 같이 입장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엘리아나에게 줄 수치심이 어느 정도인지 카르만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의 가문은 이렇다 할 돈도, 명예도 없기에 그가 곁에 있지 않으면 엘리아나는 파티 내내 테라스에나 머물다가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야 했다. 더 이상 엘리아나를 날뛰지 못하게 막아야 했고, 자꾸만 주눅이 들어 힘들어하는 샤르헨의 마음도 풀어 주어야 했다.
카르만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카르만은 그녀의 눈물 젖은 눈동자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의 눈물에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카르만은 다정하지 않았다. 이전의 세 명의 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화가 나게 하기도 하고, 측은해하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보게 만들고, 생각나게 만들었다. 카르만은 불쾌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자신에게는 샤르헨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카르만은 결국 눈을 잠시 감았다.
가난한 가문의 여인을 볼모처럼 데려오면 조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꽤 비겁한 방식이었지만, 카르만은 집안이 더 이상 떠들썩하길 원하지 않았다. 수도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 이상의 소란을 참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카르만의 잘못된 계산이었다. 엘리아나 로즈는 제 머리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자 하는 여자였다. 대범했고, 영리했고, 매혹적이었다.
어쩌면 남작 부인에 어울리는 것은 샤르헨이 아니라 그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제 연인은 될 수 없었다. 자신에겐 샤르헨이 있으니까.
카르만은 자꾸만 엘리아나가 넘어오려고 하는 선을 더 단단하게 그으려고 애썼다. 그만큼 샤르헨에게 더 잘하려고 했고, 엘리아나에게 더 냉정하게 대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이 이렇게도 불편한 것일까. 카르만은 괜스레 자신의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카르만의 눈치만 보던 페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무거운 공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그… 샤르헨 님께서 오후에 의복사와 함께 맞춘 드레스를 보여 주겠다고 하시는데, 몇 시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게 오늘이었나.”
“네.”
페페는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신이 나 대답했다. 자고로 아름다운 것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물며 카르만의 정인인 샤르헨은 원래도 아름다웠다. 그녀가 비싸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은 카르만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었다.
“샤르헨 님께서 무척이나 애쓰신 덕에 드레스도 총 네 벌밖에 되지 않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
“평소 같았으면 열 벌 정도를 맞추셨을 텐데, 이젠 남작가의 재산에 도움이 되겠다면서 절반도 넘게 줄이셨지 뭡니까. 너무 기특하시지요? 이제 어엿한 남작 부인이 되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페페가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는 카르만이 이 소식을 기뻐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카르만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엘리아나 로즈는 몇 벌을 맞췄지?”
“네?”
“다시 한번 질문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다만 부인께서는 의복사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파티엔 뭘 입고 가지?”
“그, 그것이… 시녀장과 함께 만든 드레스를 입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자세히 어떤 걸 입으시는지는…….”
“왜 그렇게 되었지?”
“네?”
페페는 카르만의 질문에 진땀을 뺐다. 왜 그렇게 되었냐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남작 가문의 재정은 카르만이 점검하고 있었지만, 지출 관련해서는 페페가 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남작가에서는 샤르헨이 비공식적인 안주인과 다름이 없었기에, 그녀에게 배당되는 금액이 컸다. 즉, 그녀의 사치는 언제든 용납이 되었다. 하지만 허수아비인 엘리아나 로즈는 달랐다. 거기에 그녀의 몫으로 책정된 적은 금액 대부분은 가난한 그녀의 집안으로 송금되곤 했다.
페페는 카르만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도 파악하지 못했다. 무엇이지? 엘리아나 로즈를 곤란하게 할 만한 거리를 더 던져 달라는 것일까? 페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런 것이라면 할 말이 있었다.
“워, 원래 그렇지요. 이전에 세 명의 부인께서도 모두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모두 격식 있는 집안들이었기 때문에 헌터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알아서 준비하셨습니다. 하지만 로즈 가문은 아시다시피 털어도 귀리 한 알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난하니, 저도 걱정이 큽니다. 헌터 가문에 누가 되진 않을지…….”
“페페.”
“네, 남작님.”
“그런 일이라면 내가 미리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경 쓰는 게 자네 일 아닌가?”
“아앗. 남작님. 그것……. 그것이 아니오라.”
“그녀에게 의복사를 불러다 줘.”
“…….”
“그녀가 아무리 이름뿐이라도 남작 부인이라는 걸 잊지 말고.”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카르만은 말을 마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페는 땀에 전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그를 따랐다.
카르만은 정원에 나가 익숙한 산책 코스를 따라 걸었다. 페페는 당황하긴 했지만, 별다른 일이 아니겠거니 싶은 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그러다 그의 걸음이 멈춘 곳에서 다시 땀을 흘렸다.
다름 아닌 도서관이 보이는 산책로였다. 도서관의 창문은 엘리아나의 닫힌 마음처럼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페페는 카르만의 시선이 닫힌 창문에 닿아서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카르만의 입술이 열렸다.
“샤르헨에게 전해.”
“네, 네!”
“파티 드레스는 무엇을 입어도 좋다고.”
“네? 남작님 그 말씀은… 샤르헨 님의 드레스를 함께 고르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샤르헨은 무엇을 입어도 아름다워. 굳이 그중에 한 벌을 꼽지 않아도 돼.”
카르만의 말은 단호했다. 페페는 이 일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샤르헨이 서운함에 엉망으로 우는 모습을 떠올리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페페는 조만간 이 남작가에 큰 지각 변동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