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21)

12화

다음 날 엘리아나는 일부러 방 밖을 나가지 않았다.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부탁해 마시고선 베니가 가져다 준 책을 읽었다.

모든 건 쇼였다.

웬만한 일에는 더 펄쩍 뛰던 엘리아나도 첫 사교계 데뷔가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상심을 했다는 표시였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이런 정도 역시 예상했다. 샤르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과 카르만이 함께 입장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이 민심을 사듯이, 남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로부터 낯선 남작 부인에 대한 동정표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귀족이고 계모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자.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집안에서 시집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속내는 가녀린 여자. 엘리아나는 그런 여자 ‘엘리아나 로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실제로 엘리아나에게는 타격감이 전혀 없었다. 물론 카르만의 행동이 분하고 화가 나긴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다음 행동을 위한 더 귀한 밑거름이 되어 줄 뿐이었다.

보란 듯이 이곳에서 당당하게 나가리라. 부와 명예를 쥐고선 이 헌터 가문을 발밑에 둔 채로 당당하게 떠날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과 눈조차 못 마주치도록 높은 곳으로 갈 것이었다.

카르만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결혼했다고 모두가 그에게 반할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물론 헬렌이 그에게 진심으로 반했으며, 그녀 외에 다른 아내들도 그의 외모나 재력, 명예와 성격에 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들의 이야기였다.

엘리아나 로즈는 달랐다. 카르만 헌터는 엘리아나의 야심에 불을 지를 수는 있을지언정, 상심이나 연심에 불을 지르진 못했다. 엘리아나에게 카르만은 그저 남 편. 남의 편이었다. 무찔러 마땅한 전쟁터의 적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이 준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동전의 양면은 모두 앞면이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혹시라도 잘못 읽지 않도록 준비해 둔 질리언의 배려에 피식, 웃었다.

“엘리,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거야?”

“아니. 그 무뚝뚝한 해군 녀석이 꽤 귀여운 짓을 했잖아.”

엘리아나는 동전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베니는 동전을 앞뒤로 돌려 보고선 씩 웃었다.

“그래서 이 귀여운 해군 도련님을 어떻게 써먹을 건데?”

“아직은 비밀이야. 조금 더 연구를 해야 해. 누구에게 그 귀여운 남자를 인사시킬지.”

“정말 같이 입장할 거야?”

엘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교 파티에 엘리아나는 질리언 허트, 헬렌 허트 두 사람과 함께 입장하진 않을 것이었다. 다만 입장 후에 같은 무리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카르만의 전 부인인 헬렌 허트의 사교계 복귀를 알리는 신호를 현재 부인인 엘리아나 로즈가 돕는 것이었다.

스캔들이 거리 곳곳에 퍼져 있는 지금, 질리언과 둘이서만 입장한다면 부정한 여인네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입장은 달리하고, 셋이 함께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리고 엘리아나가 헌터 가문에서 완전히 모욕받고 있으며, 복도에서 오열했다며 소문이 와전되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오열했다고 소문날 것까진 아니었는데, 사람들의 과장은 너무 심해.”

“나야 고맙지. 이 소문이 거리에 닿을 때쯤엔 나는 울다 지쳐 쓰러진 여인이 되어 있을걸?”

엘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고선 책장을 넘겼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독 있는 꽃을 다루는 방법』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다른 내용이었다. 몇십 년간 꾸준히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가문에 대한 고급 정보였다.

엘리아나는 이미 학습을 통해 많은 가문의 영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명한 부인들의 취향과 습관까지도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더 학습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사교 파티에 흥미가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런 것과는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아나가 필요한 사람들은 사교계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을 통하고, 또 통해서만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고귀한 얼굴들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

엘리아나 로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실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베니는 옆에서 납작한 복숭아를 깎았다.

“내일 내가 정말 집에 다녀와도 되겠어?”

“응. 베니 말고 내가 누굴 보내겠어. 집안의 사정을 잘 파악해 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네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그 르잔이라는 계집애도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이 집안은 뭔가 음산해. 어제 그 일이 있었을 때도 누구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았잖아.”

베니는 정말 속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난한 귀족에게 천대는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아나 로즈는 이제 어엿한 남작 부인이었다. 베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엘리아나는 적당히 식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말을 이었다.

“베니.”

“응.”

“우리가 거실에서 함께 보냈던 겨울을 기억해?”

“그걸 어떻게 잊겠어.”

지독한 가뭄이 들었던 어느 해. 로즈 가문은 유난히 힘든 겨울을 보냈었다. 집 안은 바깥과 온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추웠고, 심지어 여기저기 보수되지 않은 틈 사이로 바람이 들이닥쳤다.

가족들은 모두 얼마 되지 않는 땔감으로 불을 붙이고선 모든 옷가지와 이불, 담요를 들고 와서 거실에 동그랗게 모여서 지냈다. 그곳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잤고, 일도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귀족의 체면 따위는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엘리아나는 자신의 허벅다리에 꼭 붙어서 자는 어린 동생들을 피부로 느끼며 삯바느질을 했다. 그때 자신의 옆자리를 채웠던 것은 베니였다.

“난 다신 그날의 겨울을 맞이하게 하지 않을 거야. 너에게도. 내 부모와 동생들에게도.”

“엘리…….”

“그 대가가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나는 기꺼이.”

“…….”

“몇천 번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엘리아나의 맑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는 숱한 세월로 단련된 맷집이 있었다. 가난은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영리하게 만들었다. 베니는 그런 엘리아나의 눈을 바라보고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내가 괜히 약한 소릴 했어. 넌 다름 아닌 엘리아나 로즈인데 말이야.”

“넌 이곳에 하나뿐인 내 편이야, 베니. 그러니까 날 대신해서 우리 가족들을 보고 와 줘. 난 그동안 조금 더 준비해 둘게.”

“가족들은 걱정하지 마. 그런데 준비라니?”

“네가 돌아오면.”

“내가 돌아오면?”

“우리는 허트 가문에 방문할 거야.”

엘리아나의 말에 베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선 목소리를 한껏 줄인 채로 말을 이었다.

“뭐라고? 엘리, 너 괜찮은 거 맞지? 서점에서처럼 비밀스러운 만남을 갖는 게 아니라, 그냥 허트 가문으로 간다는 거야? 그 카르만 헌터가 가만 있지 않을 텐데…….”

“가만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엘리.”

“그게 너무 궁금하지 않아?”

“넌 정말.”

베니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엘리아나는 키득거리면서 웃더니 주변을 둘러보고선 말을 이었다.

“파티 전에 헬렌을 실제로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싶었어. 그런데 이 바보들이 나한테 기회를 주지 뭐야. 그러니 따를 수밖에.”

엘리아나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질리언 허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헬렌 허트의 환심을 사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편지로 교류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카르만이 자신을 그렇게 박대하지 않았더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노력도 필요 없었다.

카르만의 전 부인들도 보였던 행보였다. 물론 그녀들은 샤르헨과 카르만의 관계가 진짜인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얻으러 간 것이었지만 말이다.

엘리아나는 조언이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헬렌이 자신보다 더 천대당한 네 번째 부인에 대한 동정을 갖는다면, 그것보다 더 천군만마 같은 것은 없었다. 질리언 허트가 제 일에도 함께 분노해 준다면 금상첨화였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헬렌의 마음을 얻어 내고 이 저택에 나올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으니 말이다.

베니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흥미가 가득해진 엘리아나를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집에 가면서 허트 가문에 전달할 편지를 써 놓는 게 좋겠어.”

“정확하게 지금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야.”

“엘리, 한 가지만 약속해.”

“어떤 약속?”

“네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베니가 진지한 눈동자로 엘리아나를 보았다. 베니는 알고 있었다. 엘리아나 로즈는 누구보다도 자기 가족을 위해서 희생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잃더라도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 정도로 담이 크고 위대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베니는 엘리아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녀의 곁으로 온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실제로 보고 나니, 그녀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고, 베니의 걱정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다.

“걱정하지 마, 베니. 난 내 가족을 사랑해.”

“…….”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 자신도 사랑해. 베니가 걱정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게. 장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로즈 가문에서는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때만 ‘장미의 이름을 건다’라는 표현을 썼다. 가난한 귀족이지만 자신들의 가문을 그만큼이나 사랑하고, 아낀다는 표식이기도 했다.

베니는 엘리아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나도 장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

“내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너를 죽음으로부터 지켜 내겠다고.”

베니의 다짐은 단호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엘리아나는 자신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장미의 이름 앞에서 자신에게 복종을 맹세하게 할 자신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