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엘리아나는 남작가에 도착하자마자 카르만 헌터와 마주쳤다. 그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오?”
“서점이요.”
엘리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선 그를 지나쳤다. 카르만 헌터라는 남자에게는 철저한 무관심이 답이었다.
애인을 수양딸로 올려 놓고 아내를 세 번이나 갈아치우는 남자라니, 형편없는 놈이었다. 이런 놈이 헌터 공작가의 새로운 가주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헌터 가문. 엘리아나는 자신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을 헌터 가문의 가주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샤르헨의 존재를 알고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터였다. 남편의 적이니 내 편 아닌가? 엘리아나는 질리언을 통해서 닿아야 할 다음 상대를 고르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다. 그 사람으로 해야겠어. 엘리아나는 머릿속을 쳇바퀴처럼 열심히 굴리면서 걸음을 뗐다. 그녀를 붙잡은 건 카르만의 음성이었다.
“이번 파티에 우리는 함께 입장하지 않을 것이오.”
“그건 이미 말씀하신 거 아닌가요?”
“아니. 당신은 우리와 한 마차를 탈 수 없다는 뜻이고, 헌터 가문의 이름으로 입장할 수 없다는 것이오.”
엘리아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 말은 헌터 가문에서 그녀의 사교계 데뷔를 공식적으로 돕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아나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선 카르만을 보았다.
“카르만, 당신은 항상 저를 욕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지 마시오.”
“그 말을 꼭 이곳에서 해야 했나요? 이 저택 안에서 고독함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외출하고 돌아오던 지금, 이 순간이요.”
“당신은 외로움 따윈 모르는 여자잖소.”
“누가 그러던가요? 샤르헨?”
“엘리아나. 샤르헨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지 말라고 내가…….”
“아니면 당신인가요? 어느 쪽이든 두 사람 모두 나를 너무 매정한 사람으로 보는군요. 난 이곳에 내 편이라곤 한 명도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어요. 그런데 외로움 따윈 모른다고요?”
엘리아나가 짐짓 슬프다는 듯이 웃었다. 반쯤은 진심이 섞인 웃음이었다. 카르만은 입술을 움찔했다. 하지만 말을 잇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최대한 처량한 척했다. 지금 이곳을 지키는 위병 중에 자신이 부리는 조셰프와 친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더 초라하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조셰프를 움직이는 건 그의 신세와 다를 바 없는 비련한 남작 부인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이 자신에게 아주 요긴한 카드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카르만이나, 샤르헨이 아닌 조셰프를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소모적인 대화는 그만두겠어요. 당신과 달리, 나는 이 저택의 얼굴인 당신을 곤혹스럽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난 당신을 곤혹스럽게 하고 싶은 게 아니오.”
“그런데 왜 사교계에 처음 입문하는 가난한 귀족 출신의 아내를 혼자 입장하게 하겠다는 거죠? 이미 계모로 소문이 나서 샤르헨을 예뻐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아니꼽게 볼 텐데요.”
“…….”
“귀족 여성들에게 사교계가 전쟁터나 다름없다는 건 남작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그런 저보고 맨손으로 싸우라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내뱉어 놓고, 곤혹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고요?”
“당신은 말을 너무 잘하는군. 그렇게 처연한 척을 하면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염문이나 뿌리고 다니는……!!”
카르만이 폭발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높아진 언성에 남작가 안의 사람들이 조금 더 모여들 정도였다. 그중에는 샤르헨 또한 있었다. 처음부터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엘리아나는 코웃음을 겨우 삼키면서 말을 이었다.
“남작께서는 더럽고 허접한 소문들보다 내가 더 미덥지 않은 모양이군요.”
“지금 그 옷차림부터 다시 보고 말하시오.”
“제 옷차림이 어때서요? 저에게 옷을 선물한 적이 있나요? 어떤 차림을 하라고 말해 준 적이 있나요? 그저 샤르헨의 주변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윽박질렀을 뿐이죠!”
허공을 가로지르는 엘리아나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만큼 쓸쓸하게 들리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로 카르만을 똑바로 보고 말을 이었다.
“나를 모함하는 말들과 음해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만 귀를 여는 사람은.”
“…….”
“나 또한 사양이에요. 남작님에게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죠? 저 또한 당신을 그리 생각할 테니 이젠 다신.”
“…….”
엘리아나가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동자로 위병들을 한 명, 한 명, 하녀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았다. 그러고선 마지막으로 샤르헨과 눈을 마주쳤다.
“저를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
“짓밟지 마세요. 남작님께서 그러지 않아도 저는 충분히 굴욕적이니까.”
“당신은 내 말을 모두 곡해하고 있소.”
카르만의 눈치를 보던 샤르헨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에요, 부인. 남작님의 뜻을 곡해하진 마세요. 모두 다 제가 잘못했어요.”
“샤르헨,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엘리아나 혼자 오해한 것일 뿐.”
엘리아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선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당신의 충복들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무엇을 곡해했는지.”
엘리아나는 카르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 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거짓된 눈물이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분했다. 자신이 이렇게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철저히, 매일같이 부서져야 하는 남작가의 하루하루가 무섭고 분했다.
엘리아나는 돌아설 수 없었다. 아픈 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우스운 사랑놀이 따위 철저히 짓밟아 주리라. 엘리아나의 눈물은 그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르만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엘리아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뱉을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엘리아나는 그런 카르만에게 몸을 숙여 인사를 하고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파티에 관한 건은 잘 알겠습니다. 먼저 실례할게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베니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와서 그녀를 부축했다. 엘리아나는 이번엔 진심으로 몸이 휘청였다. 분함에 다리가 떨리고, 몸에 힘이 풀린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베니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선 힘없는 표정으로 방으로 향했다. 이름뿐인 남작 부인의 방이었다. 샤르헨은 예리한 눈동자로 엘리아나를 훑어보았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자신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만 가. 엘리아나.”
베니가 조용히 속삭이자, 엘리아나의 눈꼬리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말은 그저 지금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걸음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엘리아나가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뜻하기도 했다.
엘리아나는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남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남은 위병들과 하인들은 함부로 속삭이지조차 못했다.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만을 쳐다보았다. 샤르헨의 눈동자만이 엘리아나와 카르만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
엘리아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을 깨끗하게 씻어 내고 펑퍼짐한 홈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사이 베니와 르잔은 그녀의 저녁 식사를 차려 놓았다. 엘리아나는 입맛이 없었지만, 딱 한 가지 먹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감자수프였다. 감자는 포만감을 느끼기에도 좋았고, 값도 저렴했기에 로즈 가문에서는 자주 접하는 식재료였다. 하지만 그것을 모든 가족의 메인 요리로 내놓을 때마다 베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더 좋은 요리를, 커다란 칠면조나 윤기가 흐르는 사슴 요리를 올리겠다며 울면서 둘이 함께 다짐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둘의 다짐과는 달리 집안은 점차 기울어만 갔고, 나중에는 감자를 몇 알씩 먹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그때부터 먹었던 게 감자수프였다. 수프라기엔 너무 묽어서 물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감자의 향만 나는 미끌미끌하고 따뜻한 물. 엘리아나는 베니에게 그것이 먹고 싶다고 살짝 말했다.
눈치가 빠른 베니는 제법 근사한 저녁 식사와 함께 감자수프를 가져왔다. 자신이 직접 만든 수프였다. 예전에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먹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였으나, 함께 차려진 다른 음식에 비하면 초라헸다.
엘리아나는 르잔과 베니가 있는 앞에서 연기를 했다. 손을 가냘프게 저으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먹고 싶지 않아.”
“수프라도 드시는 게 어떨까요?”
“다 물려 줘. 먹고 싶지 않아.”
베니는 르잔에게 수프는 어떻게라도 드시게 해 볼 테니 나머지를 다른 하녀들과 함께 치우라고 말했다. 르잔은 알겠다며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접시를 다 치운 그녀가 나가려는 찰나, 엘리아나는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말했다.
“르잔.”
“네, 부인.”
“오늘 일은 남작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 줘. 이건 어떤 속셈도 없이 나의 진심이야. 네가 모시는 샤르헨에게도, 남작께도, 내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니까.”
“…….”
르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아나가 이토록 힘들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르잔은 알겠다면서 대답하고선 방을 나갔다.
엘리아나의 앞에는 모든 게 치워져 있고, 포도 몇 알과 아몬드 몇 개, 그리고 감자수프만 있을 뿐이었다. 엘리아나는 문이 닫힐 때까지 창문을 바라보며 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졌을 무렵에야 감자수프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옛날 허겁지겁 먹던 것처럼은 아니었지만, 남작 부인으로서의 예의는 저 멀리 던져버린 태도였다. 그녀는 스푼으로 수프를 마구 퍼 올려 마셨다. 묽은 수프는 베니의 손맛 그대로였다.
“천천히 먹어, 엘리.”
“배고팠어. 옛날에 먹던 그 빵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빵을 우리가 계속 먹었더라면 로즈 가문 사람들은 모두 이가 부서져서 잇몸으로만 살고 있을 거야.”
베니의 말에 엘리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빵은 딱딱한 것들뿐이었다. 아무리 뜨거운 수프에 적셔도 빵은 좀처럼 부드러워지지 않았고, 다 먹고 나면 턱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먹기가 힘들어서 조금씩 아껴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엘리아나에게 그 빵과 감자수프는 독기를 뜻했다. 자신이 이 남작가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 말이다. 배를 어느 정도 채운 엘리아나는 정신을 차리곤 베니를 보았다.
“베니.”
“응.”
“남작 부인이 오늘 일에 대해서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고 소문을 내 줘. 필요하다면 누군가를 혼내거나 벌해도 좋아.”
“역으로 이용하려는 거구나?”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알이 크고 색이 아름다운 포도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원래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아랫것들은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잖아.”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래에서부터 출발한 그녀는 그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기대되기도 했다. 날개가 달린 듯이 과장되고 부풀려져서 남작가 주변으로 퍼져 갈 비련한 남작 부인의 소문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