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저 엘리아나 로즈, 샤르헨 님에게 큰 무례를 끼쳤습니다. 정말로 송구스럽습니다. 카르만 헌터 남작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깊이 사과를 드리니, 그 말씀은 거둬 주세요.”
무릎을 꿇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세였다. 하지만 화끈해지는 건 카르만 헌터의 얼굴이었다. 그의 치졸함을 모든 하인이 보는 앞에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조금 겁을 주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엘리아나의 대응으로 인해 모든 게 진심이 되어 버렸다.
엘리아나는 지금 가문을 지키기 위해 체통을 저버리고 허리를 굽힌 여자가 되었다. 지금 그녀는 남작 부인이 아닌 그저 가난한 로즈 가문의 장녀일 뿐이었다. 샤르헨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뭐 하는 짓이오! 일어나시오.”
카르만 헌터가 소리치자, 엘리아나는 천천히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샤르헨 님뿐 아니라 하인들, 위병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 이 앞에서 저희 가문의 배를 곯게 만든다고 하신 건…….”
“…….”
“이런 제 모습을 보시기 위함이 아니었나요?”
엘리아나가 말하자, 카르만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오해요. 불필요한 행동으로 구설수를 만들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엘리아나는 평소처럼 말대꾸하지 않고 식탁에 다시 앉았다. 샤르헨은 두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에 눈치를 보다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상황을 잘 모르겠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엘리아나의 기세가 줄어들었단 사실에 내심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샤르헨은 이참에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다신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나 착한 샤르헨의 이미지도 지켜야 했다.
“남작님, 제게 약속해 주신 그것은 다음에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요? 부인께서 언짢으실지도 모르는데…….”
“…….”
샤르헨의 고운 목소리에 카르만이 움직임을 멈췄다. 겉보기에는 카르만의 위세에 엘리아나가 납작 엎드린 것처럼 보였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엘리아나 로즈는 전혀 지고 있지 않았다.
카르만은 이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샤르헨이 눈치를 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이미 식기에서 손을 뗀 채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치 로즈 가문의 목숨 줄을 가지고 카르만이 휘두르는 위력을 모두 본인이 감내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뒤에 선 위병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들 모두 평민이기에, 감정적으로 엘리아나에게 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보통 여자가 아니로군.’
카르만은 순식간에 상황을 쥐락펴락하는 엘리아나 로즈의 능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적으로 만들었을 때, 자신의 손해가 지금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위험한 만큼 매력적인 여자야. 엘리아나 로즈는.’
그는 그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자마자 자기 무릎을 세게 꼬집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신의 여인은 오로지 샤르헨이었다. 카르만은 그 사실을 상기하면서 엘리아나에게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남작님.”
샤르헨은 곤란하다는 듯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 부름은 오히려 그가 빨리 말했으면 좋겠다는 듯한 부추김을 담고 있었다.
“이번 사교 파티에서, 나는 샤르헨과 함께 입장하겠소.”
엘리아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카르만을 보았다.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샤르헨이 마지막 못을 박듯이 말을 이었다.
“부인. 오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서운해하지도 않으셨으면 하고요. 특별히 부인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예요. 그러니 부인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제게 화도 내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고요.”
풀이 죽은 척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과시였다. 카르만이 자기 남자라는 걸 똑똑히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엘리아나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럼 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될까요?”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에 카르만의 눈길이 길게 따라붙었다. 그러자 샤르헨이 그 눈길을 차단해 주고 싶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네, 네. 부인 들어가 보세요. 남작님과 저는 따로 나눌 이야기가 조금 많거든요.”
“그럼 이만…….”
엘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어지럽고, 충격받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감색 드레스가 펄럭였다. 오늘따라 프릴이 적고, 화려하지 않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가냘프게 보이기도 했다.
카르만의 몸이 움찔하자 엘리아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카르만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려는 순간, 엘리아나의 입이 열렸다.
“조셰프.”
“…….”
“괜찮다면 나를 좀 부축해 주겠어?”
카르만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위병 중에 그녀와 염문을 뿌리고 있는 그 위병이 있었다. 카르만은 몹시 기분이 나빴지만, 방금까지 그녀를 폭격하듯이 공격했던 터라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위병 조셰프는 엄중한 표정으로 다가와 엘리아나를 부축했다.
엘리아나는 곡선으로 잘 뻗은 계단을 조셰프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중간에 어지럽다는 듯이 조셰프에게 기대기도 하면서도 말이다.
카르만의 시선이 그 둘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
“고마워, 조셰프.”
남작 부인의 방에 도착한 엘리아나는 소파에 앉아서 머리를 짚었다. 조셰프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부인.”
“응?”
“제가 이 위병을 지나, 더 성장하게 된다면…….”
“…….”
“오늘 있었던 것과 같은 굴욕스러운 일을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 드릴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조셰프는 마치 자신이 모욕받은 것처럼 진중한 눈빛이었다. 엘리아나는 힘없이 웃으면서 조셰프에게 말했다.
“소중한 동지의 약속을 받아들이겠어. 나 역시도, 그대를 위병의 자리에 머물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서로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고.”
“네.”
그녀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조셰프는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듯이 무릎을 꿇고, 그 손등 위에 짧게 키스했다. 그러고선 붉어진 볼을 감추며 방을 떠났다.
조셰프가 떠나고 문이 닫히자, 엘리아나는 힘없던 표정을 싹 거둬 냈다. 오늘 석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미리 알고 있었다. 르잔이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서 가져온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태까지 헌터 가문을 거쳐 간 모든 남작 부인들이 사교 모임 자리에 남작과 함께 참석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구설수가 되어도 카르만과 샤르헨이 그동안 사이좋은 부녀라는 핑계를 대 왔다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로즈 가문의 지원을 멈추겠다는 것은 엘리아나를 크게 자극한 것이었다. 르잔은 실제로 그런 이야기가 샤르헨의 입에서 나왔고, 카르만이 그녀에게 직접 약속했다는 소식을 말해 주었다. 엘리아나는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련의 연기를 짠 것이었다.
“내 연기 어땠어?”
엘리아나가 부드럽게 묻자 베니가 그녀의 머리에 있는 화려한 장식을 떼 주면서 말했다.
“연기였지만, 진심이 느껴져서 슬펐어.”
“베니는 역시 못 보는 게 없구나.”
“우린 그만큼 절박하니까.”
로즈 가문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베니 역시 손을 부들부들 떨었었다. 이 가문에 들어온 대가로 겨우 치료를 제대로 시작한 엘리아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힘없이 웃으며 베니에게 머리를 기대고선 말을 이었다.
“질리언에게 답장이 왔어?”
“응. 내일 세 시, 부둣가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엘리아나는 그 말에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베니는 어떻게 생각해? 질리언이 내 제안을 승낙할까?”
베니는 그녀와 비슷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승낙하지 않으면 바보지.”
베니의 말에 엘리아나는 더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선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내일 외출에 입을 드레스를 골라 볼까.”
“내가 만든 남색 드레스를 봐 줘.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들었으니까.”
“어디 베니 실력 좀 볼까?”
엘리아나는 소녀처럼 웃으면서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질리언 허트를 사로잡을 전투복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
약속 시각보다 이르게 서점에 도착한 엘리아나는 책을 몇 권 샀다. 늙은 귀부인들이 쓴 교양에 대한 서적이나, 자서전, 꽃을 가꾸는 방법 같은 책이었다. 그저 소일거리를 대신하여 낸 책들이었지만, 엘리아나는 이 책에서 사교 모임의 힌트를 찾고 싶었다. 한마디로, 잘 보일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르잔은 엘리아나가 산 몇 권의 책을 들고선 먼저 남작가로 향했다. 베니는 르잔이 나간 뒤, 몇십 분이 지난 후에야 서점으로 들어왔다.
엘리아나는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몇 권의 책은 사지 않았다. 어차피 중간에서 샤르헨이 확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책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시녀장인 메이나 곁에 있는 수족들이 읽고 핵심만 알려 줄지도 몰랐다.
엘리아나는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그녀가 책의 2/3 정도 읽었을 즈음, 낮은 목소리의 남성이 그녀의 옆에 서서 책을 집었다.
“듣던 대로 해괴한 차림이군요, 헌터 부인.”
“칭찬으로 듣겠어요, 질리언 경.”
“듣던 대로 괴짜이기도 하군요.”
“네, 하지만 한 가지 정정하죠.”
“무엇을?”
엘리아나가 다른 책을 찾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금세 질리언과 엘리아나의 얼굴은 가까워져 있었다. 질리언이 몸을 뒤로 젖히려고 하자 그녀가 손등으로 질리언의 옷깃을 스치고선 그의 바로 앞 책장에 꽂힌 책을 집으면서 말했다.
“난 헌터 부인이 아니에요.”
“…….”
“엘리아나 로즈입니다.”
그녀는 부드러운 뱀처럼 빠져나와서 질리언과 눈을 잠깐 마주쳤다. 엘리아나는 집어 든 책을 계산할 듯이 챙기고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동전은 앞면인가요, 뒷면인가요?”
만남을 요청하는 편지에 암호를 적듯이 써 놨었다. 앞면은 제안을 수락하는 것, 뒷면은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 책을 계산하면서 확인하시죠.”
“좋네요.”
계산대로 간 엘리아나 로즈는 책을 건네었다. 돈은 주지 않았지만, 거스름돈이 서점 주인에게서 나왔다.
엘리아나는 그것을 손에 쥐고선 베니와 함께 서점을 나섰다. 그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동전은 앞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