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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21)

9화

“뭐? 어디서 편지가 왔다고?!”

허트 가문은 질리언의 고함으로 아침을 열었다. 원인은 사랑하는 여동생 헬렌의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였다.

헌터 가문의 인장이 찍힌 붉은 실링 왁스를 노려보던 질리언 허트는 찢어 버릴 듯이 편지를 열었다. 정작 수신인인 헬렌은 오빠의 곁에서 서성일 뿐이었다.

“친애하는 헬렌에게? 이 미친 바람둥이 자식이.”

“그… 보…보내신 분은 카르만 남작이 아니라 새로 온 남작 부인입니다.”

“뭐?”

“변두리에 있는 로즈 가문의 장녀입니다. 엘리아나 로즈라고,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괄괄한 성격의 질리언은 ‘흥’ 하고 열을 내뿜고선 편지를 훑어 내렸다. 자신 역시 헬렌과 마찬가지로 첫날밤에 엄청난 사실을 통보받았으며, 악독한 계모로 몰려 괴로운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헬렌이 남긴 일기나 흔적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고 있으며, 사교 파티에서 꼭 한번 헬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질리언은 계모 엘리아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첫날부터 샤르헨의 뺨을 때렸다고 했던가, 머리채를 잡았다고 했던가. 어찌 됐든 ‘독한 여자가 들어와서 쌤통이다’라며 웃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헬렌처럼 상처를 받고 있었다. 질리언은 그녀의 절절한 편지를 더 읽지 못하고 헬렌에게 넘겨 주었다. 헬렌은 말없이 편지를 꼭 붙들었다.

헬렌은 카르만과의 이혼 이후로 사교 모임에 잘 나서지 않았다. 원체 내향적이었던 성격이 이혼 이후로 더 심해졌고, 헬렌 본인도 카르만에 대한 연정을 전부 접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헬렌은 세 장이나 되는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편지를 들고선 망설였다. 질리언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헌터 가문 사람 아니야? 무시해 버려. 내 사랑하는 누이가 그런 것으로 고통받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저는…….”

“…….”

“이분을 만나고 싶어요. 엘리아나 로즈 양을요.”

“사교 파티에 나가겠다는 말이냐?”

헬렌이 망설였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번 만나 보고 싶어요.”

“그건 갈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

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질리언은 내심 기뻤다. 그녀가 계속 저택의 한쪽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집사! 의복사를 부르게. 가장 유행하는 드레스를 다 가져오라고 해!”

“오, 오라버니. 저 드레스는 있어요.”

“사교계에서는 유행이란 게 중요하지 않니? 특히 여자들은 그걸로 치열하게 겨룬다고 들었다. 내 누이의 특별한 외출을 초라하게 만들 순 없어.”

질리언은 아주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콧등을 아주 살짝 톡 하고 쳤다. 헬렌 역시 눈에 띄게 좋아하는 질리언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질리언은 헬렌을 위한 몇 가지를 집사와 시녀장에게 명령하고선 허트 가문을 나섰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해군 함정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질리언은 호방하게 미소 짓던 표정을 지우지 않고선 곁에 있던 보좌관에게 말했다.

“엘리아나 로즈에 대해서 아는 것을 모두 조사해 와.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을.”

“네.”

그는 전쟁터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내이자, 왕궁 내외의 정치질을 오랫동안 목격한 사람이었다. 엘리아나 로즈의 뜻이 어떻든 간에 그녀는 헌터 가문의 사람이었다. 질리언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일터로 향했다.

***

우편배달부가 헬렌이 보낸 답신을 들고 왔다. 베니는 그 답신을 들고선 엘리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쳐 가는 한중간, 그녀와 같은 복식을 한 여자가 베니를 붙잡았다. 샤르헨의 시녀장 메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샤르헨 님의 시녀장 메이입니다. 이 저택의 전체 하녀들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베니는 짧게 답하고선 그녀를 지나쳐 갔다. 메이는 베니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하여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샤르헨 님의 시녀장님께서 저에게 함부로 손을 대시다니 놀랍네요. 시비를 거시는 건가요?”

“고깝게 받아들이지 마시죠. 남작가에 들어오는 모든 우편물은 집사님이나 저를 거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처음 보는 것이군요.”

메이는 당당하게 그녀에게서 헬렌의 편지를 빼앗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베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아나와 함께 로즈 가문을 먹여 살렸던 장본인이었다. 둘은 어떤 궂은일도 함께했었다.

그리고 이곳에 올 때 그녀는 엘리아나의 총과 칼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예전부터 엘리아나는 어려운 형편에도 하녀인 베니가 어디서든 떳떳하게 굴 수 있도록 노력해 주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게다가 베니는 이제 한 단계 더 신분이 상승했다. 자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남작 부인 엘리아나의 시녀장이었다. 그녀는 꼿꼿하게 메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는 당신과 동등한 시녀장입니다. 남작 부인의 명을 직접 받고 있고요. 이 편지는 시녀장인 제가 검수한 것입니다. 그러니 집사와 당신이 검수한 것과 같지요. 그러니 또 한 번의 검수는 필요하지 않죠.”

“이곳은 샤르헨 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내입니다. 가외에서는 모르겠지만, 이 집안의 규정을 따라 주세요. 그러지 못하겠다면 남작님께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내든 가외든 샤르헨 님께서 남작과 부인의 수양 따님인 건 변화가 없지 않나요? 남작께 고자질하세요. 편지 한 통을 뺏지 못해서 고귀하신 샤르헨 님이 성이 나셨다고요. 저도 부인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베니는 불쾌하다는 듯이 말하고선 몸을 확 틀었다. 그러고선 꼿꼿하게 남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시녀장인 메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둥 뒤에는 르잔이 숨어 있었다.

“저 편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샤르헨 님의 방으로 가져와. 그러지 않으면 널 때려죽이겠어.”

“제, 제가 무슨 수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메이는 홱 돌아서면서 샤르헨의 방으로 향했다. 르잔은 울상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

메이와의 소동을 들은 엘리아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의 처신은 옳았다. 엘리아나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는 내용에 따라서 샤르헨에게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어째서?”

베니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엘리아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말을 이었다.

“난 이 집안에서 아무것도 아니거든.”

샤르헨은 계속해서 엘리아나에게 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르만에게 자신의 지위를 회복해 달라고 할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게 무엇이 될지 아직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계속 강하게 나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아나는 앞으로 닥칠 폭풍을 기다리면서 편지를 뜯었다. 안에는 두꺼운 양피지로 만든 편지 두 장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헬렌으로부터, 하나는 질리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헬렌은 편지에 대한 감사로 시작하여 우아한 문장을 늘어놓다가 사교 모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편지가 꽤 길고 촘촘한 것이 그녀의 섬세한 성격을 닮아 있었다.

반면 질리언은 엄포를 놓는 듯한 말투로 ‘네 속셈이 뭔지 모르겠지만, 더러운 작전에 내 여동생을 휘말리게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정중하게 써 놓았다. 글씨체만 단정할 뿐,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한 말투였다.

아마도 엘리아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악독한 계모에 기이하고 관능적인 차림새, 위병들과 놀아난다는 추문까지 말이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이 보낸 편지를 촛불에 태워 버렸다. 그러고선 헬렌의 편지를 봉투에 잘 넣었다.

“한 번 더 메이가 편지를 요구한다면, 이걸 줘.”

“…알겠어.”

“아마 곧 줘야 할 거야.”

엘리아나가 그렇게 말하자, 베니는 덩달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집안은 구조가 확실히 이상했다. 메이의 당당함에 베니가 말을 잃을 정도로 말이다. 기이한 사랑놀이에 껴 버린 엘리아나가 가여웠다. 하지만 그녀는 타 버린 질리언의 편지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었던 르잔이 문 사이로 나타났다. 엘리아나와 베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시선이 엇갈렸다. 르잔의 입술이 열리자, 엘리아나의 시선이 베니를 향했다.

르잔이 다시 남작 부인의 방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허트 가문의 인장이 똑똑히 박혀 있는 편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르잔은 그 뒤에 겹쳐져 있는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선 샤르헨의 방으로 향했다. 이중 첩자로서 깊은 한숨을 삼킨 채였다.

***

석식 시간이 되자, 세 사람은 식탁에서 마주했다. 샤르헨은 엘리아나를 은근히 노려보았지만, 엘리아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듯이 음식을 맛있게 음미할 뿐이었다.

카르만은 두 여자 사이에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잇다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사교 파티에 헬렌 허트를 초대한 건 실수요. 취소했으면 하는데. 엘리아나,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카르만이 조용히 말을 내뱉자, 샤르헨이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얹었다.

“편지를 보셨다면 알 텐데요. 이미 오간 이야기를 무를 순 없어요.”

“내가 반대할 것임을 알면서도 했다는 뜻이오?”

“전 이 집안에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교류하고 싶은 친구와의 편지도 샤르헨의 시녀장에게 바쳐야 하죠.”

“엘리아나!”

카르만이 큰 소리를 내자, 엘리아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카르만을 바라보았다. 카르만은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항상 말로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다니는 고삐 없는 망아지나 다름이 없소. 이 이상 함부로 한다면.”

“한다면요?”

“로즈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을 수밖에 없소.”

엘리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신의 가장 약한 지점이었다.

엘리아나는 표정을 추스르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샤르헨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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