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무슨 생각이지? 대체 무슨 생각이냔 말이야!!”
샤르헨은 머리를 정돈해 주던 하녀의 빗을 뺏어 바닥에 던졌다. 화가 났다. 그녀는 카르만의 전처들과는 달랐다.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샤르헨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싸구려! 천한 것! 더럽고! 촌스러워!”
샤르헨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엘리아나의 화려한 복장을 일부러 욕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아름다웠음을 제 입으로 먼저 인정할 것 같았다.
그 원단은 자신이 본 적 있는 원단이었다. 분명 어디 위병들의 재킷이나 만들 법한 칙칙한 색깔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원피스가 되었을까?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은 풍만했다. 앙증맞게 올라온 엉덩이 아래 넓은 폭으로 퍼진 스커트는 사랑스러워 보였다. 사교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지금 사교계를 주름잡는 것은 당연히 청순미였다. 더 청초하고, 더 가냘프고, 더 하얗게 보이기 위해 모두가 아등바등했다. 옅은 색감의 레이스와 프릴은 기본이었다.
머리 장식도 하나로 묶거나, 반을 갈라서 묶거나, 한쪽으로 내려서 아주 가늘게 땋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모두 어겼다.
결 좋은 머리는 풍성하게 올라가 있었고, 화려한 장식을 꽂아 넣었다. 화장은 또 어떠한가. 최대한 투명하고, 뽀얗게 하는 화장법과 달리 뚜렷하고 화려했다. 누구라도 눈이 먼저 갈 법한 색조였다. 그러면서도 촌스럽지도, 상스럽지도 않았다.
“젠장, 젠장!”
샤르헨은 머리빗을 구둣발로 밟았다. 저녁 만찬 때마다 그녀를 봐야 하는 것도 열이 받았다. 카르만의 시선은 때때로 그녀에게서 잠시 멈춰 있었다. 이전 부인들에게는 없었던 행동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카르만 헌터의 눈길, 손길, 그의 모든 것이 샤르헨의 것이었다.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샤르헨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르잔은 뭐라고 보고했지?”
그녀가 눈빛을 날카롭게 하며 자신의 시녀장인 메이를 보았다. 메이는 눈을 낮추며 익숙하게 대답했다.
“위병 조셰프와 도서관에서 밀회를 즐긴다고 합니다. 게다가 르잔이 첩자 노릇을 하는 것을 알고 있는지, 새로운 시녀장을 뽑았습니다. 본가에서 데려온 사람이고, 이동 시에 르잔을 배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르잔, 그 멍청한 계집애! 티 안 나게 굴었어야지!”
“충성심을 증명하면 곁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증명해 내지 못하면 사교 파티 이후로 해고될 예정입니다.”
“우리 쪽에서 받아 줄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입막음용 퇴직금을 조금 두둑하게 줘야겠지만요.”
“아직 쓸모가 있는데, 그 멍청한 년을 어떻게 엘리아나에게 붙어 있게 만들지? 뭘 증명하라는 거야! 망할!”
“…….”
“의복사를 데려와. 아무래도 드레스를 새로 맞춰야 이 기분이 풀리겠어.”
“이번 달 지출이 너무 크십니다.”
“닥쳐! 메이! 내가 누군지 잊었어? 난 이 남작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야. 내가 쓰는 돈에 카르만이 뭐라고 한 적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만… 남작 부인과 차이가 너무 두드러지게 납니다.”
짜악! 공중을 가르는 마찰음에 하녀들이 어깨를 좁혔다. 시녀장 메이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뺨에 시뻘건 자국이 난 채로 말이다.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지 마. 남작 부인은 나라고!”
샤르헨은 히스테릭하게 말했다. 그녀는 진작에 카르만의 옆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가주는 근본이 없는 샤르헨을 받아 주지 않았고, 그녀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겨우 살아남기 위해서 입양 절차를 거쳐 카르만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지만, 샤르헨은 한 번도 자신이 수양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작 부인이었다. 그의 부인, 이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샤르헨이 씩씩거리자, 메이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실수했습니다. 이해하여 주십시오, 부인.”
“의복사나 불러와. 지금 당장! 최고급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하겠어. 아무도 입지 않은 나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샤르헨은 엘리아나에게 자극받았다는 듯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샤르헨의 방 소속 하녀들은 모두 이런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입을 닫았다.
샤르헨에게 소속되지 않은 하녀들은 모두 그녀가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줄만 알았다. 그녀에게 배속된 하녀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시녀장인 메이는 그중에서도 단연 첫 번째로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 실제로는 샤르헨의 히스테릭한 면모를 가장 많이 보아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메이는 샤르헨에게 묵례하고선 그녀의 방을 나섰다. 그러곤 곧장 카르만 헌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샤르헨은 알지 못했다. 메이는 그녀보다 먼저 이 남작 가문에 입성한, 카르만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
“샤르헨은?”
“엘리아나 로즈가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이지만, 앞으로 조금 더 깨닫는 바가 있을 겁니다.”
“뺨은, 샤르헨이 손찌검한 건가?”
“제 실수입니다. 샤르헨 님 앞에서 엘리아나 로즈를 남작 부인이라고 칭했습니다.”
“그게 실수인가?”
“실수입니다.”
메이는 단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늘 샤르헨의 편이었다. 감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시녀장으로서 자신이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카르만은 객관적인 것을 바라는 듯해도, 샤르헨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을 원했다. 메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카르만은 그녀의 뺨에 붉게 부어오른 흔적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또 의복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사교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듯합니다.”
“샤르헨이 원하는 대로 해 줘. 그럼 조금 더 빨리 이성을 되찾겠지.”
카르만은 약간은 포기한 듯이 말을 이었다. 메이는 알겠다고 답하고선 빠르게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이게 다 남작 부인 때문입니다. 그 순한 샤르헨 양을 자꾸만 자극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요! 오늘만 해도! 그 도서관에서 그런 망측스러운 행동을 버젓이!”
“페페.”
“네, 남작님.”
“시끄러워.”
“…….”
카르만은 그의 조잘거리는 입술을 다물게 한 후에 바깥을 보았다. 엘리아나 로즈는 환하게 웃으면서 한 위병의 품에 안겨 있었다. 행복하다는 듯이 그에게 머리를 기대기도 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발견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남편인 자신이 그 장면을 똑똑히 봤는데도 말이다. 그 당당함에 카르만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신경이 쓰이는지, 카르만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 때마다 그녀는 다른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치장에도 신경 쓰는 편이었지만, 엘리아나는 샤르헨이 쓰는 돈의 1/10에도 미치지 않는 아주 적은 비용만 사용했다. 새로운 시녀장인 베니와 매일 드레스를 만들고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자신이 없이도 완벽한 남작 부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른 부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모두 카르만의 사랑을 원했고, 분해 하거나, 슬퍼했다. 그러나 엘리아나 로즈는 달랐다. 그녀가 당황했던 건 오직 하루. 첫날밤뿐이었다.
눈치 보며 집무실을 나갔던 집사 페페가 슬그머니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작님.”
“시끄럽다고 했을 텐데.”
“이건 꼭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카르만이 집사인 페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뚱뚱한 몸과 대비되게 입술을 조그맣게 말고선 말을 이었다.
“남작 부인께서…….”
“…….”
“질리언 허트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하십니다.”
“뭐?”
카르만이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질리언 허트는 자신의 앙숙이었다. 전처 중 한 명인 헬렌의 오빠이기도 했다.
“어디서 난 정보지?”
“위병 조셰프에게서 돈을 주고 산 정보입니다.”
“하!”
카르만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행복해하며 품에 안기던 남자가 돈을 주고 자신의 정보를 판다는 걸 알고 있을까? 엘리아나 로즈는 똑똑한 듯 멍청했다. 이 사실을 알려 줘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괘씸한 여자였다.
카르만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질리언 허트, 어째서 그일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그녀를 향한 의문은 줄어들지 않았다. 매일매일 늘어나기만 했다.
“좀 더 조사해 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남작님.”
자꾸만 자신을 궁금하게 만드는 여자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카르만은 자신 안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단순한 궁금증일 뿐이라고, 카르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선을 밖에 두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정원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활짝 웃던 엘리아나 로즈의 얼굴이 떠올랐다.
***
샤르헨과 카르만이 그녀에 관해서 집중하고 있을 시각, 엘리아나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정중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쓴 편지는 헬렌 허트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자신이 남작 가문에 들어와서 얼마나 황망했는지, 그때 헬렌이 남겨 둔 흔적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에 대한 열렬한 감상문이었다.
사실, 헬렌이 남겨 둔 거라고는 카르만에 대한 사랑이 담긴 일기장과 몇 개의 장신구, 그리고 그녀가 기르다가 만 식물이 전부였다. 엘리아나는 그 흔적을 끌어모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헬렌 허트는 온순하고, 순진한 여자였다. ‘현모양처’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 이미 결혼을 한 번 했었음에도 끊임없이 혼처가 들어오는 이유는 그녀의 고운 성정을 나이가 지긋한 가주들이 먼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직까지 재가하지 않는 것은 모두 카르만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엘리아나는 그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가여웠다. 이 멍청한 역할극에 쓰이고 버려진 여자들이 모두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 편지는 아마 질리언 허트가 먼저 읽게 될 것이다. 남작가에서 오는 편지를 자신의 사랑하는 누이에게 곧장 전해 주진 않을 테니까. 때문에 엘리아나는 처음부터 질리언과 헬렌, 두 사람에게 쓰는 편지라고 생각했다.
편지의 마무리는 초대의 말이었다. 이번 사교 파티에 꼭 나와 주십사, 당신을 다시 사교계에 발돋움할 수 있게 할 디딤돌이 되게 해 달라는 호소에 가까운 말이었다. 은혜를 갚고 싶다는 열렬함도 함께 담았다.
엘리아나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붉은 실링 왁스를 부었다. 그러고선 남작 가문을 뜻하는 인장이 있는 스탬프로 꾹 눌렀다. 붉은 왁스 위로 선명하게 헌터 가문의 문양이 새겨졌다. 엘리아나 로즈는 그 인장을 보며 미소 지었다.
“후.”
엘리아나는 굳어 가는 왁스 위로 한 번 바람을 불며 콧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