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샤르헨은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화가 난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더 내뱉어도 카르만이 자신의 뜻대로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영 멍청한 애는 아니라 다행이지.’
엘리아나는 다시 한번 그렇게 생각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샤르헨은 잠시 진정한 후에 카르만에게 둘만이 아는 이야기를 건넸다.
“남작님, 저도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될까요?”
“그럼. 뭐든지.”
“저번에 갔던 장미 정원을 또 갈 수 있을까요?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생각이 나요.”
“언제든지, 네가 원한다면.”
“좋아요. 그러면 거기에 갔다가 호수도 들러요. 말에 또 오르고 싶어요.”
“다치려고.”
“같이 타 주시면 되잖아요.”
맑게 웃으면서 애교를 피우는 샤르헨을 보며 엘리아나는 아무런 표정도,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아나의 성이 로즈이기 때문에 일부러 말한 것이 아닐까. 이런 걸로 도발하려고 했다면 오히려 무시하는 게 나았다.
엘리아나는 음식을 음미하면서 자기 혼자 식사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샤르헨은 그러면 그럴수록 카르만과의 추억을 꺼내서 자랑하듯이 떠들었다.
카르만은 샤르헨의 수다에 짧게 답하며 엘리아나를 보았다. 엘리아나는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샤르헨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식사 자리를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샤르헨. 르잔이 무례하게 찾아갔던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했네요.”
“식사 자리를 허락받았다고?”
카르만이 말했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르헨은 곧장 눈썹을 내리면서 말했다.
“제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리겠어요. 부인께서 또 저를 곤란하게 하는 말씀을 하시네요.”
“뭐.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겠죠. 그럼 저는 이만.”
엘리아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르헨과 남작 사이의 균열은 자신의 다음 스텝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층계를 하나하나 오르면서 식당에 감도는 적막을 즐겼다. 계모 엘리아나 로즈의 계획은 이제 막 시작에 돌입했을 뿐이었다.
***
엘리아나 로즈의 이름이 사교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작부의 옷을 입고 다니는 남작 부인은 뜨거운 감자나 다름이 없었다. 방중술이 엄청나서 남작을 매혹했다는 저질스러운 소문부터, 독을 만들고 흑마법을 부리는 마녀라는 소문까지 났다. 엘리아나는 소문이 날개를 달고 쭉쭉 퍼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소문은 카르만의 전 부인인 헬렌에게도, 그녀의 오빠인 질리언에게도 닿았을 터였다. 그들이 자신을 다른 전 부인들과는 다르다고 느껴야 했다.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그것이 필요했으니까.
엘리아나는 첫 사교 파티의 날짜가 잡히자, 점점 더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소등되고 모두가 잠드는 시간에도 홀로 도서관에 남아 있곤 했다.
누구 백작 부인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외워야 했다. 그러나 귀부인들은 너무 많았고, 가문 간의 관계도도 복잡했다. 엘리아나는 도서관에서 며칠씩이나 밤을 새운 후에야 머릿속에 정리가 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 부인.”
“무슨 일이지? 르잔.”
“부인께서 도서관에서 무, 무슨 짓을 하시는지 샤르헨 님의 시녀장님께서 알, 알아 오라고……. 만일 독을 준비한다거나, 그, 그런 일이 있다면.”
“날 죽이기라도 하겠대?”
“네? 아, 아닙니다!”
“내가 공부하는 책들은 전부 이 남작 가문에서 갖춘 책들이야. 여기에 약초학 서적 정도는 있지만, 독을 제조하는 법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해. 물론 이쪽도 그쪽에서 독을 넣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그 점도 알려 주고.”
르잔은 마치 기다려 왔다는 듯이 쏟아붓는 엘리아나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저번에 그녀를 해고하겠다고 한 이후로 르잔은 조금 더 정신없어진 모습이었다.
르잔은 곧장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부, 부인.”
“더 할 말이 있어?”
르잔은 갑자기 바닥에 낮게 엎드리더니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말을 이었다.
“저, 저를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
“…….”
“진심으로, 이제 정말 진심으로 남작 부인을 모시겠습니다. 저를 거둬 주세요! 샤르헨 님은 저를 버리실 겁니다!”
르잔이 눈물까지 보이면서 호소했다. 엘리아나는 그녀의 머리꼭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물이 진실하든, 진실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승기가 보이는 쪽에 박쥐처럼 붙는 사람은 엘리아나에게 필요가 없었다.
“내가 왜?”
엘리아나의 말에 르잔이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엘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부인!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증거를 가져와. 르잔. 내가 네 충성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엘리아나는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생각이 없었지만, 훌륭하게 이용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르잔은 그녀의 얼굴을 불안한 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반응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엘리아나는 그런 그녀의 혼란을 빠짐없이 읽어 내고 있었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르잔이 말했다. 엘리아나는 그녀가 진실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 첩자가 된 사람은 영원히 첩자로 남을 수밖엔 없었다. 설령 그녀가 진심이라고 해도 샤르헨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증명할 걸 찾으러 나가 봐. 난 책을 마저 읽고 방으로 돌아가지.”
“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간이 많은가 봐?”
화장을 짙게 한 엘리아나의 얼굴은 차가우면서도 무서운 면이 있었다. 르잔은 그 말에 곧장 고개를 숙이곤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엘리아나는 이미 오랫동안 같이 동고동락했던 로즈 가문의 하녀, 베니를 시녀장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베니는 하녀의 신분이었지만, 로즈 가문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하녀의 급료를 주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베니는 가문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로즈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가난을 나누고 신의를 지켜 왔다. 엘리아나를 비롯한 가족 중 그런 그녀를 단순한 하녀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아나가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이라도 급료를 챙겨 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을 모두 청산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아나는 이번에 베니를 헌터 남작가로 불러들임으로써 고생만 했던 그녀에겐 호사를, 그리고 자신에겐 믿을 만한 심복을 두고자 했다.
처음엔 이 집안에 적응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빨아들일 수 있는 건 모조리 빨아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단칼에 버려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었다.
엘리아나는 약초학 책 하나와 『마녀의 역사』라는 책을 챙겼다. 지금으로부터 30분이 지나면, 도서관을 경호하고 있는 위병이 바뀐다. 그가 바로 지금 엘리아나가 노리고 있는 자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실하게 일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변변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윗사람에 눈에 띄지 못해서 그저 그런 위병으로만 머물 뿐이었다.
남작가의 위병, 하녀들 사이에 도는 정보는 인력 시장에 가면 금방 얻을 수 있었다. 돈만 조금 찔러 넣으면 모든 정보가 나왔다. 엘리아나는 일감을 받던 귀부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그런 거래를 종종 해 왔다.
그렇기에 안면이 있는 그녀에게 헌터 남작가 사용인들에 관한 고급 정보가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위병 내에 심어 둘 사람으로 그를 택했다. 절박하고 선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무기를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30분의 시간이 지나고, 도서관 밖에서 소리가 들리자, 엘리아나는 골라 둔 두 권의 책을 들고선 문을 열었다.
위병은 의식적으로 인사를 했고, 엘리아나는 실수인 척 책을 떨어뜨렸다.『마녀의 역사』라는 책 제목에 위병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머, 미안한데 내 책 좀 주워 줄래? 보다시피 드레스가 불편해서.”
“네.”
그는 기괴한 마녀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를 덮고선 엘리아나에게 책을 건넸다. 그 순간 엘리아나는 그를 확 잡아당겼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엘리아나는 그대로 그를 도서관 안으로 끌어당겼다. 위병은 당황한 채로 그녀에게 이끌려 들어왔다. 탁, 문이 닫혔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나는 이 책 두 권을 당신에게 들라고 시키고 내 방까지 갈 거야. 그럼 분명 높은 사람들이 묻겠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러면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해. 왜? 조금 더 간절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부, 부인.”
“쉿.”
“…….”
“돈을 준다고 해도 푼돈에는 움직이지 마. 부인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 그리고 돈 액수가 마음에 들면 말해. 부인이 마녀와 약초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는 것 같다고.”
“……!!”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한다고 소문을 내도 좋아. 그러면 정기적으로 돈을 주면서 내 정보를 캐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왜 그런 말씀을.”
“그러면 네가 돈을 벌게 될 테니까. 남작가에서 일하는 위병 중에 어려운 형편에 아픈 부모님을 봉양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어.”
“…….”
위병, 조셰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집안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고, 부모가 아픈 것도 맞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 역시 아버지가 편찮으시고, 봉급 가지고는 턱도 없는 생활을 해 봐서 알아. 나를 이용해, 조셰프. 나는 그대가 낸 소문을 이용할 테니…….”
“…그렇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일단은 책만 좀 들어 줘.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하도록 할 테니.”
조셰프는 망설이다가 그녀가 건넨 책을 받아 들었다. 마치 그녀가 던진 유혹을 받아 든 것처럼 말이다.
“난 너에게 정보를 주고, 넌 돈을 벌고. 나는 그걸 원해.”
“그럼 제가 해야 할 건…….”
“그들이 뭘 물었는지 나에게 알려 주는 것.”
“…….”
“그리고 나를 사랑할 것?”
엘리아나 로즈는 아름답게 미소 지으면서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위병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엘리아나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걸음을 뗐다.
이 근방 100km 이내의 영지에서 분명 저와 같은 유형의 여자는 없을 것이었다.
위병은 아마도 그가 지금껏 만나 왔던 여자들과 전혀 다른 그녀의 매력에 빠질 수도 있었다. 진심이라면 더 좋았다. 진심은 이용하기 더욱 쉬우니까. 이 집안에 들어왔던 엘리아나의 진심을 본인의 사랑에 악용한 카르만 헌터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 관련된 자들이 손해만 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를 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목표는 더 많이 가진 자들의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을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걸어갔다. 위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방까지 안내했다. 그러고선 책을 건네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가 자신의 말대로 행할지, 행하지 않을지는 내일 이 시간에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엘리아나는 확신했다. 그는 자신이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엘리아나는 알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혼자서 외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그 절박함을.
엘리아나는 가족들을 떠올리면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머리를 굴려 가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나 역시도 이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마녀 같은 남작 부인의 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