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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21)

5화

엘리아나는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 파티는 아주 오랜만에 열리는 사교 파티였다.

다양한 형태와 규모로 열리는 사교 파티에서 귀족들은 서로의 재력과 교양을 뽐냈다. 각 가문끼리 물밑에서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기도 하고, 혼담이 오가기도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무엇보다 이번 파티는 명망이 높은 오델리 백작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여는지라, 그 규모가 꽤 컸다.

엘리아나는 복식사 책을 보면서 괜찮은 모양의 드레스들을 체크했다. 자신의 잘록한 허리와 봉긋한 가슴을 조금 더 돋보일 수 있는 옷이 필요했다. 샤르헨의 마르고 여리여리한 이미지와는 다른, 섹시하고 고혹적인 매력이었다.

“점잔 떨 필요는 없어. 더 화려한 걸 하는 거야.”

엘리아나는 스스로 움츠러들려고 할 때마다, 정신을 차리자고 애쓰면서 그림들을 보았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날씬한 선의 드레스는 엘리아나에게 맞지 않았다.

상의는 매끈하게 떨어져 단정함을 드러내고, 스커트는 꽃잎을 겹친 듯 퍼지는 모양이었다. 특히 아래로 갈수록 화려하게 퍼지는 밑단에 프릴과 로맨틱한 자수로 우아함을 더하곤 했다. 거기에 목을 두르는 깃을 빳빳하게 세우거나 쇄골을 조금 드러내는 등 자신만의 색을 더해서 개성을 강조했다. 대개 가슴은 V자로 벌어지고 스커트는 A자로 벌어졌다.

엘리아나는 그것과는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고 싶었다. 꼼꼼히 디자인들을 살피고 자신이 입게 될 드레스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쳤다. 단단한 고래 뼈와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여 풍만한 가슴을 조금 더 드러내고, 파니에(panier)로 엉덩이는 과장되게 부풀릴 것이었다.

특히나 머리를 높게 올려 화려한 장식을 꽂을 생각이었다. 깃털과 꽃을 아낌없이 꽂아 넣은 옛 복식을 보면서 엘리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자가 귀족 사교계를 주름잡는 법이었다. 그리고 엘리아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귀족 부인들이 이미 지금의 스타일을 점점 질려 하고 있지만,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단 걸 알았다.

그녀와 친한 직물 상인은 귀가 밝고,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다. 엘리아나는 그에게서 얻은 귀한 힌트를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덮었다.

***

엘리아나는 르잔이 사 온 옷들을 살펴보다가 진보라색 드레스를 골랐다. 마네킹에 씌우고 옷을 야하게 보이려고 덧붙인 망사를 모조리 뜯어냈다. 그러고선 직물 상인에게 구해 온 코르셋을 허리에 덧대었다. 검은색으로 염색된 고래 뼈와 고래수염은 어두침침하면서 매혹적인 빛깔을 띠었다.

엘리아나는 검은 프릴을 끝없이 펼쳐서 망사를 뜯어낸 자리에 덧붙이고, 옆 나라인 콘테르국에서 수입한 파니에로 엉덩이를 부풀렸다. 보라색 리본을 겹겹이 쌓아서 허리 끝을 장식했다.

엘리아나의 손은 빨랐다. 르잔은 그녀가 드레스를 손보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드레스 룸 밖에서 대기만 하였다. 엘리아나는 그녀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이 쉬지 않고 드레스들을 차례로 손보았다.

며칠이나 도서관에 있던 남작 부인이 이젠 방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겠다며 엉뚱한 소문들이 돌았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자신의 할 일만 이어 갔다.

소문의 발원지는 르잔 혹은 샤르헨일 것이었다. 자신이 하는 이 짓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금해 한다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엘리아나는 빠르게 드레스 룸을 채워 나갔다. 사실, 삯바느질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해 봤기에 그녀의 손은 빠를 수밖에 없었다. 파티용 드레스, 홈드레스, 이브닝드레스 등 필요에 따라 조금씩 모양을 다르게 하긴 했지만 어쨌든 화려하단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엘리아나는 드레스만 손보았다. 그러고선 장신구들을 만지고, 여러 번 화장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첫 모습부터 완벽해야 했다. 르잔은 식사 때마다 끼니를 알려주는 척 은근히 고개를 내밀었지만, 엘리아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보진 못했다.

엘리아나는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르잔을 드레스 룸으로 불러들었다. 시계는 곧 저녁 식사 시간이 됨을 알리고 있었다.

“르잔.”

“네, 남작 부인.”

“오늘 저녁 만찬을 함께하겠다고 전해 줘.”

“네?”

“내가 하지 못 할 말을 했나?”

“아, 아닙니다. 전하겠습니다.”

르잔이 허둥대면서 방을 나가자, 엘리아나는 한숨을 돌렸다. 그러고선 자신이 만든 드레스 중에서 녹색 드레스를 골라냈다. 재질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운데도 색깔 때문에 공방에 처박혀 있던 원단을 덧댄 드레스였다.

원래 디자인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였지만, 그 선을 따라서 원단을 두르자 마법처럼 우아해졌다. 스퀘어 형으로 쇄골까지 보이는 네크라인은 엘리아나를 한층 더 성숙해 보이게 만들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르잔의 도움 없이도 녹색 드레스를 입었다. 가는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도록 가슴살을 끌어모으고, 코르셋을 있는 힘껏 당겼다. 전신 거울에 비친 엘리아나는 스스로 보기에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엘리아나는 머리를 책에서 본 대로 높이 올렸다. 밀랍을 아주 소량 녹여서 머리를 고정하고, 얼굴에 화려한 색상의 화장품을 칠했다. 말 그대로, 바른다기보다는 칠하는 것에 가까웠다. 입술은 붉게, 눈썹은 진하게, 눈두덩이는 조금 더 깊고 매혹적인 색으로 물들였다.

엘리아나는 마치 가면을 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장갑을 끼고선 부채를 들었다. 시장 바닥에서 팔던 싸구려 부채를 녹색으로 물들이고, 검은 프릴을 덧붙였다. 꽤 고급스러워진 모습은 이전의 싸구려 부채를 떠올릴 수 없게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주일 간 고생한 것치고는 꽤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헤엑!”

르잔은 드레스 룸에 돌아오자마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이 주방과 샤르헨의 방을 들릴 동안 엘리아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작부들이나 입던 드레스는 고풍스러워져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 어느 부인에게서도 본 적 없던 그윽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어떻게 만진 것인지 탄탄하게 고정된 풍성하고 아름다운 곱슬머리는 그녀를 한층 화려해 보이게 만들었다. 입술은 독을 문 것처럼 진한 색이었다.

엘리아나는 활짝 웃으면서 르잔에게 말했다.

“계모가 갑자기 식사 자리에 나타난다고 하니, 샤르헨의 반응은 어땠어?”

“샤… 샤르헨 님에게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방에만…….”

“말하지 말라고 했구나.”

“그, 그게 아니오라…….”

엘리아나는 별 미련이 없다는 듯이 돌아서서 곱게 화장된 자기 얼굴을 다시 살폈다. 어느새 저녁식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마친 엘리아나는 르잔을 지나치다가 그녀의 어깨를 꾹 잡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첫 사교 파티가 끝나고 나서, 널 해고할 거야.”

“…….”

“샤르헨에게 그렇게 전해.”

“그, 그렇지만 절 해고하지 않으시겠다고…….”

“마음이 바뀌었어.”

엘리아나는 가볍게 말하고선 걸음을 뗐다. 르잔은 드레스 룸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들고 왔던 난해한 옷과 옷감들은 사라지고, 온통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들뿐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옷들이었다. 그 어느 귀족 부인도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지 않았다. 어둡고, 진하고, 화려한 흑진주를 보는 것만 같았다.

르잔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아주 무서운 사람에게 걸려 버린 재수 없는 하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마녀에게 말이다.

***

식사 자리에 가장 늦은 것은 엘리아나였다. 엘리아나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오자, 카르만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부채, 손과 옷까지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작부의 옷을 샀다고 하더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단 100년 전에 유행했던 귀족 부인의 스타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요즘엔 아무도 찾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쓴 거라곤 공방에 남아 있던 옷감들과 약간의 돈뿐이었다. 헌터 가문의 재산에 손톱자국조차 내지 못할, 아주 적은 돈.

부채를 내리자, 그녀의 고혹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카르만이 엘리아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자, 샤르헨이 목을 가다듬었다.

“소녀, 남작 부인을 뵙습니다.”

“그래.”

샤르헨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엘리아나는 카르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남작님.”

“…….”

“앞으로도 제가 계속 식사 자리에 참석해도 될까요? 아무리 못난 계모라지만, 자꾸 이렇게 혼자만 동떨어져 있으려니 헛된 소문만 도는 것 같아서요.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를 방관하는 건 남작 부인으로서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상식적이면서도 똑 부러지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샤르헨에게 안심을, 카르만에게는 약간의 부채감을 주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모든 만찬 자리에 참석할 것이고, 매일 샤르헨과 카르만을 볼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지위를 이 집안에서 세워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마녀 같은, 위험한 계모. 그러나 남작 부인의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 있는,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사람 말이다.

“남작님…….”

샤르헨이 설마 허락할 것이냐는 듯이 카르만을 불렀다. 가늘고 흔들리는 목소리는 나약하게 느껴졌다. 카르만의 시선이 샤르헨을 향했다가 다시 엘리아나를 향했다.

그는 엘리아나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설사 샤르헨을 남작 부인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해도 그랬다. 표면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에 엮여 있는 만큼, 그가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행동들이 있었다.

“마음대로 하시오.”

카르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내뱉었다.

“남작님. 그렇다면 제가 만찬 자리에서 빠지겠어요. 남작 부인께서 제가 있으면 불편하실 거예요.”

샤르헨은 카르만의 말에 실망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했다. 엘리아나는 그런 샤르헨에게 말을 걸었다.

“샤르헨.”

“…….”

“난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함께해서 더 친해지면 좋겠구나. 그럼 헛소문도 사라질 테고 말이야.”

그녀가 입꼬리를 한껏 올려 웃으면서 자애롭게 말했다. 샤르헨은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고선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따라야지요. 저는 그런 위치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네 위치를 잘 안다니 다행이구나.”

엘리아나의 말에 샤르헨이 이를 악물었다.

“샤르헨에게 무례한 언행을 삼가시오, 부인.”

“제가 무례했나요? 전 조금 더 좋은 아이로 자라나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무례했다면 미안하다, 샤르헨.”

엘리아나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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