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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21)

4화

허트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질리언이었다. 그는 해군 장교이자, 교관으로 훌륭하게 자라났다. 무엇보다 질리언은 동생인 헬렌을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동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카르만을 좋게 볼 수 없었다. 두 가문의 사이는 이혼 후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았다.

질리언은 허트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될 사람이었고, 미혼이었다.

엘리아나는 그 남자의 마음으로 이 판을 뒤집을 키를 잡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첫 번째 열쇠일 뿐이었다.

그를 통해서 알게 되는 또 다른 남자와 여자, 권력자들과 친해져야 했다. 이 헌터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말이다.

엘리아나의 계획은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했다.

어차피 계모로 낙인찍혀 버릴 것이라면, 그 길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

나쁜 여자. 위험한 여자.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매력 있는 여자. 엘리아나는 마녀들에게 끌리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금기에 대한 욕구였다. 금지된 모든 것을 저질러 버리는 대상에 대한 선망과 열망. 엘리아나는 그 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남편을 제외한 모든 남자를 제게 반하게 만드는 것.

그게 엘리아나가 정한 전략이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그 외모를 믿기보다는 자신의 지략을 믿었다. 전략적으로 사용해 나갈 사람들만 골라서 제 품에 안기도록 할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상대가 질리언이었다. 엘리아나는 질리언의 가문에 대해서 조금 더 샅샅이 살폈다.

그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쉬웠다. 상처받은 가련한 여인, 헬렌과의 인연을 만들 것. 엘리아나는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떠올리면서 침대에 누웠다.

내일 아침부터 그녀는 지독한 계모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소문이라는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쉬운 것이니까. 엘리아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되었다. 그것이 모든 계획의 시발점이 될 것이었으니까.

***

“감히 샤르헨 님의 머리칼을 쥐고 뺨을 갈겨? 미친 거 아니야?”

“불쌍한 샤르헨 님. 머리칼이 한 움큼 빠졌대.”

“뺨이 퉁퉁 부으셨다잖아. 몇 대를 때리신 거야?”

엘리아나는 자신이 지나가자 보란 듯이 떠드는 하녀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소스라친다는 듯이 흩어졌다.

옆에 있던 르잔은 엘리아나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르잔은 샤르헨에게 뭔가 지침을 받은 모양인지 엘리아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셈이었다.

엘리아나는 도서관 문이 닫히고 둘만 있게 되자, 바로 돌아섰다. 엘리아나와 르잔의 거리는 불과 30cm가 되지 않았다.

“너.”

“네?”

“내가 널 해고할 것 같니? 차라리 해 줬으면 좋겠지?”

르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르잔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엘리아나가 보통이 아니란 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실감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안 돼. 넌 샤르헨에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는 임무를 받았잖니?”

“…….”

르잔은 놀란 것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지?’라는 것을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한층 더 화사하게 웃어 보이고선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공방에 그냥 쌓여 있는 원단들이 많지? 어둡고, 칙칙하고, 그러나 반짝거리는 여성용 원단들. 샤르헨의 취향이 아니라서 구석에 박혀 있는 것들.”

실제로 헌터가의 차기 가주인 카르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값비싼 원단들을 상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엔 귀부인을 위한 원단들도 많았는데, 별다른 쓰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대대로 헌터 가문의 부인들은 순결함을 드러낼 수 있는 밝은 옷들을 입어 왔고, 그건 샤르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특히나 창백한 듯 하얀 피부에 진줏빛이나 상아색의 드레스를 더해 자신의 청순하고 연약한 외모를 강조했다.

엘리아나가 선택하고자 한 건 그 반대 방향이었다. 르잔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네? 아니… 공방은 주로 위병들이 쓰기 때문에 저는 잘…….”

돈이 차고 넘치는 이곳엔 드레스를 직접 만든다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없는 듯했다.

엘리아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는 몇 벌이나 드레스를 만들고, 기웠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바느질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 일을 돕기도 했고, 실제로 자신이 입던 옷들이 찢어지거나 닳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솜씨는 일품이었다.

그녀는 그 솜씨를 있는 힘껏 발휘해 볼 생각이었다.

“있을 거야. 그것들을 가져와. 어둡고, 신비로운 색일수록 좋아. 그리고 그 색들과 비슷한 드레스들을 여기서 사 오도록 해.”

“이… 이곳은… 작부들이나 드나드는 곳인데…….”

“술집 여자가 드나들면 드레스 가게가 술집이 되나? 그런 게 아닌 거라면 거기서 사 와. 나에게 배당된 금액은 많지 않아.”

이전 부인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가져온 돈과 드레스로 치장했겠지만, 엘리아나의 경우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새로 장만해야 했다. 그것도 악독한 계모로 보일 만한 것들로 말이다.

“샤르헨이 입고 있는 귀한 드레스를 골랐다간 단벌로 연명하는 셈이 될 테지. 거기서 가장 몸을 많이 가리는 옷들로 골라 와. 오늘 네가 샤르헨에게 보고할 일이자, 해야 할 일이야.”

“…….”

“이해했으면 가 봐. 저녁 먹기 전엔 받고 싶은데?”

“네, 네…….”

르잔을 손을 떨며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엘리아나는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창문을 활짝 열고선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선 책들을 또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헬렌의 가문에 대해서 더 파헤치고, 과거 복식사를 찾아서 디자인을 봐야 했다. 지금 유행하는 귀족 부인들의 드레스를 따라 하는 건 어설플 것이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거지.”

그녀는 화제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뜨거운 감자처럼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그런 여인의 자리에 오를 계획이었다.

엘리아나는 책들을 한 아름 들고서 긴 책상을 채웠다. 그러고선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과 지적 탐구욕으로 반짝거렸다. 지문이 닳을 것처럼 그녀는 얇은 페이지를 헤집고 또 헤집었다.

***

르잔이 돌아오기 전, 엘리아나는 남작가의 저택에서 빠져나와 시장의 입구에서 화장품을 제조하는 가게에 들렀다. 자신을 따라붙는 이가 있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게에서는 여러 가지 가루를 빻아서 얼굴에 바르는 색색의 화장품을 팔고 있었다. 엘리아나는 주인장에게 도서관에서 찾아낸 배합법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부인, 부인은 옅은 화장이 잘 어울리시는 피부입니다. 이목구비도 뚜렷하신데, 이렇게 강한 색 조합을 쓰시면…….”

술집 작부 같아 보인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화장품 가게 주인에게 엘리아나는 밝게 웃어 보였다.

“이대로 해 주세요.”

그녀는 웃돈을 얹은 값을 테이블에 올렸다.

샤르헨이 쓰는 화장품은 유명한 사람의 손을 탔지만 그만큼 비쌌다. 하지만 엘리아나가 찾은 이곳은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었다. 값싸고 품질은 나쁘지 않았다.

화장품의 원료는 한정되어 있었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그것들을 누가 어떻게 잘 배합하느냐의 차이뿐이었다. 그것이 비싸게 팔리고, 값싸게 팔리는 것은 오로지 제조자의 명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일 뿐. 엘리아나는 그런 허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돈을 챙긴 주인은 이내 군말 없이 구리 통을 열어서 고운 가루들을 배합하기 시작했다. 조개를 갈고, 말린 열매를 빻아 만든 색색의 가루들이 철판 위에서 뒤섞였다. 마치 마법의 가루처럼 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엘리아나의 눈빛은 또다시 빛났다.

***

“부인께서 어디가 안 좋으신 게 분명합니다! 술집 여자들이나 드나드는 곳에 돈을 탕진하고, 저택을 무단으로 빠져나가서 싸구려 화장품을 제조하느라 정신이 나갔어요. 헌터 가문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샤르헨 님을! 어이쿠! 입에도 못 담을 정도입니다!”

집사가 과장된 표현으로 엘리아나에 대한 욕을 했다. 카르만은 집무실에 앉아서 자신에게 내려온 업무들을 보는 중이었다. 집사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속은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엘리아나가 말한 대로 되었다. 저택 안은 물론이고,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알 리가 없는 다른 귀족들까지도 엘리아나가 계모라서 걱정된다는 서신을 샤르헨에게 보내 왔다.

위로의 꽃, 장미, 숱한 서신들. 사교계에서 샤르헨은 작은 새처럼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고,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서 했다.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기에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한몫했다.

그렇기에 아직 사교 파티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엘리아나에 대해 호감을 갖는 사람보다 그녀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나가 한 짓은 부풀려지고 또 부풀려졌다. 발로 차고, 수십 대를 때린 탓에 샤르헨이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문으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샤르헨은 그 어느 것도 정정하지 않았다. 마치 소문이 더 커지기를 바란다는 듯이 앓아누웠다.

카르만은 샤르헨의 편이었다. 그녀의 편에서 모든 걸 바라봐야 하는 그녀의 남자였다. 그러나 엘리아나가 칼을 문 것처럼 매섭게 뱉어낸 진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무언가 숨기고 있던 치부를 관통당한 것처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카르만은 엘리아나가 마음에 들지 않음과 동시에 궁금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만 통통 튀는 그녀가 말이다.

“일단 내버려 둬.”

“남작님!”

“그녀가 아직 이곳에 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지켜봐도 좋겠지. 이번에도 혼사를 깨면 아버님께서 진짜로 오실 테니까.”

집사는 남작의 이름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호칭에 등골이 오싹했다. 헌터 가문의 가주인 그는 누구에게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집사의 입이 다물어지자, 카르만이 물었다.

“엘리아나는 지금 어디 있지?”

“또 도서관에 가셨습니다.”

“…….”

카르만은 복잡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엘리아나가 있는 도서관 쪽이었다. 집사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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