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카르만은 먼지로 가득한 원단을 보았다. 아마도 먼지가 쌓여 있는 도서관을 닦고 책을 읽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슨 책을? 그곳에는 역사와 정치, 사회 서적밖엔 없었다. 카르만은 가만히 열린 창을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남작님, 어디로 가시나요?”
“도서관.”
“네? 거긴 왜…….”
“지금까지의 부인들과는 다른 행보야. 샤르헨에게 위협이 되는지 확인해야겠어.”
“아, 맞는 말씀이십니다. 지당하십니다.”
집사는 그런 깊은 뜻을 몰랐다는 듯이 뚱뚱한 몸을 이끌고선 카르만을 따라갔다. 카르만은 특유의 냉정한 얼굴로 정원 계단을 가로질러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첫날부터 도서관에 박혀 있는 여자. 엘리아나 로즈.
그녀는 지난 세 명의 남작 부인과는 달랐다. 이름뿐인 귀족 중에서도 가장 허접하고, 가난했다. 그렇기에 골랐던 것이었다. 조용히 살다가 샤르헨에게 자리를 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자신이 잘못 고른 건 아닐까?
카르만은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엘리아나 로즈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여자였다.
***
엘리아나는 책을 읽을수록 신이 났다. 접근하지 못했던 지식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엘리아나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었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일수록 그녀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소매를 걷어붙이고선 그녀는 열정적으로 책이 주는 정보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책, 저 책을 열어 가며 정보를 조합하는 재미도 있었다. 순식간에 책상은 어지러워졌다.
코와 머리 위로 책 먼지가 올라와도 엘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손으로 저어 날려 버리고선 계속 책을 읽어 나갈 뿐이었다.
새로운 책에 막 빠져들 무렵, 도서관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양쪽 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면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도서관 가장 안쪽에 있던 엘리아나는 우박처럼 떨어지는 먼지를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아이고, 이게 뭐람. 어서 걸레를 가져오너라. 도서관 담당 하녀가 누구냐! 어떻게 이런 일을.”
뚱뚱한 몸을 출렁거리면서 말하는 남자는 카르만의 심복인 집사 페페였다. 엘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르만에게 인사했다.
“여기서 뭘 하는 게요. 엘리아나.”
“책을 읽고 있었어요.”
“내가 어제 분명…….”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죠. 저는 저기 떨어진 먼지와 다름없이 도서관에 있을 뿐이에요. 어차피 여기저기 쏘다녀도 다들 째려보고 수군거리기 바쁘더군요. 그저 여기 처박혀 있으면 아무도 오지 않으니 찾아왔을 뿐이에요.”
엘리아나는 가련한 표정을 지어 가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과 달리 책상은 너무 본격적이었다. 헌터 가문의 역사와 콘티노국의 관계망, 이웃나라인 콘테르국의 책도 펼쳐져 있었다.
“테르어를 할 줄 아시오?”
“아니요. 읽을 줄 몰라요.”
“아니.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 책은 테르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펼쳐 보지도 못할 텐데.”
카르만이 정확하게 그 책을 가리켰다. 엘리아나는 눈치 한번 빠르다고 생각하면서 그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래서 덮으려던 참이었어요.”
“엘리아나 로즈.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알고 있어요. 정말 잘 알고 있다고요.”
어제 멍해져 있던 표정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허수아비나 다름없음을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님. 책은 훼손 없이 잘 보고 제자리에 잘 꽂아 둘게요. 그러니 먼지 같은 남작 부인에게 그만 신경 쓰시고 볼일 보러 가세요.”
“아니, 부인! 남작께 말투가 그게 무엇입니까! 무엄하게!”
집사가 허둥지둥 달려와 엘리아나에게 고함을 쳤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표정을 싹 굳히고선 서늘하게 집사를 보았다.
“그럼 일개 집사는 남작 부인에게 손가락질해도 되는 건가?”
“아니… 부인, 그것은…….”
“남작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리 이름뿐인 부인이라도 이런 행위는 좀 자제해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누가 방문해서 보면 제가 남작 부인이 아니라 막내 하녀인 줄 알겠어요. 아직은 수양딸과 정을 통하는 사이라는 게 대외적으로 소문 나면 안 되잖아요?”
“이미 알 사람들은 알고 있소.”
카르만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능청스러운 말에 대꾸했다. 엘리아나는 눈을 예쁘게 접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알 만한 사람들이 왜 입을 나불거리지 않겠어요? 공공연하게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겠죠. 제가 이 자리에 앉은 이유도 그거 때문 아닌가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
“완전히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전 재력도, 권력도 없이 이름뿐인 남작 부인. 당신은 이 남작가의 주인. 누가 누구를 협박할 수 있죠?”
“당신은 나를 화나게 하는 재주를 가졌군.”
카르만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엘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모양이네요. 제가 더 조심할게요.”
“어떻게 남작님께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나 알고……!”
“페페, 됐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는 사람이군.”
카르만은 몸을 휙 돌려서 도서관을 나섰다. 엘리아나는 도서관 문이 다시 한번 쾅 닫히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대거리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듯한 오만한 표정과 태도였다. 엘리아나는 그가 장차 헌터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수양딸로 들인 건 그렇다 치고, 여러 번의 이혼으로 떨어진 이 남작가의 위상과 소비된 재력, 샤르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비정상적인 구조의 권력 관계 등등.
분명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방치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사랑, 그래 좋다 이거야.”
엘리아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것은 배부른 자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유희일 뿐이었다. 엘리아나는 사랑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명예와 권력 그리고 돈이었다. 카르만 앞에서 당당하게 굴었지만, 그녀는 사실상 궁지에 몰린 쥐였다.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전략은 이 책들에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눈에 불을 켜고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저녁이 다 되도록 도서관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
엘리아나가 도서관을 나온 이유는 순전히 배가 고프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연인의 오붓한 식사 자리를 위해 다이닝 룸 쪽으로는 걸음도 떼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기에, 문제가 되는 것도 없었다.
엘리아나는 르잔에게 한 접시 가득 뭔가를 가져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책 세 권을 품에 안고 걸었다. 저택의 구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점심쯤에 책 속에 있는 남작가의 구조를 모두 외운 터였다.
엘리아나는 원래 자신이 머물던 곳이 남작 부인의 방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곳은 자녀를 위해서 마련된 공간이었다. 아마 정식 남작 부인의 방은 샤르헨이 머무는 곳일 터였다.
“작정하고 사람을 물 먹이니, 도망갈 수밖에.”
엘리아나는 도망치듯이 이혼했던 그의 전 부인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샤르헨이라는 여자도 보통은 아닐 것 같았다. 그녀로선 남작 부인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두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 문제였다. 엘리아나는 자신을 쫓아내려고 하는 샤르헨에게 낮게 굽혀야 할지, 아니면 그냥 머리로 들이받듯이 굴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부, 부인!”
르잔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엘리아나를 맞이했다. 손님용 테이블에는 눈부신 금발에 청초한 외모를 지닌 샤르헨이 앉아 있었다. 샤르헨은 자신을 발견하고선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저를 보고 싶어 하셨다기에, 찾아왔습니다. 부인.”
우아한 말투는 어느 늙은 귀족 부인을 따라 한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엘리아나는 책을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두고선 답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몸이긴 하나, 그래도 있는 동안은 친딸처럼 잘해 주고 싶어서 르잔에게 말했던 터인데, 이리 먼저 발걸음을 해 주다니 너무 고마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엘리아나는 눈썹을 아래로 내리면서 감동한 얼굴을 흉내 냈다. 샤르헨의 웃고 있던 입꼬리는 ‘친딸’이란 말에 굳었다.
“남작님께 말씀을 듣지 못하였나요?”
“무슨 말씀이요?”
“…….”
“수양딸과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끔찍한 결말이 오기 전까지 조용히 살아가란 소리라면 들었죠. 아주 잘 들었어요.”
“난 그의 수양딸이 아니에요.”
“샤르헨. 당신은 수양딸이죠. 아직은.”
“…….”
“그리고 나는 남작 부인입니다. 아직은.”
“…….”
“피곤하니 물러가 주겠어요? 르잔, 배웅해 드려. 몸이 약하시다며. 오는 길에 먹을 것 좀 가져오고. 너에게 기미를 시킬 거니까 독을 타는 바보 같은 짓은 삼가 줘.”
샤르헨의 작은 몸이 떨렸다.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엘리아나는 그녀가 투명하게 질투를 드러내는 편이고, 아직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런 여자에게는 기어 봤자 승산이 없었다. 결국, 뒤통수만 얼얼해질 뿐이었다. 엘리아나가 가라는 듯이 몸을 살짝 비켜 주자, 샤르헨은 갑자기 자기 뺨을 세게 내리쳤다. 입술에 피가 나고 몸이 바닥에 쓰러질 정도였다.
엘리아나는 그녀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티를 내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새어머니가 부르셔서 온 제게, 이렇게 손찌검을 하시다니요.”
“아하…….”
“남작님께 이 일은 말씀드리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저를 워낙 예뻐하시는지라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르잔, 너는 이 일을 절대 발설해선 안 돼.”
“네? 네… 샤르헨 님.”
“위대한 남작 부인의 명성이 사교계에서 바닥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거야.”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