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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는 하렘을 좋아해1_120화完

1화

이 결혼은 애초에 사기 결혼이었다.

“내 진정한 사랑은 샤르헨이요.”

첫날밤이었다. 그것도 결혼식 이후로 처음 대면하는 순간. 남편의 첫마디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샤르헨은 당신의 수양딸 아닌가요?”

“집안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녀가 이 집안의 안주인이 될 것이오. 이미 이 남작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소.”

“그럼, 저는요?”

“그대는…….”

엘리아나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나갔다. 엘리아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르만 헌터. 차갑고 금욕적인 생김새의 미남인 그는 어린 나이에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그 자신의 능력도 있었지만, 콘티노국의 개국 공신인 헌터 가문의 후계자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런 남자가 세 번의 이혼을 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네 번째 기회가 어느 시골에 쓰러져 가는 가문인 엘리아나의 집에 갔을 때도 말이다.

아쉬울 것 없는 그가 왜 하필 자신에게 청혼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아나의 가문은 작위도 없었고, 부지도 없었다. ‘로즈’라는 이름만 남아있었다. 말만 귀족이었지,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던 것이다.

역시 아버지가 찝찝하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나? 엘리아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곳의 비밀에 어이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자기 부모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입양한 남자. 그 남자의 이름뿐인 부인 자리였다. 이것은 명백한 사기 결혼이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아나의 집은 정말로 가난했다. 처절하게 가난했다. 엘리아나는 귀족 영애들을 위해서 과외를 하는 실력 있는 여자였지만, 딸린 동생은 넷이었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있었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수발이며 집안을 돌보기에도 24시간이 빠듯했다.

집안의 모든 수익은 오직 엘리아나에게서 나왔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보니 어린 동생들은 하고 싶은 공부, 되고 싶은 미래의 꿈보다는 얼른 성인이 되어서 돈을 벌 생각을 했다.

둘째인 가이아가 몰래 신문 돌리는 일을 해서 돈을 모아왔다는 소식에 엘리아나는 눈이 뒤집혔었다.

―하프가 너무 하고 싶은데……. 하프는 너무 비싼걸. 언니 힘들잖아.

엉엉 울면서 말하던 가이아의 목소리는 아직도 엘리아나의 귀에 생생했다.

이 결혼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었다. 미심쩍은 청혼을 받아들인 건 가이아를 비롯한 동생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서였다. 자신은 못 이룬 꿈을 이루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할 약을 사기 위한 결혼이었다. 무릎이 아프기 시작한 어머니를 위한 결혼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른 가문도 아니고 헌터 가문과의 혼인이었다. 세도가와 연을 맺은 로즈 가문의 위상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고, 이는 동생들이 결혼할 때도 유리했다. 지금보다 훨씬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엘리아나가 헌터 가문에 있는 한은 말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르만이 자신을 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엘리아나는 생각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당할 수 없었다. 이 사기 결혼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엘리아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가난한 귀족 로즈 가문. 그 가문을 먹여 살린 게 장녀인 엘리아나였다. 모두가 귀족답게 나약한 가운데 혼자 악바리처럼 살아서 가족들의 입에 풀칠하게 했다.

그녀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똑똑해져서, 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싼 가격에 과외를 했다. 대필해서 귀족들의 책을 집필해 주기도 했다. 돈이 되는 것은 뭐든 했다. 명석한 두뇌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모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엘리아나는 그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침, 자신의 담당 하녀를 보고 나서 엘리아나는 현재 신세를 새삼 깨달았다.

이제 갓 열일곱 살이 된 하녀였다. 보통 정식으로 혼인한 부인에게는 시녀장을 붙여 주거나, 나이가 지긋하고 경력 있는 하녀를 붙여 주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대놓고 엿을 먹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녀 르잔은 엘리아나의 눈치를 보면서도 여기에 배정된 것이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엘리아나는 그 표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이 여자애는 아마도 샤르헨의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일 것이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고스란히 보고할 여자애. 그 대가는 돈일 터였다. 물론 샤르헨이 남작 부인이 되더라도 그녀는 한자리를 맡을 수 없었다. 전 남작 부인의 하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르잔은 불만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에 상응하는 돈을 제안받았으리라. 엘리아나는 생각했다.

“르잔.”

“네, 부인.”

“샤르헨을 만나러 가겠어.”

“네?”

“내 양딸이잖아. 잘 보살펴 주어야 하니, 얼굴을 보는 건 당연하지. 결혼식 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어. 애프터 파티에는 그 아이가 없었기도 했고.”

“그렇지만 샤르헨 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르잔은 당황하여 횡설수설하였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말은 엘리아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제 남편인 카르만이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엘리아나는 샤르헨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 말을 했을 때, 르잔의 반응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샤르헨의 사람인지 아닌지 추측만으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르잔.”

“네?”

“내가 이름뿐인 남작 부인이지만, 아무나는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

“…….”

“샤르헨에게도 똑똑히 전해 주고.”

“제, 제 말은 그 말이 아니오라, 샤르헨 님은 워낙 몸이 약하시기도 하고… 남작님께서 특히 아끼시기 때문에…….”

“이 저택의 도서관은 어디지?”

“네? 도서관이요? 거긴 또 왜…….”

“권력도 없고, 한낱 하녀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가련한 남작 부인이 갈 데가 어디 있겠어. 사교계도 다 알고 있겠지? 샤르헨이 차기 남작 부인이라는 것을. 그러니 가장 사람들이 찾지 않는 도서관으로 향할 수밖에.”

“죄, 죄송합니다. 부인. 심기를 거슬렀다면 자, 자비를…….”

“괜찮아. 난 조용히, 낮게 굽히며 살 거야.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

“꼭 전해 줘. 네 주인님께.”

엘리아나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르잔의 오른쪽 어깨를 꾹꾹 두 번 눌러주었다. 어디 소설에서 본 장면을 따라 한 것이었다.

엘리아나는 사용인들을 본격적으로 부려 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과외를 다니면서 본 것들, 책에서 본 것들을 토대로 하면 그럭저럭 흉내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린 하녀 르잔에게도 효과가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얼굴에서 짜증을 지우고 어깨를 좁힌 채로 엘리아나에게 도서관을 안내했다.

엘리아나는 도서관까지 오는 길에 자신을 보고 킬킬거리는 늙은 하녀들을 보았다. 병사들은 자신에게 고개만 까딱하는 인사를 하며 대놓고 무시했다.

르잔은 그들에게 뭐라고 해줄 위치도 아니었고, 나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럴 의지도 없었다. 오직 엘리아나의 눈치를 살짝 볼 뿐이었다.

엘리아나는 남작가 내부 사람들이 그럴수록 더 활짝 웃으면서 화답했다.

“이번 남작 부인은 아직 상황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남작님께서 첫날밤에 다 얘기하셨을 텐데. 어제도 샤르헨 님 방으로 바로 가셨잖아.”

들으라는 듯이 떠드는 소리에도 엘리아나는 표정을 굳히지 않았다. 그러고선 도서관 문을 열었다. 출입한 흔적 없이 굳게 닫혀 있던 곳이었다. 르잔은 가보라는 손짓에 빠르게 사라졌다. ‘부리나케’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먼지가 가득한 도서관을 보며 엘리아나는 혀를 끌끌 찼다. 도서관에 먼지가 쌓인 귀족 가문치고 제대로 된 곳을 보질 못했다.

엘리아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치우려면 그냥 터는 것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속치마를 찢어서 긴 책상을 대충 닦아냈다. 그러고선 헌터 가문의 역사부터 관계도까지 다 적힌 오래된 책들을 꺼냈다.

남작 부인이 되어서 좋은 것은 이 서적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택의 도서관은 가문 내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공간이었으므로.

엘리아나는 스무 권이 넘는 두꺼운 책들을 꺼내놓고선 책상을 두 손으로 쾅 하고 내리쳤다.

“이 연놈들을 어떻게 조질 건지, 내가 똑똑히 연구해 주겠어.”

이대로 비련의 네 번째 부인이 될 순 없었다. 엘리아나는 로즈 가문을 일으킬 유일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진 않을 것이다. 반드시.

엘리아나의 찢어진 속치마가 바람을 타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엘리아나는 그것조차 알지 못한 채로 첫 번째 책부터 탐독하기 시작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씹어먹을 기세로 말이다. 지독한 악바리 엘리아나 로즈는 남작 부인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

카르만은 정원을 산책하며 집사가 전달해 주는 말을 들었다. 남작 부인의 움직임에 관한 보고였다.

“남작 부인께서는 일어나시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마치 미친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고 하더군요.”

“도서관?”

카르만은 여태껏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도서관 쪽을 보았다. 활짝 열린 창문은 누군가가 그곳에 갔음을 똑똑히 보여 주고 있었다. 열린 창으로 찢긴 천 쪼가리가 흩날렸다. 그 천은 갑자기 부는 바람에 집사인 페페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에구머니나, 이게 뭐람.”

하녀들은 쓸 수 없는 값비싼 원단이었다. 집사는 이건 분명 남작 부인의 것이라는 듯이 카르만에게 그 천 쪼가리를 펴 보였다.

집사 역시 샤르헨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 중 하나였다. 사실, 남작가에서 샤르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사랑받는 사람이었으니까. 권력의 중심이 될 준비가 된, 남작의 여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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