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연애의 정의
2018.07.21.
현 여사는 아주 심각했다.
“아무래도 이 방법밖에 없어요.”
“그게…… 그래도 되는 걸까요, 부회장님.”
“어쩔 수 없죠. 원래 인간은 절박해지면 독해지는 법이에요.”
현 여사와 윤 실장은 2층 이현의 방을 비우는 중이었다.
이현의 짐은 싹 정리해서 혼자 살던 삼성동 빌라로 보내버렸다.
시끄러울 일이 없던 안채가 이삿짐센터에서 온 인부들로 복닥댔다.
“이게 효과가 있겠습니까?”
“뭐든 해봐야죠.”
백이 다녀간 지 일주일.
그 뒤로 이현은 정해진 것처럼 똑같은 일과를 소화했다.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해 빠르게 업무를 마치고 칼퇴근 후 곧장 대모산으로 가는 생활이었다.
집으로 귀가 시간은 9시 반에서 10시 정도.
듣기로는 백의 모친이 엄해 더 이상 늦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점점 몸이 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현 여사는 이렇게 된 것 집에서 내쫓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둘 다 부모가 끼고 있으면 절대 그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지금은 일종의 강제철거를 진행 중이었다.
더불어 현 여사는 이대로 속도위반 루트를 밟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현이 녀석은 진짜, 제 연앤데 어째 이리 무심한 거야. 일주일이나 됐으면 상견례 날짜라도 받아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곤혹스러워진 윤 실장이 짐짓 마른 이마를 쓸었다.
“부회장님. 그래도 일주일이면 너무 빠른 것 같지는 않은지요.”
“전혀 빠르지 않아요.”
현 여사가 딱 잘라 말했다.
“저는 요새 하루가 1년 같습니다. 아주 피가 마를 지경이에요.”
결혼을 하는 당사자도 아닌데 과연 피가 마르는 이유가 뭘까 싶지만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윤 실장도 하루 빨리 백이 다시 이 집에 돌아왔으면 싶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회장님. 본부장님께서 무사히 결혼에 성공하신다 쳐도 과연 본가로 돌아오려 하시겠습니까? 신혼인데요.”
현 여사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건 그때 가서 또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일단은 결혼이 우선이에요.”
“그야 그렇지요.”
그사이 이현의 방이 텅 비어버렸다.
휑해진 2층을 보던 현 여사가 말했다.
“이참에 아예 2층 공사를 하면 어떨까 해요. 이 방하고 저 방을 터서 하나로 만들고 저 공간은 육아실로 쓰면 어떻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연애를 시작한 지 이제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업체 물색해서 견적 내오겠습니다.”
“서둘러주세요. 쇠뿔도 단김에 빼야죠.”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윤 실장은 그저 모르는 척, 현 여사와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주변에서 이렇게 부추겨대면 이현과 백도 못 이기는 척 이 분위기에 휩쓸려줄지.
* * *
“뭐라고요?”
퇴근길은 헛웃음으로 시작했다.
“부회장님이 뭘 하신다고요?”
오늘로 퍼스널 쇼퍼 경력 일주일 차 박 과장, 아니 박 코디네이터가 박씨를 문 제비처럼 평창동에서 갓 날아온 소식을 전달했다.
[상견례 날짜 잡기 전까지는 본가에 출입하지 마시랍니다. 아, 고 선생님과 함께 오실 경우는 예외고요. 짐은 모두 정리해서 삼성동 자택으로 보냈으니 잠깐 들를 필요도 없다십니다.]
“너무하는데.”
이현이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차에 올랐다.
[2층은 내일부터 개축 공사에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윤 실장님 말로는.]
“개축이라니, 이유가 뭡니까?”
[벽을 터서 방을 하나로 줄이고 대신 육아실을 만드는 게 목적이랍니다.]
“나 참. 쓸데없는 일을.”
이현이 시동을 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연한 일이라고 전해주십시오.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무슨.”
[마음이 급하신 거죠. 그런데 육아실은 만들어두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현이 대뜸 인상을 썼다.
“신혼을 왜 본가에서 보냅니까?”
[아, 그럼 역시 분가를 염두에 두고 계셨……,]
“박 과장님까지 동원해 자꾸 몰아가도 소용없을 거라고 윤 실장님한테 전하십시오. 그럼 끊습니다.”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대충 던져놓으며 이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결혼이라니. 그런 속 편한 소리를.”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말을 해대는 것이다. 현 여사나 윤 실장이 아무리 안달이 났다고 해도 그에 비하면 한참은 멀었다.
아니, 그것도 웃기지. 내 애인을 두고 왜 자기들이?
이현은 뭔가 질겅질겅 씹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핸들을 잡았다.
정작 나는 뭐가 잘못될까 무서워서 만나러 가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부웅.
이현의 차가 정해진 일과처럼 어제와 같은 시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방향이 약간 달랐다. 이현은 대모동이 아닌 청담동으로 가고 있었다.
* * *
“어마어마, 너무 예뻐!”
“인형이 따로 없네.”
“와우, 브라보. 어쩜 이렇게 어메이징하게 어도어러블할 수가 있지. 해연 씨, 이런 내츄럴 본 뷰티를 어디서 알았어?”
해연은 간식 그릇을 앞에 둔 해피만큼 신이 났다.
“백이 씨, 이것도 입어봐요. 이것도 예쁠 거야, 응?”
지금 해연이 백과 있는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단골 셀렉트 샵이었다.
옷 좀 산다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성지처럼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세계여행이 취미인 오너는 재주도 좋게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디자이너 제품들을 이름도 낯선 나라에서 공수해 왔다.
그가 권하는 제품을 들고 나가면 어김없이 트렌드 세터라는 찬사가 쏟아진다는 업계의 소문도 있었다.
“벌써 많이 입어봤는데요. 그리고 이렇게 많이는 못 사요.”
“아니야, 아니야. 입을 수 있어요. 그리고 왜 못 사요. 내가 다 사줄 건데.”
해연이 이렇게 나오자 샵 오너와 직원들이 잽싸게 백을 에워싸고 이 옷 저 옷 건네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이런 마들을 놓치면 그게 크라임이지 크라임. 이것만 더 트라이 해봐요, 응?”
“이리 주세요. 제가 피팅룸에 가져다 놓을게요.”
직원 중 하나가 옷들을 빼앗아 들고 탈의실로 달려갔다.
“백이 씨.”
해연이 아이가 조르듯 어깨를 흔들어 보였다. 백이 마지못한 미소와 함께 직원을 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아니, 정말. 해연 씨, 말 좀 해주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데뷔 준비 중이거나 그런 거야?”
“그런 거 아니고.”
“그럼?”
“아는 남자의 사촌형의 애인.”
“음? 아니, 뭐하는 사람이냐고.”
“수의사.”
“언빌리버블! 저 얼굴로 뱃이야? 와이?”
“동물을 좋아해서.”
해연이 새침한 듯 뿌듯한 얼굴로 샵에서 준비한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오늘은 처음으로 백과 단둘이 만나는 날이었다.
그간 수백 통에 달하는 문자로 매일 만나자고 졸랐지만 항상 답이 없던 터라 문자를 보내는 게 그저 하루 일과처럼 되어가던 중에 백한테 답장이 왔다.
-저도 배웠어요.
처음에는 백이 씨♥라고 저장해놓은 번호가 뜨는 것을 보면서도 두 눈을 의심했다.
-백이 씨? 진짜 백이 씨예요?
혹시 사연을 아는 못된 인간이 장난을 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를테면 현라현 같은.
-네.
-우와.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지금 어디예요? 뭐하고 있어요? 안 심심해요?
세 번째 문자는 조금 느렸다.
-너무 빨리 말씀하시면 힘들어요.
그걸 보니 확실히 백이었다.
그 뒤로 해연은 정확히 38통의 문자를 통해 조르고 졸라 어렵사리 만날 약속을 정했다.
그 전전날부터 인근의 맛집 리스트를 조사했고 여자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일을 열성적으로 탐구했다.
맛있는 걸 다 먹여주고 갖고 싶다는 걸 다 사주고 싶었다.
모를 일이었다. 왜 백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지.
왜 저가 언니가 된 것 같은지. 왜 죽은 언니가 덜 아파지는지.
“왜 인형놀이를 하는지 알 것 같아.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지를 못하겠네.”
해연의 말에 오너가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유, 그거야 마들이 인형이니 그런 거지. 그런데 애인은 뭐하는 사람이래? 어떤 럭키 가이가 저런 미인을 만나?”
해연이 아주 자연스럽게 인상을 썼다.
“애인 얘기는 하지 마.”
“아하? 와이?”
“재수 없는 인간이라.”
“갓, 노 웨이! 정말?”
“응. 완전 밥맛없어.”
오너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다 말했다.
“그런데 자기는 왜 데이트 의상을 골라주고 있어?”
“그래야 얌전히 입어볼 거 같아서.”
“아우, 짓궂다. 요 너티 데빌 같으니. 하긴, 그게 자기 매력이지.”
그쯤해서 옷을 다 갈아입은 모양인지 백이 탈의실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이거 입었는데요…….”
“왜요, 백이 씨?”
“맞게 입었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뒷부분이 이상해요.”
샵 오너가 찻잔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내가 봐줄게. 뭐가 이상한데요?”
“그게 좀…….”
탈의실로 달려간 오너가 안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 마이 갓.”
“왜 그러는데?”
해연도 달려왔다.
“어마…….”
한걸음 늦게 다가온 직원이 난처해진 얼굴로 볼을 긁었다.
“아, 저거……. 손님 취향은 아닐 것 같아서 빼놓으려고 했던 건데.”
어쩌다 실수로 입게 된 옷은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미니 드레스였다.
그에 반해 등 쪽은 허리까지 아찔하게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는데, 어깨에서 연결된 망사 드레이프가 팔과 허리를 한 번 더 휘감아 묘한 실루엣을 연출했다.
이런 옷을 본 적이 없던 백은 자신이 위아래를 바꿔 입었는지 아니면 앞뒤를 뒤집어 입은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 미니 드레스를 입고 나온 백이 아주 달라 보인 탓이었다.
백은 정말로 예뻤다.
엘리 사브의 자수 원피스를 입고 샵에 들어오는 백을 보자마자 뭐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다 있나 싶었다.
생글생글 웃을 때는 아이스크림이 인간으로 태어나면 그게 딱 백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그런데 저 미니 드레스는 그 첫인상을 확 바꾸어버렸다.
화사하던 인상은 화려하고 도발적으로, 귀엽고 소녀 같던 느낌은 관능적으로 변했다. 거기에 표정은 우아하면서도 묘하게 천진한 구석이 있어서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매혹적이었다.
“섹시…… 아냐, 유혹적이야.”
샵 오너가 갑자기 몸을 돌려 해연에게 물었다.
“해연 씨, 자기 J미용실 다니지. 거기 지금 자리 만들 수 있겠어?”
이 시간이면 어지간한 이 동네 미용실들은 예약으로 꽉 차 있기 마련이었다.
방송용 화장과 머리 손질은 기본이 세 시간이라 중간에 새치기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형놀이 할 거면 제대로 하자. 헤어부터 메이크업까지 싹. 나머지는 우리 샵에서 준비할게.”
해연이 인상을 잔뜩 쓰며 답했다.
“싫어! 그래봤자 현이현 그 인간만 좋은 거잖아. 안 돼. 아까워.”
“그래서, 안 할 거야?”
“아냐, 할 거야. 그런데 싫어. 아까워.”
해연은 아깝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J미용실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예약이 꽉 찼다는 미용실에서는 해연이 작정하고 졸라대자 오늘 쉬는 날이었던 디자이너를 불러준다고 했다.
그사이 다른 직원들은 백이 입은 미니 드레스에 어울리는 구두와 액세서리를 찾아 매장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는 이거 입고 싶지 않은데요. 너무 불편해요.”
그 와중에 아무도 백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게 함정이었다.
“신해연 씨? 이거 벗게 도와줄래요?”
해연은 해외 영화제 수상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백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냈다.
“백이 씨. 이제 와 무를 수는 없어요. 지금 벌써 몇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데요.”
“음, 그게…….”
“백이 씨가 그거 벗는다고 하면 나는 이제 이 샵 다시는 못 와요. 미용실도 마찬가지고. 이 업계에서 쉬는 날 집에서 자고 있는 J미용실 진 선생님을 불러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배우 인생 걸고 딱 한 번만 써먹을 수 있는 카드란 말이야.”
물론 거짓말이었다. 해연이 언젠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대사를 응용한 것뿐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잘 생각했어요, 백이 씨.”
백은 이현과의 데이트는 항상 대모산에서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거기에 어울리는 불편한 구두를 신을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해연의 배우 인생을 생각해 꾹 참았다.
그리고 두 시간 뒤.
퇴근한 이현이 해연의 단골 샵으로 백을 데리러 왔다.
* * *
“아…….”
백을 본 이현의 감상이었다.
“아……, 가 다예요? 고작?”
해연이 가늘어진 눈으로 이현을 흘겨보았다.
이현은 뭐라고 대꾸하는 대신 그저 또 같은 소리를 했다.
“아…….”
“또 그런다.”
옆에서 샵 오너가 해연을 말렸다.
“소용없어. 애인 분은 벌써 넋이 나갔어.”
그 심정이야 백 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만 보내주자고.”
“……쳇. 내가 왜 이 공을 들였나 몰라. 누구 좋으라고.”
해연이 마치 결혼식 날 아빠가 하듯 이제껏 꼭 쥐고 있던 백의 손을 이현에게 넘겨주었다.
“오늘 곱게 모셔요. 백이 씨 준비하느라 고생 많이 했으니까. 신발 봐서 알겠지만 3분 이상 걷게 하면 안 돼요. 그럴 일 있으면 안아서 옮겨요. 알았죠?”
“……알았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이현이 백을 데리고 차로 걸어갔다.
백은 옷이 너무 신경 쓰여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지금의 숨 막히는 고혹적인 분위기에 한 몫을 거들었다.
“오늘 큰일 나는 거 아닌지 몰라.”
차에 오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샵 오너가 불쑥 한마디 던졌다.
“별 말 없는 게 왜 꼭 폭풍전야 같지. 어우야, 나 막 소름 돋고 그랬어.”
옷을 잘못 골라준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너무 부럽던데요.”
“뭐가?”
“왜 책이나 영화에서 그러잖아요. 사랑에 빠졌을 때 눈빛이 어쩌고저쩌고. 그 애인분이 우리 백이 씨 쳐다볼 때 눈빛이 딱 그럴 거 같았어요. 옆에서 욕을 해도 모를 것처럼 백이 씨만 쳐다보는 게.”
“뭐, 그야…… 에이, 백이 씨면 그렇게 보고도 남지.”
“그렇죠?”
“씨, 다들 그만해!”
해연이 돌연 성질을 부렸다.
“그만하고 오늘 다들 술 마시자. 비싼 술 마시자. 기분 나쁘니까 저 인간 사촌한테 술값 내라고 해야겠어. 어서 문 닫아. 나 오늘 정말로 술 마실 거야.”
해연이 단골 샵 오너와 직원들을 닦달하는 동안 이현의 차는 저 멀리 오늘의 데이트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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