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65화 (65/68)

#65. 연애 시작

2018.07.14.

“손해가 컸어야 정상인데…….”

“아, 아니었네?”

간만에 태보의 임원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TB물산 본사에서 열린 회의는 많든 적든 강남 신사옥 건설에 한 발을 걸치고 있던 관련자들이 전부 참여했다.

얼마 전 있었던 대모동 수재로 인해 시동을 걸고 있던 공사가 전면 중단되었다.

그 와중에 신사옥 건설의 최종 책임자였던 현이현 본부장은 수해 지역의 피해 복구가 완료될 때까지 무기한 공사를 연기하겠다 했다.

거기에 덧붙여 피해 복구 비용을 태보가 부담한다고 나섰다.

수해를 입은 시민들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태보 측 관계자들은 다들 한차례 뒷목을 잡아야 했다.

태보가 자선단체도 아니고. 대체 삽질도 한 번 안 한 공사 전 부지에 무슨 복구 책임이 있냐며 현이현 본부장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세상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복구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불하게 된 것은 TB가 아닌 건설공사보험에서 제3자 배상 책임 조항을 지정해두었던 보험회사였다.

생각 외로 적은 비용을 들여 태보는 제법 괜찮은 홍보 효과를 얻게 되었다.

차세대 경영주로 이현의 존재가 부각되며 기존의 권력밀착형 재벌에서 벗어나 공정하고 혁신적인 기업 운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이미지가 생겨났다.

그 덕에 연일 주가 상승 중이었다. 처음에는 공사 지연에 관해 말이 많던 대주주와 임원들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지금 보시는 대로 단기적인 손실이 눈에 띌 수는 있습니다만 큰 금액은 아닌 데다 주가 상승과 더불어 기업 호감도 상승 등 잠재적인 이득이 훨씬 더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무기한 공사 지연이 혹시 부지 재선정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인해 연 전무 측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피해 복구가 모두 완료되기까지 예상되는 6개월 동안 신사옥 건설은 보류됩니다. 하지만 곧 정권이 바뀔 가능성이 있는 데다 관련 법이나 물류 동향도 얼마든지 변수가 예상되니 기존의 신사옥 건설안도 개선이나 변경이 필요할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상입니다.”

다들 할 말이 없는 통에 업무지원팀의 발표를 멀뚱히 지켜보다 회의가 끝났다.

뭐, 주식 상승폭을 보면 연말 임원 성과금 및 주식 배당금이 두둑해질 테니 입 다물고 있을 만도 했다.

“6개월 뒤에 보지요.”

신사옥 부지를 평택으로 옮길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연 전무가 먼저 일어섰다.

어느 임원과 손을 잡아야 할지, 어느 쪽과 선을 그어야 할지 머릿속이 분주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운이 아주 좋으신 분 같습니다, 본부장님은.”

회의에 참석했던 현 여사는 이러저런 이들로부터 비슷한 인사를 받았다.

“작고하신 회장님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현 여사가 수더분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는 많이 가족다워진 탓인지 남이 하는 손자 얘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하는 짓은 많이 달라요. 강 사장도 아시겠지만.”

“회사 일이라는 게 결국 무얼 하느냐보다 어떻게 되느냐로 판가름 나지 않습니까.”

“뭐, 저 알아서 잘할 거예요. 영리한 녀석이니.”

그리고 덧붙이자면 운이 좋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그것도 무시무시하게.

오금도사가 말하길 원래 영수 중에서도 여우 일족은 재물을 불리는 운을 나눠준다 했다.

고 현성태 회장이 대모산을 사들인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을 얻었으니, 대모산과 아예 명운이 철썩 붙어 있다는 이현은 더할 것이다.

태보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럼 내가 좀 바빠서.”

현 여사는 우아한 인사를 남긴 뒤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을 나서기 전 이현에게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7시라고 했지?”

“네.”

현 여사가 엄포를 놓았다.

“늦지 마라. 지난번처럼 온다 해놓고 안 오기만 해봐. 사람이고 고양이고 목 빠지는 꼴을 보고야 말 테니.”

이현이 소리 없이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늦지 마.”

현 여사는 재차 같은 당부를 한 뒤 걸음을 서둘렀다.

7시.

백과 이현의 교제를 기념해 가족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 * *

“지시하신 대로 전부 사왔습니다, 본부장님.”

박 과장은 뿌듯한 표정으로 이현에게 차 열쇠를 건넸다.

이현의 차 트렁크와 뒷좌석에는 모 백화점 명품관에서 갓 들고 온 쇼핑백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은 백에게 줄 선물이었고, 나머지는 모친과 언니들에게 갈 몫이었다.

다들 취향이 확고한 터라 선물을 고르는 데 애를 먹을 일이 없었다.

공물은 성의껏 하면 되지, 라면서도 기꺼이 브랜드별로 신상품 목록을 깨알같이 적어 건네는 식이었다. 먹 냄새가 고아하게 풍기는 멋들어진 붓글씨 리스트는 이현에게서 곧장 박 과장에게 전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박 과장님.”

“웬걸요. 목록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수월했습니다.”

사심을 덧붙이자면 박 과장은 의외로 자신이 쇼핑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브랜드 이름은 어찌나 그렇게 한눈에 쏙쏙 들어오는지. 신상품 품목만 귀신같이 읊어대는 그에게 매장 직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박 과장은 스페셜 고객 리스트에 올랐다.

“대모동으로 가시는 겁니까?”

“네.”

“그럼 저도 동행합니까? 혼자서는 저거 다 못 나르실 텐데요.”

비밀을 아는 사람이 늘었다. 그중에는 박 과장도 포함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휘가 홍수를 일으킨 그날. 주환에게서 연락을 받은 박 과장이 대모산으로 왔다.

그 난리통 속에서 박 과장은 본의 아니게 삼족오와 마주치게 됐다.

삼족오는 서휘 덕에 내려앉을 데가 없어진 대모산 주변을 맴돌며 이 욕 저 욕을 해대는 중이었고, 그래서 박 과장을 미처 보지 못했다.

박 과장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대모산 동물들이 하늘로 떠오르는 기괴한 현상을 목격했다.

홍수로 인해 대모산의 결계가 약해지며 박 과장이 그 안으로 들어왔던 탓이었다.

그러저런 이유로 박 과장은 오금도사와 주환에게 붙들려 뒤처리를 돕게 되었다. 나름 보안팀 출신인지라 박 과장은 사후 처리에 능했다.

부상자를 옮기고 나무와 바위 잔해를 치워 길을 만들고 했던 게 모두 박 과장이었다.

그래서 이현은 이런 말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예. 운전하십시오.”

“허, 그래도 되는 겁니까?”

박 과장이 신난 얼굴로 다시 차 열쇠를 넘겨받았다.

이현의 차가 대모산을 향해 출발했다.

뒷좌석이 가득 찬 탓에 조수석에 탄 이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런 말을 던졌다.

“참. 해고입니다, 박 과장님. 내일부터 출근 안 하셔도 됩니다.”

“예, 내일부터 출근 안…… 아니, 예? 뭐라고욧?”

끼익!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차가 앞으로 쑥 기울어졌다.

박 과장이 한 옥타브쯤 높아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저 부당해고 하시는 겁니까! 저더러 노동청에 고소하라고 해고해주시는 겁니까, 예?”

“TB에 보안팀이 필요 없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박 과장님은 부회장님 연줄로 없는 자리에 들어오신 거고.”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제가 이 한 몸 부서져라 본부장님께 충성하고 있는데에에!”

배신감이 휘몰아쳤다. 박 과장은 이현의 앞에 드러누울 결심을 했다. 정 해고하고 싶거든 그를 밟고 지나가서 해야 할 것이다.

“원칙에 어긋나는 규정은 앞으로도 계속 없앨 생각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이렇게 말 한마디로 자르는 것도 원칙적으로 안 됩니다! 안 되고말고요!”

“TB 그만두시면 제가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싶습니다. 퍼스널 쇼퍼는 어떻습니까.”

“안 되고말…… 네? 뭐요?”

박 과장이 눈을 끔벅댔다.

“퍼스널 쇼퍼……라고요?”

“네. 앞으로 쇼핑할 일이 많을 테니.”

박 과장이 코끝을 실룩였다.

“……사대보험 됩니까?”

“안 됩니다. 프리랜서 고용이니 개인적으로 하십시오. 대신 연봉 인상해드리겠습니다.”

“얼마나요?”

“200퍼센트.”

“……헙.”

200퍼센트 연봉 인상이라면 단숨에 고액 연봉자 계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현의 제안에는 대모산 관련 비밀 유지 조항이 포함된 셈이었지만 이제 막 쇼핑이라는 새로운 재능을 찾게 된 박 과장에게 직업적으로도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생각할 시간 주실 겁니까?”

“하루 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출발하십시오.”

“옙, 본부장님.”

잠깐 멈췄던 차가 다시 출발했다. 주차장을 벗어나 강남대로에 진입할 때까지 박 과장은 자기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 *

“진짜! 이런 얘긴 진작 해야지! 당일 돼서 말해주는 게 어디 있어!”

해연이 불만을 터트렸다.

늘 그렇듯이 라현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알려주는 게 어디야. 못 온다는 소리라면 그렇게 알게.]

“아니, 아닛! 누가 안 간대? 갈 거야. 몇 시라고?”

[7시.]

“7시. 알았어.”

해연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오늘은 새벽부터 공익광고 촬영이 있었다. 녹초가 된 몸으로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인 지 한 시간이 고작이었지만 해연은 씩씩하게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멍!”

해연이 일어난 것을 본 반려견 해피가 잽싸게 달려왔다.

해피라는 이름을 들은 라현은 하필 골라도 그렇게 흔해 빠진 이름을 골랐냐며 타박했지만 해연은 해피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이제는 행복해질 거니까.

그러자 니 멋대로 해라, 라는 라현에게 해연은 생글 웃으며 게다가 나하고 돌림자야.

자매 같지?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직 침대 위로 올라오는 방법은 모르는 해피가 바닥에 뱅글뱅글 맴돌았다.

“잘됐다. 해피, 너도 가자.”

길에서 발견한 유기견을 구조해 사비로 치료한 뒤 결국 입양까지 하게 된 훈훈한 미담은 배우 신해연의 주가를 한층 높이는 역할을 해주었다.

덕분에 당일 스케줄을 펑크 낸 일도 무난히 넘어갔고, 해연은 요새 동물 관련 예능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오늘 새벽의 공익광고도 유기견 방지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해연은 광고 개런티를 전부 유기견 보호소에 기부하기로 결정하고는 아낌없는 칭찬을 받는 중이었다. 요새처럼 살맛 나는 적이 있었나 싶었다.

“아우, 7시면 미용실 들를 시간도 빠듯하겠네. 해피, 이리 와. 너부터 옷 입자. 백이 씨 보러 가는 거니깐 예쁘게 보여야 해.”

해연은 일단 눈곱만 떼고는 부랴부랴 미용실로 향했다.

* * *

“공물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아요.”

백의 말에 이현은 언니들이 건네는 목록이 이번에는 더 많았다, 라는 말 대신 슬쩍 웃었다.

“그런가?”

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많이 가져오면 힘드시잖아요. 저한테는 더 안 하셔도 돼요.”

“그건 안 돼.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벌고 있어.”

백이 힘들다고 하는 건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이걸 모두 들고 산을 오르는 건 인간에게는 힘든 일일 거예요.”

아, 그걸 걱정한 거였구나.

하긴, 당신은 인간의 경제학에는 별 관심 없지.

이현이 백을 흉내 내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운동을 더 열심히 할게.”

“그런다고 단숨에 힘이 아주 많이 쎄지진 않아요. 언니들한테 말씀드려야겠어요. 들고 오기 힘들지 않을 만큼만 부탁하라고.”

이현은 금전적인 부분이든 다른 부분이든 백이 저를 걱정해주는 게 기뻤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럼 이제 가자. 늦겠어.”

“예.”

백으로서는 꽤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그간은 이현이 매일 퇴근 후 대모산으로 왔다.

대모산은 무사하다고 하지만 그 아래는 수해로 인해 아직 어수선한 터라 당분간은 걸음을 삼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현에게도 지금은 적응 기간이었다.

백이 인간과 다르기에 그가 알아야 하는 일이 아주 많았다. 매일 대모산을 오르며 이현은 그런 것들을 착실히 익혀가고 있었다.

백도, 이현도 대모산 데이트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현이 백과 정식으로 교제를 하기로 했다고 말하자 평창동 본가에서는 당연히 백이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고 하는 순간부터 이현은 온갖 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현 여사는 무능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윤 실장은 잘 주무셨습니까, 라는 아침 인사에 너는 그러고도 밤에 잠이 왔냐, 라는 뜻을 꾹꾹 눌러 담았다.

안드레아는 뭐, 더 할 말이 없었다.

원래도 평창동 본가의 작은 무법자였던 안드레아는 틈만 나면 문틈이나 구석진 곳에 숨어 있다가 이현을 공격했다.

라현은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이제는 미련 없다고 매일 큰소리치는 것과 다르게 라현은 종종 은밀히 이현을 미행했다. 대모산의 결계가 아니었다면 제법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수많은 원망과 원한을 오늘은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 과장이 반갑게 백을 맞이했다.

그도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오금도사와 그 제자도 함께할 것이다.

“네. 안녕히 지내셨어요?”

“덕분에 너무너무 잘 지냈습니다. 게다가 이직도 할 거고요.”

“이직이요?”

박 과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네. 앞으로는 더 자주 뵐 것 같습니다.”

이현을 고민하게 만드는 안부 인사였다.

퍼스널 쇼퍼는 무슨. 이참에 보안팀을 다시 만들어야 할까. 고심 끝에 경비팀을 해체하고 보안팀으로 대신하기로 했다면 되겠지.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소리지만 살면서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란 퍽 어려운 일이었다.

“박 과장님. 쓸데없는 소리 마시고 출발하세요.”

박 과장이 눈을 흘겼다.

“아니, 어째서 쓸데없는 소립니까? 사람이 살면서 안부는 묻고 살아야지요.”

내 여자는 사람이 아니거든. 나 말고 다른 인맥 같은 건 쓸데도 없어.

이현은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며 박 과장에 맞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출발하세요.”

“……쳇. 네, 본부장님.”

이현의 차가 대모산을 출발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백이 이현의 손을 살짝 쥐었다. 이현이 고개를 돌리자 백이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저 좀 알 것 같아요. 현이현 씨 방금 질투한 거죠? 제가 박 과장님하고 친해 보여서요.’

귓가에 와 닿는 숨결이 달콤한 향수 같았다.

‘응, 맞아.’

백은 그가 영수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인간에 대해 빠르게 배워가고 있었다.

아주 다른 그들의 연애는 순조롭게 순항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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