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홍수 (2)
2018.07.03.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렸다.
비는 점점 더 거세져서 몇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벌써 발목이 잠겼다. 물이 불어나는 속도를 보면 무서울 정도였다.
무를 대로 물러진 흙 탓에 까딱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갈 것이다.
게다가 뒤에서는 계속 호랑이 울음이 들려왔다.
끔찍한 비 탓에 산을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해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호 씨 또한 걸음이 느려졌다. 그 덕에 지금껏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백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 업히세요.”
“…….”
실소가 터지려는 걸 참느라 이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백은 그의 몸무게를 제대로 알고서 하는 소리인 걸까.
“그 반대로 하자. 당신이 업혀.”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현이현 씨가 저를 업어봤자 걸음만 느려지죠. 어서 업히세요. 시간 없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업겠다는 거야. 무게도 무게지만 키 차이 때문에 업어봤자야.”
“아이 참. 말 많긴.”
초조해진 백이 발을 쿵쿵 구르다 이현의 팔 아래로 파고들었다.
“뭘 하려고…… 읏,”
몸이 기우뚱해진다 싶은 순간 이현은 백의 등에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키 차이는 어쩔 수 없었던지 백이 이현의 다리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저 꼭 붙드세요. 아셨죠?”
“내려줘.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이 다쳐.”
“안 다쳐요. 현이현 씨 정도는 하나도 안 무거워요. 저는 더 무거운 것도 들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백에게 업혀 있을 수는 없었다.
“못 하겠어. 어서 내려줘.”
“입 다무세요. 지금부터 달릴 거니까.”
휙!
뺨으로 바람이 스쳐갔다. 백은 그 위태로운 길을 아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내려달라고!”
“조용히 하세요! 현이현 씨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기가 막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백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은 아주 안정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심지어 백에게 업혀 있는 자세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백은 힘겨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게…….”
……뭐야, 젠장.
“원래 이렇게 힘이 쎄?”
이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작은 소리를 백이 용케도 알아들었다.
“네.”
“꽃다발을 들 때는 무거워 보였는데.”
“인간 세상에서는 구두라는 걸 신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내내 걸음도 불편하고 동작도 불편했어요. 하지만 여기는 산이니까요.”
“그럼 지금은 신발을 안 신고 있어?”
“아까 진작 벗었습니다.”
이현은 백이 맨발인 걸 몰랐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당신한테는 산이 더 편한 건가.”
“물론입니다. 저는 평생을 여기서 살았는걸요.”
“……그렇군.”
그랬다. 백은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다. 이현은 잠깐 틈을 둔 다음 다시 물었다.
“영수라는 건, 뭐야?”
“말씀드렸잖아요. 산의 일족 중에서 영기를 타고 태어난 이들을 말합니다. 인간보다 하늘에 더 가까운 이들이에요.”
“사람 얼굴을 하고 있잖아.”
“그건 영력으로 둔…….”
백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걸음도 뚝 멎었다.
왜 그러나 싶은 순간,
우르르르릉!
저쪽 수풀 너머로 보이던 봉우리가 마치 한차례 재채기를 하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말도…… 말도 안 돼.”
백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체온이 훅 내려가는 것을 이현도 알 수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저긴 집이 있는 곳인데…….”
백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긴 무너질 리 없는 곳인데!”
그때였다.
까악!
주위가 밤처럼 깜깜해졌다. 삼족오가 내려오면서 하늘을 가린 탓이었다.
“그럴 수 있단다. 백아.”
서휘가 삼족오에서 내려왔다. 신기하게도 그는 비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이현이 머리끝부터 전부 젖은 것과는 딴판이었다.
서휘가 이 빗속에서 부채질을 하며 혀를 찼다.
“꼬락서니하곤.”
당연히도 이현을 향한 말이었다.
“제 한 몸 지킬 힘도 없는 한심한 족속이라 그런 게로구나.”
울컥한 이현이 억지로 백의 등에서 내려섰다.
아무리 그 혼자만 평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좋아하는 여자 등에 업혀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이 꼴을 만든 게 누군데 그런 소리야. 힘자랑도 정도껏 해야 봐줄 만하지.”
“아직 입은 덜 죽었구나. 뭐, 좀 더 있으면 지껄일 기운도 없어질 테지만.”
이현과 서휘는 곧장 치고받고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지만 백에게는 그걸 염두에 둘 여유가 없었다.
“서휘님! 어째서…… 어째서 산이 흔들리고 있는 건가요. 그러면 안 되는데…….”
“이 산은 내가 거두기로 했다.”
서휘가 부채로 대모산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네? 거두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하계같이 더러운 곳에 영산을 남겨둘 수는 없겠구나. 인간은 영산을 가질 자격이 없어. 백영수는 더더욱.”
“서휘님…….”
서휘가 백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남의 집을 때려 부순다는 말을 하는 것치고는 너무도 인자하고 따듯한 웃음이었다.
게다가 유혹적이었다. 마치 백이 미혹술을 부릴 때처럼.
“나와 함께 달로 가자, 백아. 하계를 떠나 사는 게다. 더는 인간을 애잔해할 필요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달……로 간다고요?”
“그래.”
서휘가 반달처럼 달게 눈을 휘었다.
“생각해보렴. 여기 사는 이들을. 이들과 함께 달에서 사는 게 어떨지. 네가 원한다면 전부 데려가겠다.”
“전부…….”
“그래, 전부.”
천계로 가자는 얘기였다.
죽음도 고통도 인간도 없는 곳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너만 좋다 하면.”
백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어떻게…… 저희는 하계에서 태어난 이들인데요. 천계에 속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너를 반려로 맞이하면 네 일족도 전부 신수의 일족이 될 수 있단다. 백아.”
그 말에 백보다 이현이 더 빨리 반응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닥쳐.”
“현이현 씨!”
이제 불경을 넘어선 언사에 백이 팔짝 뛰었다. 아니, 사실은 좀 전부터 팔짝 뛰고 싶었다. 서휘가 반려가 어쩌고 하던 시점에서.
“인간은 빠지거라. 감히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구나.”
“남의 사이에 끼어든 건 너지. 작작 해.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서휘가 서늘한 비웃음을 입술 새에 물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하찮은 인간 종자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는 날이 오다니.”
“살 만큼 살았으면 그만 죽는,”
“현이현 씨!”
그래도 그 말은 너무했다. 원망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을 한 백이 훌쩍 달려들어 이현의 입을 손으로 꼭 눌렀다.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인간은 신수를 화나게 하면 안 돼요!”
“시비를 건 건 저 치가 먼저야.”
이현은 백의 손을 붙들어 입에서 떼어냈다. 하지만 입이 자유로워졌어도 한번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이현은 손가락을 움직여 백의 손가락을 얽었다. 혼자서 잡은 것보다 몇 배나 더 단단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좋아한다고 했다.
오늘 셀 수도 없이 많은 말을 들었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백이 서휘에게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던 그 말 한마디였다.
그는 백이 영수라는 걸 모르고 좋아했지만 백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했다.
그렇다면 그도 할 수 있었다.
영수건 뭐건 간에 그도 좋아할 수 있었다. 백이 할 수 있다면 그도 할 수 있었다.
왜냐면 처음부터, 훨씬 더 많이 좋아한 것은 그였으므로.
“저런 소리 듣지 마. 청혼을 하면서 집을 때려 부수겠다니, 미친놈일 게 분명해.”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이현의 말이 웃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을 말씀드렸지만 신수께 그런 불경한 언사는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현이현 씨도 비슷한 말을 하셨는데요.”
집을 때려 부수는 게 싫다면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서휘가 얼굴을 구겼고 이현이 잠깐 헛기침을 했다.
“……나는 좀 절박했어.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 당신은 나를 피하려고만 들고.”
“그래도 같은 일이잖아요.”
“…….”
부정할 수 없다는 게 퍽 민망했다. 이현이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사랑하면 원래 미친놈이 된다잖아. ……아니, 그렇다고 내가 뭐 저치하고 똑같다는 소리는 아니고.”
변명 같은 고백인지, 고백 같은 변명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서휘의 귀에 충분히 거슬렸다.
휙!
서휘가 부채를 흔들었다.
“어머나!”
둘을 향해 불어온 부채 바람은 백만 허공에 띄웠다. 아차 하는 사이 몸이 둥실 바람에 실려 서휘의 옆으로 이동했다.
“무슨 짓이야!”
이현이 소리쳤다.
백은 허공에 둥둥 뜬 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상자에 갇혀 있는 듯했다.
백이 손을 들어 몸을 움직여보려 애썼지만 한 발짝도 그 자리에서 옮길 수가 없었다.
“듣자 하니 기가 막혀 말이다.”
서휘의 시선이 섬뜩해졌다.
감히 신수를 두고 인간과 똑같다 하다니. 이현의 무지는 이제 무례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그쪽이 하는 짓이 더 기막혀. 백을 내려놔. 힘자랑할 상대가 아니잖아. 적어도 그 입으로 반려가 되라느니 하는 말을 한 상대한테 그래서는 안 될 텐데.”
“네가 그리 간 크게 지껄이는 죄를 묻는 건 나중으로 미루마. 너는 그 비좁은 인간의 머리로, 영수가 어떤 존재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서휘가 가장 크게 분노하는 부분은 그것이었다.
감히 인간이 영수를 탐낸다는 것. 영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영수가 인간과 얼마나 다를지 가늠해본 적이 있느냐? 착각 마라. 네 비좁은 눈에 인간처럼 보인다 해서 영수가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에 백영수가 어찌 보일지 그것은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세상 무엇보다 곱고 눈부실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운 걸 알아본다 한들, 그것은 전부가 아니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영수의 아름다움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인간의 그 작고 하찮은 그릇으로는 영수를 이해할 수도, 담을 수도 없었다.
“없어. 그런데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듣던 중 가장 어리석은 소리로군.”
그럴지도 몰랐다.
서휘의 말대로 이현은 영수가 무언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백은 그가 인간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간과 영수라서 서로를 좋아할 수 없다면 백이 저를 좋아할 일도 없어야 했다.
“그래도 좋아할 수 있어.”
이현이 천천히 눈을 돌려 백을 쳐다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백도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런 게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맺어질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라 쳐도, 좋아할 수 있어. 얼마든지.”
서휘의 얼굴이 굳어갔다.
서휘는 이현이 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네가 협박이든 힘자랑이든 뭐든 해서 백을 어딘가로 데려가버려도, 인간이 아니라 좋아할 수 없을 거라는 거짓말은 못 해.”
백을 억지로 달나라로 데려가도, 백은 서휘가 아닌 이현을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이현이 하려는 말은 그것이었다.
“……그래. 그리 말하려느냐.”
서휘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부채를 쥐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마.”
휘잉!
바람이 불었다.
어흥!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호 씨가 나타났다.
서휘와 마찬가지로 비 한 방울도 묻지 않은 호 씨는 사냥 직전처럼 입을 벌려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현에게 한 발짝씩 다가갔다.
“!”
백이 입을 벌려 들리지 않는 소리를 열심히 내뱉었다.
호 씨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는 중일 것이다.
이현은 진작 발목을 넘어선 세찬 물길 속에서 발을 움직여보았다.
너무 가까웠다.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치사하다고는 생각 안 하나?”
“그것이 인간이다. 너는 내 발 아래서 죽을 처지인 게지. 거기서 아무리 애를 쓰고 발버둥을 친들, 인간이 하늘로 기어오를 일은 없다.”
백의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만 죽거라.”
차르륵!
서휘가 부채를 접었다.
그게 신호인 것처럼 호 씨가 어흥! 하고 외치며 이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도망치기는커녕 그대로 단숨에 목덜미가 물어뜯겼을 것이다.
그건 이현도 알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었다.
“…….”
하지만 살았다.
“떽! 그만 멈추시게!”
이현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마치 다른 차원을 찢고 불쑥 몸을 내민 것 같은 중년의 여인이 제 앞을 막아서며 대모산의 문지기라는 호랑이에게 호통을 치는 것을 보았다.
그녀도 백이나 서휘처럼 눈에 번쩍 띄는 화사한 외양을 지녔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이현은 어쩐지 그녀가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백의 가족일 것이다.
이현의 짐작이 맞았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축지술까지 써서 온 대모산의 당주였다.
서휘의 입매가 부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백의 모친은 팔을 내리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서휘를 마주했다.
“이 몸을 용서하십시오, 신수님. 허나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면?”
“제 집을 없애시겠다니 그 전에 말씀이라도 더 드려보아야지요. 게다가 신수의 일족이 되는 문제라 하면 딸아이의 뜻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비켜서시게나, 호 씨.”
호 씨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머리를 크게 흔들며 성을 터트렸다.
[당주님. 저는 명을 받았습니다.]
“내 명은 아니지. 그대는 이 땅의 문지기야.”
[문지기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게 무엇인가?”
모친이 엄한 소리로 물었다.
“그게 이 땅의 백영수가 아니었던가?”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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