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마지막의 마지막
2018.06.05.
아냐.
아닐 거야.
뭘 알고 그러는 게 아닐 거야. 그냥 물어보는 걸 거야. 아니라고 하면 될 거야.
아니라고 해야 해. 그런 건 없다고 해. 어서.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나오지 않았고 백은 겨우 이렇게 답할 수 있었다.
“묻지 마세요. 대답하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나오네. 그럼 대신 다른 걸 답해줘.”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만 대답하겠습니다.”
천천히 힘을 줘서 말하는 백은 귀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대체 뭘까. 뭘 저렇게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하는 걸까.
“라현이한테 들었어.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던데. 사실이야?”
“그…….”
백이 이를 잘근 물었다. 곤란한 듯 눈을 꼭 감는 얼굴을 저도 모르게 감싸 안을 뻔했다.
“현이현 씨는, 심술맞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자꾸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물어보니까요. 저는 그것도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
결국 이현은 참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백의 볼을 감싸듯 쥐었다. 백이 감았던 눈을 뜨고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현이현 씨.”
“나는 그게 다 진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 산에 호랑이나 다른 이상한 것들이 산다는 것도, 네가 나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것도.”
백이 울 것처럼 입술을 비죽였다.
“그건…… 그러면 안 되는데…….”
“당신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
안 한다기보다는 못 하는 것 같지만.
고개가 조금씩 기울었다. 백을 향해.
백은 이 상황이 너무 곤란했다. 독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일은 사실 이현이 저한테 거는 주술 같았다.
숨이 가쁘고 열이 오르고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대는 그 모든 게.
그래서 이현을 밀어낼 수도, 도망칠 수도 없게 되는 일이.
“그런데 나는 당신한테 거짓말을 했어.”
“……뭐를, 요?”
“하나만 빼고 전부 좋아한다고 했잖아. 당신을.”
“…….”
뺨에 닿은 손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따듯했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젠 안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다 없던 일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안녕이라고 했잖아요. 다신 안 보겠다고도 했어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현이현 씨는 똑같아요. 왜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때와 똑같아요.
“그것만 빼면 뭐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것도…….”
이현이 잠깐 말을 멈췄다. 백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었다.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든 씹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이 이유라면.”
이번에는 백이 숨을 멈췄다.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다는 말. 그건 대모산을 돌려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숨도 못 쉬고 저를 쳐다보는 백을 보며 이현의 표정이 써졌다.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실패했다. 백이 이겼다.
느닷없이 제 삶에 뛰어들어 다짜고짜 땅문서를 내놓으라는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게 생겼다.
“당신이 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져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도 뭔가를 줘.”
이현이 고개를 더 숙였다. 이마가 닿고 코끝이 닿고, 이어서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돌아와. 나한테는 당신을 줘.”
“…….”
뭐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백에게는 이것도 답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얘기를 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거야.
미혹술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정말로 마음을 바닥까지 내어주겠다는 거야.
그 꽃다발처럼, 그 선물들처럼.
적당히는 못 하는 거야. 전부 다 주고 전부 다 받아야 하는 사람인 거야.
마음을 대신하듯 속눈썹이 바지런히도 떨렸다.
그런 사람인 거야. 그런, 사람.
하지만 나는 영수잖아. 나는 한 사람만 좋아할 수 없어. 나는 이 사람처럼 할 수 없어.
입술이 더 가까워졌다.
“백아. 대답해줘.”
낮아진 음성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몸이 커다란 동굴이 되는 기분이었다. 아주 작은 소리도 커다랗게 증폭되는.
“저는…….”
백이 아주 어렵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여어, 거기 있었네.”
제3자의 음성이 두 사람을 감싼 밤공기를 흩뜨렸다.
“저건 또 왜…….”
이현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저 앞쪽에서 서휘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어슬렁 걸어오는 중이었다.
이현이 여전히 백을 감싸 안은 자세로 고개를 돌렸다.
“오지 마. 그냥 가.”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 길이라도 잃었을까 봐 걱정해서 일부러 찾아다닌 이 몸한테.”
“그럴 일 없으니까 핑계대지 마.”
서휘가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핑계는. 진짜야.”
서휘가 싱긋 웃으며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턱을 괴는 게 본격적으로 구경을 해보겠다는 식이었다.
“자자, 그럼 말들 나누라고.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중에라도 길을 잃어버릴지 모르잖아.”
사실 길을 잃어버릴 뻔한 쪽은 서휘였다.
백의 영기를 쫓아오지 않았으면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을 것이다.
달에 비하면 지상은 미로였다. 지기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요즘 시대에 신수가 길을 잃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서휘는 절대 제 입으로 길을 잃었다 말할 생각이 없었다. 신수로서 지켜야 할 체면과 위엄이 있는 법이니까.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사라져.”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이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서휘가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이현의 말을 받아쳤다.
“그럴지도 모른다니까? 진짜야.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 탈 것을 불러야 해. 그 탈 것이라는 게 성질머리가 아주 더러워서 오밤중에 불러내면 인간들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현에게는 당연히 개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백에게는 아니었다.
서휘가 말하는 탈 것은 삼족오가 분명했다. 그렇게 편리한 탈 것이 있으니 신수는 택시를 타는 법을 따로 익히지 않았을 것이다.
“길을 잃으면 큰일이지요. 같이 돌아가요.”
서휘가 반색을 했다.
“오오, 그래? 얘기는 다 마쳤니? 그럼 어서 돌아가자. 여기는 밤인데도 왜 이렇게 환한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이현이 백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얘기 아직 안 끝났어.”
“현이현 씨.”
백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한 걸음이 어떤 의미인지 이현은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한 걸음으로 백은 이현보다 서휘에게 더 가까워졌다.
백이 발을 뗀 그 자리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겨나는 듯했다.
인간의 세상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세상을 구분 짓는.
“그 땅을 줄 테니 대신 저를 달라는 말씀은, 제 마음도 현이현 씨와 같기를 원한다는 뜻이지요?”
“……그래.”
백은 이현이 다른 인간들처럼 미혹술에 쉽게 걸렸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보고 또 보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겠다는 마음이 어떤 건지 모를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고 싶다는 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이렇게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몰랐을 것이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같은 마음은 되돌려줄 수 없었다.
“대모동 땅을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뭘 드릴 수는 없어요.”
백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서휘가 뒤에서 어깨를 붙들어주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백이 몸을 돌렸다.
이현은 그 자리에 서서 백이 서휘와 함께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혀가 굳은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별이 없는 도시의 밤은 오늘따라 신비로울 정도로 고요했다.
이질감이 들 만큼 고운 달빛이 저에게서 멀어지는 두 사람에게 길을 깔아주는 것만 같았다. 둘은 반짝대는 길을 밟아 이대로 달까지 걸어갈 것 같았다.
“……래서, 이대로 보내달라고?”
이현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니, 안 그럴 거야.”
이현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돌려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돌려받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제 힘이 닿는 한.
“내일 봐, 그럼.”
이현은 듣는 사람이 없는 인사를 남긴 뒤 자리를 떴다.
* * *
“워…… 잠깐!”
끼이익!
빈틈없이 선팅된 까만 창문을 가진 커다란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상황에 사방에서는 빵빵 경적을 울리고 욕설을 해대고 난리도 아니었다.
해연의 로드매니저 승태는 헐떡대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갑자기 소리를 치면 어떡해요, 누나!”
해연은 소리만 친 게 아니라 아예 벌떡 일어나버렸다.
지금 탄 벤이 작년까지 타던 구형 모델이었으면 머리를 호되게 박았을 것이다.
해연은 승태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걸 이제 알려주는 게 어딨어! 너무한 거 아냐, 너?”
그녀가 소리치고 있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라현이었다.
비슷한 또래인 두 사람은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둘 다 남 눈치 보지 않는 성격인데다가, 그 성격 탓에 친구가 없다는 것까지 공통점이 제법 있었다.
그 덕에 한번 말을 놓은 뒤부터는 조금 기묘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내가 뭐 너무한데. 아침에 눈뜨자마자 알려줬는데.]
“자랑이다. 게을러터진 게. 지금이 몇 신데 눈뜨자마자야?”
[백수가 부지런 떨어서 뭐하게. 그리고 오늘은 일찍 일어난 거야.]
“아침 10시가?”
[응.]
얼굴은 안 보였지만 해연은 라현이 씨익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람까지 맞춰놓고 잤다고. 그래서 일찍 일어난 거야. 백이네 병원 가려고.]
“아악!”
해연이 별안간 소리를 꽥 질렀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던 승태가 또 한 번 펄쩍 놀랐고, 라현이 인상을 쓰며 귀에서 전화기를 떼어냈다.
[미쳤어? 왜 이래?]
“부러워서 그런다! 나도 데려가! 아니, 내가 갈게. 어디야, 거기가?”
[너 스케줄 있다고 안 했어?]
“그까짓 스케줄! 행사장 가는 거야. 얼굴 안 비춰도 그만이야.”
승태가 한 손을 마구 휘저어댔다.
“누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행사비 벌써 입금됐다고요! 대표님 알면 난리나요.”
해연이 인상을 썼다.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사고 났다 그래. 아니, 사고를 좀 내라. 다른 차 아무데나 좀 박아. 사람만 안 다치게.”
“아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라현도 한마디 거들었다.
[쯧쯧. 심보 봐라.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연애를 못 하는 거야. 그 얼굴로.]
“뭐래.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한다? 너도 만만치 않거든.”
[됐고, 끊어. 백이네 가려면 뚱보 고양이부터 붙잡아야 해.]
전화가 툭 끊겼다.
“아, 진짜! 이 나쁜 놈!”
해연이 전화기를 움켜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자기 혼자만 가고! 너무해, 진짜.”
승태가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도 저한테 너무하시거든요.”
해연이 고개를 들어 승태에게 물었다.
“오늘 스케줄 더 있어? 행사장에 들어서 사진만 찍고 바로 나와도 되는 거야?”
“안 되지 않을까요. 브랜드 오픈 행사인데 파티 같은 거 하겠죠. 누나가 거기서 받은 협찬이 얼마인데 어떻게 얼굴만 비추고 나와요.”
“그러니까 사고를 내면……,”
“누나, 진짜. 그런 말 꺼내지도 마요. 그러다 잘못돼서 정말로…… 어라?”
승태가 속도를 늦췄다.
고급 매장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앞서 가던 차가 잠깐 멈추더니 그대로 휙 지나쳐버렸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승태가 혀를 찼다.
“쯧. 누가 버리고 간 모양이네. 하여간 이 동네는 진짜 자주 저런다니까.”
아직 몸집이 작은 개 한 마리가 길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다가 차에 치일 뻔한 모양이었다.
생김새를 보면 품종개가 확실했고, 그런 개가 이 부자 동네에 혼자 돌아다닐 일은 없으니 버리거나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은 길거리에서 헤맨 듯 더러워진 몰골이었다. 승태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버린 쪽에 무게를 두었다. 이 인근에서는 개를 잃어버리는 일보다 버리는 일이 더 흔했다.
“차 세워!”
“예? 뭐하시려고요, 누나.”
해연이 눈을 반짝 빛냈다.
“개잖아.”
“그래서요. 누나 개 싫어하잖아요.”
“안 싫어해. 하여간 세워.”
승태가 마지못해 차를 세웠다. 냉큼 문을 열고 뛰어내린 해연이 개를 향해 다가갔다.
“아, 누나!”
승태도 차에서 내려야 했다. 해연이 개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얘 다친 거 같아. 병원에 데려가야겠어.”
“네? 누나가요?”
“그럼 누가 해. 다른 차들은 그냥 지나가는 거 봤잖아.”
“아니, 누나 지금 미용실에서 나오는 길이거든요? 화장하고 의상 다 맞춘…… 악, 누나!”
해연이 더러운 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길에서 며칠을 보낸 개는 놀라거나 피하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얌전히 안겼다.
“얘 진짜 착하지 않아? 병원 가야 된다니까 그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 자, 병원 가자.”
“아, 누나! 안 돼요, 진짜!”
“안 되긴 뭐가 안 돼.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리고 보는 게 우선이지.”
“지금 내가 그 말 믿을 거 같아요? 실장님이 나 잡아먹을 거라고요!”
“너 대신 나 잡아먹으라고 할 거니까 걱정 마.”
해연이 개를 어르며 다시 차에 탔다.
“얘. 뭐하고 있어? 빨리 운전해. 평창동으로 가.”
승태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왜 평창동까지 가는 건데요! 저기 바로 동물병원 있는데!”
“아무 병원이나 데려가면 쓰겠어? 확실한 데 가야지.”
“그러니까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이제껏 동물은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아, 말 더럽게 많네. 어서 가지 못해? 아니면 나 택시타고 간다?”
“아, 진짜. 누나, 꼭 이래야 해요?”
승태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한 번 더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해연의 벤은 달나라 동물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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