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53화 (53/68)

#53. 더 질척대려고

2018.06.02.

“뭐라고?”

전화를 받는 눈썹이 구겨졌다.

[뭘 또 묻고 그래. 귀가 먹은 것도 아닐 텐데.]

수화기 너머의 음성은 그윽하고 감미로웠다. 적당한 높낮이와 또렷한 발음, 내용과는 상관없이 여유와 고상함이 넘쳤다.

그런 목소리로 듣는 사람을 이렇게 기분 더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재능이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지. 빨리 와.]

뚜, 전화가 끊겼다.

“……망할 자식.”

이현이 전화기를 팽개쳤다. 분명 소파로 집어던진 전화기가 무슨 장난처럼 팔걸이에 부딪쳐 화면이 깨졌다.

“젠장.”

이로써 달나라 티볼트의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기분을 망쳐놓은 죄, 그래서 멀쩡한 전화를 망가트리게 한 죄.

전화를 건 이유는 어떤 카페에서 무전취식하게 생겼으니 돈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경찰에 대신 전화해주겠다고 했더니 백과 함께 있다고 했다.

사실 그게 가장 큰 죄였다.

네가 뭔데. 왜 백이하고 브런치 카페 같은 델 가고 자빠졌어. 나도 딱 한 번 가봤는데.

이현은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은 지갑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상황이 엿 같아도 백을 경찰서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 있어?”

트드륵, 탁!

때를 맞춘 것처럼 방문이 열렸다. 제멋대로 들어서는 라현을 보며 이현이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저건 또 왜 하필 지금 나타나는 거야. 가뜩이나 기분 더러운데.

“꺼지지 그래?”

“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냐? 아직 무슨 일인지 얘기도 안 했어!”

“네가 할 얘기가 영양가 있을 리 없잖아.”

“아니, 진짜! 우리 사이가 나쁜 건 90퍼센트는 형 탓이란 거 알지? 형이 이따위로 구니깐 그러는 거라고.”

이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라현과 사이가 나쁘거나 말거나 별반 관심 없었다.

사촌이 아니라면 굳이 알고 지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뭐, 어쩌겠어. 더 성격 좋은 내가 참아야지. 백이가 개업했다며? 혹시 형이 해준 거야? 그 땅 주는 대신으로?”

이현은 잠깐 전화기를 소파에 던진 것을 후회했다.

지금 라현의 얼굴로 던지면 참 좋을 텐데.

“할 말이 그거라면 비켜.”

“아니, 잠깐.”

라현이 두 팔을 벌려 문을 사수했다.

“얘기는 듣고 가. 엄마한테 들었는데 요새 공사 문제 많다며?”

“네가 신경 쓸 일 없어.”

“무슨 소리야, 그게. 내가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그래도 태보에서 명함은 파야 될 거 아냐. 하여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참에 그냥 공사 엎으면 안 될까?”

“비켜.”

이현이 라현을 밀어낼 생각으로 팔을 붙들었다.

“아니, 형. 나 좀 진지하거든.”

라현이 힘을 주고 버텼다. 타이밍이 나쁘긴 했지만 라현도 아무 생각 없이 이현을 찾아온 건 아니었다.

“꼭 그 땅이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형은 시현이 형 몫에 손댈 생각이 없는 것뿐이지만 백이는 아냐. 백이한테는 고작 그런 거보다 더 중요한 문제야.”

라현의 말은 화를 부추기는 동시에 머리를 식혔다.

그건 이현도 아는 얘기였다. 백에게 절실한 이유가 있다는 것.

이현은 그 이유가 알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신 차라리 달아나버린 백을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너는 뭘 알아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백이가 나한테도 하지 않은 얘기를 너한테는 했다는 거야?”

“뭐, 그건 아닐 것 같고. 백이가 먼저 자기 얘길 하고 그런 적은 없잖아.”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 땅이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 이유조차 한 번 말하지 않았다.

그저 중요하다고 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형이 볼 때는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고 와서 이러나 싶겠지만…… 그냥 너무 답답해서 나도 생각을 해봤어. 백이가 왜 편지 한 장 덜렁 보내고 그만뒀는지. 왜 형한테도 아무 말 안 했는지, 그런 거.”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형, 백이 좋아하잖아. 사실 땅 같은 건 줘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안 주고 있는 건, 시현이 형 때문이잖아. 시현이 형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라는 그런 말 하지 마. 그거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럼. 뭐라는 건데.”

“형도 시현이 형 같을까 봐 그러는 거잖아. 그렇게 손 쓸 도리 없이 상처받고 망가질까 봐.”

“…….”

이현이 입을 다물었다.

라현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시현이 죽었을 때 라현은 그저 덜 자란 사고뭉치일 뿐이었다. 시현의 죽음을, 그 이유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여겼다.

“누굴 좋아하면 끝장을 보는 게 이 집안 유전자 같아서 무서운 거잖아. 그런데, 그러지 마. 그럴 필요 없잖아. 백이라면.”

라현은 백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것도 거슬리는 일이었다.

네가 뭐라고 백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형이 백이한테 얼마나 정신이 나갔는지, 우리 집에서 모르는 사람 있어? 나는 형이 조만간 공사 접는다고 할 줄 알았어. 그래도 하나도 안 이상했을 거야. 그 땅이 내 거였으면 나는 진작 줘버렸을 테니까. 백이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땅만 원한다는 걸 알았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나는 지금도 그 땅이 내 거였으면 좋겠어. 백이가 형을 좋아해서 나는 안 되겠다고, 그렇게 내 눈 보고 말한 지금에도 그런 마음이라고. 나도 그런데 왜 형은 그걸 못 해?”

“……뭐라고?”

이현이 라현을 붙든 팔에 힘을 주었다.

“윽, 아파. 나한테 성질부리지 말고 이럴 기운 있으면 다시 생각이나 잘 해봐. 형이 백이한테 빠진 이유가 있잖아. 백이가 정말로 형한테 돈이나 뜯어내려고 그러는 거 같았어?”

“아니, 그거 말고.”

시선이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았다.

“백이가 좋아한다고 했어?”

“뭐야,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

라현이 짜증을 부렸다.

“둘이 연애하는 거 아니었어? 뭐야, 그게. 그럼 더 질척거려보는 건데. 백이가 그렇게 딱 자르고 나와서 얌전히 있었던 거라고, 젠장. 그런데 형은 뭐한다고 그렇게 미적대고 있었어?”

이현이 라현의 팔을 놔주었다.

“비켜라. 갈 데 있어.”

“젠장, 사람이 이렇게까지 했으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 내가 사실……,”

이현은 놓아주었던 라현의 팔을 다시 잡아당겼다. 뭘 어떻게 했는지 라현의 몸이 반 바퀴 휙 돌아 옆으로 밀려났다.

“우이 씨! 뭐야, 이런 건 또 언제 배웠어! 이거 합기도 아냐?”

뭐든 하려고 안달이 났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흔적이 아직 몸에 배어 있었다.

“네가 보는 게 다가 아냐. 백이 두고 그런 걸로 고민하지 않아.”

사실 하긴 했다. 아주 잠깐이었고, 뭘 해도 부질없다는 걸 빠르게 깨닫긴 했지만.

“팔 부러질 뻔했네. 단증은 없어? 유단자가 일반인 패면 감옥 가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까지 힘 안 썼어. 고마워서.”

“안 쓰긴 뭘 안 써. 내가 신고해도…… 어, 잠깐. 뭐라고?”

“이제 좀 비켜. 진짜 가봐야 하니까.”

이현은 라현을 가볍게 밀어내고는 방을 나섰다.

라현이 인상을 쓰며 이현의 등에 대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병원 가서 진단서 뗄 거야. 합의금으로 대모동 땅 내놔. 그걸로 백이한테 프러포즈할 거니까.”

이현은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꿈도 꾸지 마.”

“왜? 전치 3주는 나오겠는데.”

“그거 말고, 프러포즈.”

왜냐면 나는 이제부터 질척거릴 거니까. 아주 열심히.

타다닥, 빠른 발걸음 소리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라현이 주인 없는 방에 남아 마저 짜증을 부렸다.

“고마운 인간이 뭐 저래. 재수없긴. 하긴, 현이현이 어디 가나. 나는 저런 인간이 뭐 예쁘다고 와서 거들고 있어. 제기랄.”

라현은 욱신대는 팔을 주무르면서 이현과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뭐든 핑계를 들어 이렇게 옥신각신할 거라고. 여차하면 주먹도 오가고 그럴 것이라고.

그때마다 백이 달려와서 “싸우면 안 돼요.”라고 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럼 못 이기는 척 짜증을 부리며 한번 봐준다는 식으로 나올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앞으로도 계속.

“젠장. 그러니까 재까닥 움직이란 말이야. 그깟 공사 그냥 뒤엎어버리라고.”

라현은 정말로 진지하게 회사에서 명함을 파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이현이 본부장이라니까 나는 사장 자리 달라고 해야겠다. 그래서 신사옥은 평택이든 평창이든 다른 데다 지어버리라고 해야지.”

* * *

다행히 카페는 멀지 않았다.

어쩌면 걸음이 계속 빨라져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어, 왔어?”

카페 안에 들어서자 참 훈훈한 광경이 이현을 맞이했다.

테이블을 한 군데 이어 붙여 자리를 아예 하나로 만든 다음, 손님이고 직원이고 할 것 없이 다 같이 사이좋게 둘러 앉아 하하호호 떠들썩대는, 그런 광경이.

테이블 위에는 카페에서 파는 온갖 음식과 음료가 푸짐하게도 쌓여 있었다.

이현은 저게 모두 다 서비스였다는 데 내기도 걸 수 있었다.

“생각보다 걸음이 느린데. 한참 기다렸잖아.”

누가 보면 백의 친척 오빠라는 망할 인간이 제 친구인 줄 알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서휘는 이현을 향해, 무려 돈을 대신 내달라고 불러낸 인간에게 싱긋 웃는 얼굴로 시비를 걸었다.

“백이하고 나는 하루 종일 밀려드는 환자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하다고. 바쁜 사람 배려 좀 해줘.”

백의 친척이라는 저 인간은 배려라는 말뜻을 다시 배우고 와야 할 인간이었다.

“갑자기 불러낸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고. 여기 계산 부탁합니다.”

“아, 예.”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왔다. 이현이 카드를 꺼내 매니저에게 넘겼다.

“카드 받았습니다. 37800원 결제 해드릴게요.”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난 서휘가 슬쩍 등 뒤로 다가와 참견을 했다.

“다 같이 결제해주세요. 하는 김에.”

매니저가 놀래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하지만 저건 다른 손님들이 드신 것도 있고, 저희가 서비스로 드린 것도 있고 한데요.”

“괜찮아요. 이쪽의 장점은 돈뿐이라.”

매니저가 난처한 얼굴로 이현을 쳐다보았다. 이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같이 하세요.”

“어……. 꼭 안 하셔도 되는데. 그럼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자릿수가 달라진 금액이 찍혔다.

하지만 어차피 이현에게는 한 자릿수가 달라지든 두 자릿수가 달라지든 별로 상관이 없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백의 친척 오빠라는 인간이 이런 일을 하는 의도였다.

“으음……. 이건 좀 재미없는데. 뭐라도 반응을 할 줄 알았는데.”

서휘는 무덤덤해 보이는 이현에게 힐긋 곁눈질을 던졌다.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건가. 자고로 장점이 돈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그걸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이 꼬이기 마련이지.”

“그런 건 아니고.”

이현은 되돌아오는 카드를 받아 들며 친근한 척 들러붙는 서휘와 거리를 벌렸다.

“이런 취급은 받은 적 없어서 기분이 더럽긴 한데, 그렇다고 백이 친척이라는 인간한테 화낼 만큼은 아니야.”

“이런.”

의외라는 듯 서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하면 곤란한데. 그건 좀 가엾잖아.”

어지간하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것까진 힘들었다.

“뭐가?”

“네가. 백이는 아무 사이 아니라는데 혼자서만 안절부절못하는 거. 나는 동정심이 아주 많은 존재라.”

“잘됐군.”

이현은 카페에서 건네준 영수증을 서휘에게 퉁겼다.

“계산해줬으니 여기는 알아서 정리해. 나는 하루 종일 환자들 보살피느라 피곤한 백이를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저런. 말 안 했나? 백이는 지금 나하고 같이 사는데.”

망할. 그냥 경찰서에 넘길 걸 그랬다.

“……그렇다고 내가 같이 바래다줘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지. 너는 알아서 돌아가.”

이현이 휙 등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백이었다.

“일어서. 태워다줄게.”

백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서휘 오, 빠하고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이현은 오빠라는 말이 매끄럽게 들려오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저쪽이 지껄이는 대로 백과 엄청나게 오붓하고 살가운 사이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뭐, 이러나저러나 열 받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한테 전화한 게 저치잖아.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현이현 씨. 저는,”

“할 말이 있어. 그 땅 얘기야.”

“…….”

주름 하나까지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백의 입술이 곤란한 듯 우물거렸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의 말대로 그 땅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그럼.”

백이 한숨처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 가세요?”

“더 놀다 가시지.”

다른 직원들이 서운함을 드러냈다. 백이 작게 웃어 보이자 다들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다.

“저 꼭 병원으로 놀러갈게요.”

“조심히 가세요.”

“또 오세요.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백은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에 답을 해준 다음 이현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 * *

“집까지 걸어가도 괜찮아? 차를 두고 왔어.”

밖으로 나오자 저녁이 벌써 밤으로 변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안드레아와 정원을 산책하던 그 시간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집에는 혼자 가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면 돼요.”

“내가 그러고 싶어.”

“저는 현이현 씨가 그러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제어가 되지 않았던 감정의 한 조각이 튀어나갔다.

“우리가 이제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

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피하는 게 아니라 이현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느낌이었다.

“아니면 내가 거기 가서 엉뚱한 것들을 볼까 봐? 이를테면, 호랑이 같은.”

“…….”

이번에는 답을 피하는 게 맞았다.

이현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속눈썹만 분주히 떨고 있는 백을 응시했다.

백은 그런 게 어딨냐며 농담으로 넘기려는 시도도 할 줄 몰랐다.

그 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는 게 진짜라는 얘기였다.

“호랑이 말고 또 뭐가 살고 있어?”

백이 아차 싶었던지 이제야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건…….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모동 땅에 관해 하실 말씀이 뭔가요.”

“그 얘길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얘기라면……,”

“북극도 아닌데 털이 온통 하얀 동물도 있었어. 그건 이름이 뭐야?”

“그……!”

백의 얼굴이 달처럼 하얘졌다. 아니, 달이 아니라 그날 본 그 하얀 동물처럼.

#Private collectio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