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스캔들 전야
2018.05.19.
“말했잖아. 한마디만 하겠다고. 나머지는 자네 몫이야.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떻게 믿든.”
오금도사는 거기서 딱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말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말해줘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대모산이 영산이고 거기 사는 영수들이 대대로 지키고 있는 곳이니 네가 아무리 땅문서를 가졌다 해도 네 땅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네가 만난 그 어여쁜 처자는 사실 백여우가 둔갑한 것이라고 직구를 던져봤자 오히려 더 거짓말 같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보고 깨달아야 했다.
제 입으로 먼저 인간이 아니냐 묻는 걸 보니 조만간 어떻게든 뭔가를 알아내긴 할 것이다.
어쨌거나 대모산 문지기도 이겨낸 인간이었다.
그 땅이 돌고 돌아 이현의 손에 떨어진 것을 보면, 그리고 이현이 그 땅의 원래 주인과 얽힌 것을 보면 분명 뭐가 있어도 있어야 했다.
“그래도 이 말은 해주지. 자네가 정말로 그 땅에 대해 뭔가 알아내고자 한다면, 그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걸세. 왜냐면 분명 연이 닿아 있으니까. 이제껏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생각해보면 될 게야.”
이현은 제 몫이라는 얘기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성큼 몸을 일으킨 그가 오금도사의 집을 떠났다.
“스승님.”
참 불편하고 미묘한 자세로 엉거주춤 머물러 있던 제자가 스승의 곁으로 다가왔다.
궁금한 것으로 따지자면 그도 누구 못지않았다.
다만 스승이 어떤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대쪽 같다는 것을 알기에 알려달라 졸라대지 않는 것뿐이었다.
“제자가 배움이 짧아 그런지 좀 헷갈립니다만, 그래도 어째 현 회장 댁 둘째 손자한테는 스승님께서 참 무르신 것 같습니다?”
“으엥? 이 몸이 무르다니. 나이 잘 처먹은 제자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아니, 진짜 그러시거든요? 절대 말할 수 없다, 말씀만 그러시지 계속 야금야금 입을 여시지 않습니까.”
“어허. 이놈이 진짜.”
빡!
오금도사가 제자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주환이 머리를 감싸 쥐고 울컥 소리를 쳤다.
“왜 애먼 제자를 때리시는 겁니까?”
“왜긴 왜야. 아픈 데를 콱 찌르니 그런 게지.”
“예? 그럼…….”
“에고, 나도 모르겠네. 내가 왜 이리 갈팡질팡 대는지.”
오금도사가 둔해 빠진 줄 알았던 제자놈이 제법 눈치는 있네 어쩌네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가자, 이놈아.”
“어디를 가시게요?”
“어흠. 밥 때가 되지 않았느냐. 오늘은 네 그리 말하던 고기 뷔페를 한 번 가보자꾸나.”
“아이고, 스승님!”
제자는 단박에 머리를 쥐어박혔던 설움을 잊었다.
사실 요새 현 회장 댁 식구들이 들락날락거리며 스승의 수입이 제법 짭짤했단 것을 알고 있던 터였다.
그걸 입 싹 씻고 계속 마른 반찬에 잡곡밥만 먹던 중이라 내심 불만이 컸더랬다.
“거기 계십시오. 제자가 신을 꺼내오겠습니다.”
오금도사는 후다닥 신발장으로 달려가는 제자를 보며 수염을 쓸었다.
“그간 이것저것 가르쳤지만 그중에서 눈치를 가장 빨리 배우는 것 같단 말이야…….”
뭐, 그래도 눈치 빠른 제자를 둬서 나쁠 리 없었다.
“어흠. 앞장서라, 제자야.”
“예, 스승님.”
* * *
“아, 정말.”
해연이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전에 매니저가 득달같이 달려와 그녀를 말려주었다.
“누나! 안 돼요! 오늘 촬영 있잖아요!”
“아……. 그랬지.”
해연이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화보 촬영이 예정된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요새 해연은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날 이후로 백은 단 한 차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벌써 한참 됐는데. 배터리는 남아 있나 몰…… 아, 배터리! 그래, 배터리가 다된 거야!”
해연이 운전 중인 매니저에게 소리를 쳤다.
“우리 아직 시간 있지? 충전기 사러 가자. 당장 사서 보내줘야겠어.”
매니저가 거울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이래요, 누나. 사면 보낼 데는 알아요?”
“아, 젠장…….”
해연은 기어코 손톱을 한번 아작 깨물고 말았다.
“으악! 누나!”
“아, 진짜!”
잇자국이 자그맣게 난 손톱을 보며 해연이 짜증을 부렸다.
“그러게 전화는 왜 안 받아서! 이거 샵에 다시 가야 되잖아!”
매니저는 그녀의 짜증을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봐요. 에이, 됐어요. 그 정도는. 스튜디오에서 포토샵으로 수정할 거예요.”
“그래? 그럼 더 씹어도 돼?”
“아니, 누나. 그건 좀 자제하시고요.”
“하, 답답해.”
매니저는 측은하게 해연을 바라보았다.
해연이 예민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만년 다이어트로 인한 공복 상태가 가장 큰 문제 같았지만, 사실 그보다는 만성이 된 외로움 탓이었다.
해연은 중학교 때 그보다 나이 많은 언니와 나란히 데뷔했다.
소속사에서는 언니보다는 해연이 더 상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해연이 신인 아역배우로 여기저기 드라마나 영화에 단역을 맡을 때마다 언니는 회의라 기록하지만 뒤로는 접대라 부르는 그런 자리에 불려 다녔다.
어찌 보면 언니의 희생으로 해연이 자리를 잡아간 셈이었다.
그러던 중에 언니가 죽었다.
꽤 지저분한 일이 얽혀 있었다. 소속사 간부들과 듣기로는 모 대기업 집안까지 한 통속이 되었다고 했다.
해연은 그 뒤로 아주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소속사는 강제로 계약을 해지하고 해연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해연은 그때 버는 돈으로는 언니와 살던 반지하방의 월세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신인 시절 찍었던 독립영화가 우연히 해외영화제에서 당선되며 주목을 받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전 소속사보다 더 영향력 있는 새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는 행운이 오지 않았다면 해연은 언니처럼 죽을 생각이었다.
우연히 해연의 가족사를 듣게 된 매니저는 해연이 까칠하고 성마르게 굴 때도 그저 다 안쓰러웠다.
태보의 오너 일가와 연을 만들겠다며 이리저리 찌르고 다니던 일을 소속사 몰래 거들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사실 해연이 무슨 짓을 하겠다고 해도 그는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누나 갉아먹는 거예요.
그렇게 말했을 때 해연의 답이 “알고 있어. 갉아먹히고 싶은 거야. 더 아프고 더 독해졌으면 싶어서. 그럼 죽기 전에 그 인간 칼로 한번 찔러보기라도 하겠지.”였다면 더더욱.
그런데 요새는 좀 달라졌다.
TB의 본부장이라던가 하는 인간을 스토킹할 때는 바짝 말라붙은 선인장 같았다면, 지금은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려도 뭔가 더 촉촉한 느낌이었다.
잘 안 풀리는 연애를 할 때 투정을 부리는 것도 같달까.
이런 말을 하면 해연은 아마 코웃음을 치겠지만, 하여간 지금은 좀 귀여워졌다. 좀이 아니라 많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받으라고 줬는데. 자기가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해놓고서는.”
정확히 말하면 전화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도울 수 있으면 언제든 돕겠다고 했지.
해연의 로드 매니저 승태는 대체 그 남자가 누군지 참 나쁜놈 같았다.
아니, 나쁜놈이고 아니고를 떠나 유부남 사기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데 한 표였다.
전화가 없다는 거짓말부터가 문제였다. 분명히 제 사생활을 철저히 감춰야 하는 인간인 것이다.
“문자 보내요, 누나. 문자는 나중에 확인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내가 안 했겠어?”
체감상으로는 백 통도 넘게 보낸 것 같았다.
백이 씨, 잘 있죠?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 나하고 커피 마실래요?
백이 씨, 왜 전화 안 받아. 내가 맛있는 밥집 알아놨어요. 회 좋아해요? 일본산 재료는 일절 안 쓰는 곳이래요.
백이 씨, 나 외로워. 백이 씨 말대로 또 아파진 거 같아. 치료해줘요.
백이 씨, 나하고 놀기 싫어요? 응?
백이 씨, 현이현 그놈 나쁜 인간이라니까. 왜 내 말을 안 믿어.
백이 씨…….
기타 등등.
슬프게도 백은 그 모든 애타는 문자에 한 차례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해연은 결코 백이 저를 피하거나 귀찮아해서 그러는 게 아닐 거라고 믿었다. 백이 그럴 리 없었다.
이제껏 전화기도 없이 살았다니 문자에 답장을 하는 법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제 잘못이었다. 진작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줬어야 했다.
“하……. 보고 싶다.”
한참 백을 떠올리던 해연이 한숨처럼 그리움을 토해냈다.
“아, 안 되겠다. 현라현한테라도 전화해봐야지.”
해연이 새로 산 전화기를 꺼내 들어 라현의 번호를 눌렀다.
[왜.]
참 언제 들어도 싸가지 없는 말투가 들려왔다. 이 집안 식구들한테는 예의를 기대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난데요.”
[알아. 용건이 뭔데. 왜 자꾸 전화해.]
해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뭐 저한테 볼일 있으려고. 너처럼 예의 없는 인간은 나도 질색이야.
“백이 씨 보고 싶어요. 연락 있어요?”
[…….]
전화기 너머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이봐요, 현라현 씨?”
[……나도 죽겠어. 여기는 완전 초상난 집 같아.]
“저런.”
수화기 너머 라현이 울먹이는 것도 같았다.
뭐야, 그런 거 보니까 애새끼 같고 좀 귀엽네.
“나도 그런데……. 전화는 한 번도 안 받고.”
[내 말이. 제기랄, 현이현이 일 잘한다는 게 진짜야? 대체 왜 멍청하게 지 애인도 하나 못 찾고 그러는 거야.]
해연이 정색을 했다.
“아니, 애인은 아니거든요?”
[뭐?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백이 씨가 사귄다는 말 안 했으니까요. 어쨌거나 내가 직접 듣기 전까지는 사귀는 거 아니에요. 힘닿는 데까지 말려볼 거예요.”
[뭐…… 그건 좀 좋은 생각 같지만.]
“백이 씨한테 현이현 씨가 가당키나 해요? 그보다 백 배는 더 좋은 사람 만나야죠. 아니면 내가 허락 못 해.”
[당신이 뭔데 허락을 하고 말고 해. 그런데 현이현이 부족하다는 데는 나도 동감이야. 백이 만 배는 더 아깝지.]
“현라현 씨 이제 보니 말이 좀 통하는 인간이었네.”
[뭐, 당신도.]
잠시 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이따 저녁에 시간 있어요?”
[언제 시간 날 때 있어?]
그렇게 술 약속이 생겨났다.
해연은 실컷 백 얘기를 할 생각에 촬영 내내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승태는 조만간 스캔들 기사가 터질 것 같다며 조심해야겠다고 소속사 실장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 * *
“에휴…….”
“냐아.”
초상집 같다는 라현의 말은 아주 과장만은 아니었다.
백이 있을 때는 별 일 없어도 늘 몸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했는데 요새는 뭘 해도 흥이 나질 않았다.
쌀밥은 모래알 같았고 찰밥은 질겼다. 게를 삶아도 새우탕을 끓여도 어째 그리 식욕이 안 도는지 모르겠다.
“안드레아, 게도 별로니?”
“냐아.”
[그럼 내가 입맛이 있겠냥.]
“어쩜 좋니. 게도 안 먹으면.”
[만사 다 귀찮다냥. 요샌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냥.]
슬픈 눈으로 한숨을 푹 내쉰 안드레아가 식탁 아래로 풀썩 뛰어내렸다.
거짓으로 둘러댔던 우울증이 진짜가 됐다.
안드레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창문 너머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했다.
[우리 백님이 저짝에는 계실까냥…….]
안타깝게도 그쪽은 인왕산 방향이라 백이 사는 대모산과는 방향이 정반대였다.
평창동 구 씨라도 있었다면 제대로 된 방향을 짚어줬겠지만 그의 처지도 다르지 않았다.
탑골공원 은행나무 꼭대기에 틀어놓은 둥지에 처박혀 시름시름 앓고 있다 했다.
“정말 걱정이네……. 쟤가 왜 저리 밥을 안 먹지. 어제도 내내 굶는 것 같았는데.”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식당을 빠져나가는 안드레아를 바라보며 현 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회장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좀 드십시오.”
윤 실장의 걱정은 현 여사의 두 배였다.
“식사를 너무 안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도 입맛이 안 도네요.”
걱정이 무색하게 현 여사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사실 입 안이 영 깔깔한 것은 윤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이 집이 이렇게나 넓고 적적한지 뼈가 시릴 만큼 느껴졌다. 서울 공기는 참 너무한다 싶었고 하늘은 푸르기는커녕 똥색이 아니면 다행이었다.
“윤 실장은 천천히 들어요.”
현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조용히 식당을 나섰다.
“이러다 아무래도 큰일이 나지 싶네…….”
윤 실장은 건드린 흔적도 없는 밥그릇을 쳐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그때였다.
“어머나! 안드레아!”
현 여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부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윤 실장! 안드레아가…… 우리 안드레아가 쓰러졌어요!”
현 여사가 다급히 안드레아를 안아 들었다. 요새 정말로 살이 훅 빠진 탓에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히 들린 안드레아가 가늘게 울어댔다.
전후 상황은 이러했다.
식사 후에는 백과 산책하던 일을 기억하는 안드레아가 거실 한쪽에서 외부의 평상으로 이어지는 길로 나서다 미처 유리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이마를 꽝 박아버린 것이었다.
안드레아가 홱 뒤로 넘어졌고, 그걸 마침 현 여사가 목격했다.
“진정하십시오, 부회장님. 지금 이 교수님께 전화 넣겠습니다.”
“이 교수를 언제 기다려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동물병원이 어디예요? 이 교수는 거기로 오라고 하세요!”
현 여사는 그대로 안드레아를 안은 채 현관으로 달려갔다.
윤 실장은 다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안드레아…… 이를 어쩌면 좋니.”
안드레아는 이 모든 소란이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어디로 데려가든 말든 누워 잠이나 자고 싶었다.
“냐아아…….”
[나 좀 내버려두라냥.]
그 힘없는 울음이 고양이의 언어를 모르는 인간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재빠르게 말을 주고받은 윤 실장이 전화를 끊고는 현 여사에게 말했다.
“부회장님. 근처에 새로 생긴 동물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알았어요.”
* * *
현 여사 일행의 차가 엊그제 갓 생겼다는 동물병원 앞에 도착했다.
차를 타고 걸린 시간은 딱 1분이었다. 이 거리라면 달려오는 게 더 빠를 뻔했다.
“여긴가요?”
“그런 건 같습니다만…….”
차창을 통해 밖을 보는 윤 실장의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히 [달나라 동물병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어느 모로 봐도 동물병원인 게 확실한 그곳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유리벽에 바싹 달라붙어 안을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들은 다 뭐지요?”
하나같이 목줄을 한 개를 데리고 있거나 이동장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서는 진찰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글쎄요…….”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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