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38화 (38/68)

#38. 당신이라는 가시

2018.04.10.

놀랐다.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왜…… 그랬을까요. 현이현 씨가.”

백이 두 손으로 가슴을 꼭 눌렀다.

마음이 어느 한 부분만 유달리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자꾸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일 필요가 없는데.”

그토록 평화로운 산에서도 죽음은 언제나 일어났다.

죽음은 삶의 일부였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고통도, 그것들이 지나갔을 때 마침내 찾아오는 고요한 평화도 모든 게 삶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조금 다르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이유가 없기에 정말로 큰 잘못이라고 했다.

“가진 게 많잖아요, 현이현 씨와 그쪽 집안은.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거죠.”

“그럼 현이현 씨가 죽인 사람들은 현이현 씨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했던 건가요?”

“설마요.”

신해연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감히 그럴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사람들을 상대로.”

“그럼요?”

“잠깐 꿈을 꿨을 뿐이에요. 그 대가로 죽었죠.”

백은 이현을 잘 안다는 아주 예쁜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백은 그런 얼굴을 종종 보았다. 제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그래도 놔두면 결국 목숨을 앗아가는 그런 커다란 상처를 입은 산의 일족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운이 좋아서 죽기 전에 백을 찾아온 그들은 물기가 가득 어린 눈으로 아픔을 얘기했다.

“저는 신해연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무척 아프다는 건 알겠어요.”

해연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나야말로 뭘 모르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명확한 얘기 아닌가요? 그쪽이 만나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어요. 그까짓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한 사람이에요. 지금이야 좋겠죠. 그런데 그게 다야. 그런 사람은 진심이란 게 없어. 싫증 날 때까지 데리고 놀다 감정 한 올 없이 내팽개칠 거예요. 그리고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죠. 그런 인간이 현이현이야.”

“아니요.”

백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현이현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신해연 씨는 아파요.”

“지금 내 걱정을 할 때야? 당신 걱정을 하라고요, 고백 씨.”

“상처가 있으면 보살펴야 해요. 그래야 낫거든요. 그대로 놔두면 안 돼요.”

백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해연의 손을 잡았다.

해연이 당황해 어깨를 움찔했다.

“뭐하는 거야?”

“잠시만 이대로 계세요.”

“…….”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해연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도닥였다.

해연은 그 손이 너무 따듯해서 놀랐다.

“살아 있으면 누구나 언제든 다칠 수 있어요. 어떤 상처는 잘 낫지만 어떤 상처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도움이 필요해요.”

“뭐라는…… 거야.”

“저는 그래서 아픈 게 각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덜 아픈 쪽이 더 많이 아픈 쪽을 도와줄 수 있게요.”

“뭐라는…….”

“저도 마음이 아파요.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질렀다면 현이현 씨도 벌을 받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신해연 씨가 저보다 더 많이 아파요.”

“…….”

해연은 입을 다물었다.

백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기운이 몸 전체에 번져갔다. 그 온기가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었다.

해연이 눈을 깜박였다.

목이 막힌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상……해. 따듯해.”

백이 생긋 웃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건 치술이 잘 듣는다는 뜻이에요.”

“치술?”

“네. 상처를 낫게 해주는 힘이에요. 사실 상처는 스스로 낫게 하는 거고 저는 그걸 조금 거드는 것뿐이지만요.”

“…….”

해연은 백의 웃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라현이 얘기하기로는 참 이상한 여자라고 했다.

뭐든 해주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주고 나면 오히려 이쪽이 받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멋대로 흘러간다고. 그 시간 동안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놈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러면서 이현이 왜 치사한 수작까지 부리면서 백에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도 했다.

할 수만 있으면 자기도 그럴 거라고.

해연도 라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됐어요, 신해연 씨.”

백이 손을 놓아주면서 말했다.

“하지만 오랜 상처는 낫는 것도 오래 걸려요. 오늘로 다 나았다고는 말할 수 없,”

“그럼요.”

해연이 반대로 백의 손을 잡았다.

“예?”

“다음에도 또 해줄 거예요? 내가 나을 때까지?”

백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또 많이 아프면 찾아오세요. 도울 수 있으면 얼마든지 도울게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이 조금 어색했다.

원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생각해본다면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해연은 이제 백을 당황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그래서 이현과 오해를 쌓도록 만들겠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정말 예쁜 사람이구나.

예뻐서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해연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여기. 번호 좀 찍어줘요.”

“네?”

“전화번호 알려달라고요.”

백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모르는데요.”

“전화번호를 몰라요? 아니, 전화가 없어요?”

“네.”

“뭐가 그래.”

해연이 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제 전화기를 쥐어주었다.

“그럼 이거 받아요.”

“네?”

“이거라도 갖고 있어요. 그래야 내가 전화를 하죠.”

“저는 필요가 없는데요.”

“내가 필요해요.”

해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해놓고 보니 조금 웃기긴 했다.

내가 진짜 뭐하는 거람.

둘 사이를 방해하겠다고 온 건데. 왜 내가 매달리고 있어.

“이런 말 이상하겠지만…… 전화하고 싶을 것 같아요. 또 만나고 싶을 것 같고. 그러니까 받아줘요.”

백의 입장에서는 별로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백은 해연이 선하고 외로운 인간일 거라 생각했다. 선한 인간일수록 영수를 따르고 함께 있고자 했다.

“알겠어요. 그럼 갖고 있을게요.”

“후, 다행이다.”

그때 휴대전화가 짧게 울었다.

이현이 나타났다는 매니저의 신호였다.

“이번 건 안 받아도 돼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꼭 받아줘요. 그건 내 전화일 거니까.”

“그렇게 할게요.”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는 백은 손을 잡고 있지 않아도 따듯했다.

해연은 백을 따라 웃음 지었다. 아주 작아서 보일 듯 말 듯했지만 그건 해연이 몇 년 만에 짓는 연기가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내가 한 말도 한번 생각해줘요. 현이현 씨 계속 좋아하면 고백 씨가 상처받을 거예요.”

해연은 진짜 웃음과 함께 진심을 남기고 떠났다.

* * *

“진짜였네.”

이현은 고작 하루 만에 포크와 나이프를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된 백을 보며 놀랐다.

놀란 것도 있지만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그럼 내가 해줄 게 없잖아. 안 해봐서 그렇다며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못 보고.

백이 한 입 크기로 잘 자른 새우 요리를 포크로 찍다가 되물었다.

“뭐가요?”

“빨리 배운다는 거.”

“저는 거짓말 안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알아.”

하지만 아쉬운 것은 별개였다.

박 과장이 고른 레스토랑은 나쁘지 않았다.

직원들이 유난히 이쪽 테이블에 친절한 것 같았지만 문제가 될 만큼은 아니었다.

현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방문 탓에 조금 늦었지만 백은 그런 것을 문제 삼진 않았다.

음식 수준도 적당했고 백은 늘 그렇듯이 예뻤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대체 그게 뭘까.

“음식은? 맛있어?”

“네.”

“술은?”

“네. 맛있어요. 저는 머루주를 아주 좋아합니다.”

와인을 머루주라 부르는 것도 꼭 백다웠다.

“그리고, 또?”

“……? 또라니요?”

“또 좋은 건 없어?”

백이 포크를 쥔 채 생각에 잠겼다.

“박 과장님이 아주 친절하셨어요.”

박 과장이 여기서 왜 나와.

이현이 미간을 구겼다.

“그런 거 말고.”

“그리고 다른 분들도……,”

“아니, 그거 말고.”

가끔 백의 화법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가끔은 곤란할 때도 있었다.

“그럼요?”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나는?”

“네?”

“나하고 저녁을 먹는 건? 그건 좋아?”

“음…….”

이번에는 생각이 더 길었다.

아니, 이번 것은 충분히 백이 너무했다. 이현은 요즘 들어 빈대 사이즈만큼 좁아진 듯한 제 속이 거기서 더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게 대체 그렇게 고민까지 해가면서 말해야 되는 일이냐고.

그런 불만을 중얼대고 있자 백이 달칵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테이블이 아닌 제 몸 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듯싶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럴 수가.

이현이 입을 다물고 백을 쳐다보았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현은 단 한 걸음이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걸까.

저 혼자 조급했던 마음이 그를 속이고 있었던 것뿐일까.

“유감인데.”

유감이 더해진 시선은 제법 무거웠다. 백도 그것을 느꼈다.

“나는 좋거든.”

식사가 아니라 뭐든 좋았을 것이다. 단둘이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은 머뭇대며 말을 이었다.

“저도…… 좋을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겨버렸다.

모른 척하고 있으려고 해도 그게 어려웠다.

“현이현 씨가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나서부터 저는 좀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왜 아픈 건지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사는지 백은 다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런 걸까요?”

“대체 그런 얘길 누가…… 아냐, 이건 됐어.”

한순간 예리해지던 이현의 표정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어차피 누구를 통하든 듣게 될 얘기였다.

이현이 시선만큼이나 무거워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궁금해? 내가 정말 사람을 죽였는지?”

백은 잠시 답을 골랐다.

“……그 얘기를 해준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시 물을게. 궁금하긴 해? 그런 짓을 했다는 나라는 인간이?”

숨을 한번 내쉴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면 그게 궁금해서 마음이 아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현이 쓰게 웃었다.

“그건 다행이네. 관심은 있다는 소리니까.”

백은 지금 이현이 짓는 쓴웃음에도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얘기는 식사 마치고 할게. 밥 먹으면서 할 얘기는 아니라서.”

이제 고작 애피타이저가 나온 식사는 아주 빨리 끝났다.

그렇게나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 * *

“현이현 씨는 안전벨트를 맬 줄 아세요?”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현이 문을 열어주는 동안 먼저 조수석에 오른 백은 뒤이어 이현이 제 자리에 앉자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현이 설마 그걸 모르겠어, 라고 하지 않은 것은 백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였다.

“……가끔 헷갈려.”

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턱을 끄덕이며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럼 제가 잘 가르쳐드릴게요. 이쪽 고리를 먼저 잡으시고요……,”

백이 이현의 왼손을 잡아 안전벨트를 쥐게 했다.

그건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이현은 코앞에서 바지런히 움직이는 백의 머리통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지금 두 가지가 굉장히 궁금해졌는데.”

“예?”

손을 쥔 채, 가슴에 바싹 붙어선 채 백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맑고 커다란 눈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현은 항상 그게 궁금했다.

어떻게 저 눈은 저렇게 맑을 수 있는지. 한 점의 더러움도, 거짓도 의심도 없을 수 있는지.

“내가 무섭진 않아? 사람을 죽였다고 했잖아.”

“무섭지 않아요. 현이현 씨는 저를 죽일 수 없으니까요.”

“거부감이라도. 아니면 다르게 보인다거나.”

“아니요. 현이현 씨는 현이현 씬데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백의 눈은 그저 맑을 뿐이었다.

“그럼 두 번째. 안전벨트 매는 법을 아는지는 왜 물어봤어?”

“아, 현라현 씨는 모르고 계셔서요. 제가 가르쳐드렸어요.”

역시나 그럴 것 같았다.

“망할 자식.”

“네?”

이현이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욕을 하자 백이 깜짝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반면에 이현은 단 한 차례도 눈을 깜박대지 않았다. 시선이 백에게 닿은 채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이현이 백에게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백의 머리를 감쌌다.

“세 번째.”

“궁금한 건 두 가지라고 하셨어요.”

“키스해도 돼?”

“…….”

백은 지금에서야 이현이 눈도 깜박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온전히 저한테만 고정된 눈이 어둑한 차 안에서 반짝였다. 여기가 산속이었다면 별똥별이 날아온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백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현이 굳은 듯 보이는 것처럼 제 몸도 그렇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키스해도, 돼?”

“…….”

대답보다 묻는 게 더 빨랐다.

“키스해도 돼?”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현의 질문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백은 좀 전에 삼킨 숨을 이제야 내쉬며 간신히 답을 했다.

“……네.”

키스는 하고 싶을 때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대답이 끝나자마자 입술이 삼켜졌다.

이현과 키스를 한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마치 처음 하는 키스 같았다.

모든 감각이 새로웠다.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머리를 안은 손도 귀를 달구는 숨소리도.

제 호흡을 삼키는 입술의 움직임도 온몸에 번져가는 열기도. 다른 것은 느낄 새가 없이 온통 이현에게 집중되는 감각들이.

“…….”

갈 곳을 찾던 백의 손이 이현의 옷깃을 쥐었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몸을 누르는 이현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아…….”

아주 길던 키스가 끝났다. 아니, 잠시 멈췄다.

이현은 두 팔로 백을 안으며 귓가에 입술을 누르고 말했다.

“지금, 확신이 생겼어.”

백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에 이현의 어깨를 꼭 붙들었다.

“뭐……가요?”

“당신은 나를 좋아해.”

이현이 백을 안은 채로 고개를 들어올렸고, 그래서 눈이 마주쳤다.

“그…….”

……렇습니다.

백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키스가 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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