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천국까지 한 걸음(2)
2018.04.07.
“아,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처음 와보는 곳도 아닌데 박 과장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같은 소리를 했다.
“그런가요?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이전하고 똑같은데…… 아니, 그래도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오너 일가의 개인 경호를 담당할 때는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던 곳이었다.
이곳은 현성태 회장의 죽음 이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가족들이 떠나고, 별채의 넝쿨나무가 좀 더 자란 것 빼고는 정원석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한옥집이기 때문일까.
가끔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곳 같았다.
가족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급작스러운 상처까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박제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 새 소리가 들려서 그럴까요?”
윤 실장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 소리만이 아닐 겁니다.”
들어보면 온갖 동물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게 시끄러운 대신 정겹게 들려온다는 게 퍽 희한했다.
윤 실장을 비롯한 고용인들은 벌써 익숙해졌다.
이제 새벽을 깨우는 병돌이와 병순이의 꼬끼오 소리가 안 들려오면 어디가 아픈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상하게 푸근한 느낌이 드네요. 공기도 맑은 것 같고.”
박 과장이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가 맑은 것뿐 아니라 냄새도 좋았다. 산속에라도 온 것처럼 청량하고 개운한 향이 났다.
윤 실장이 슬쩍 웃었다.
“그렇지요? 저도 밖에 나갔다 오면 종종 느낍니다. 덕분에 요새는 편두통이 사라졌지요.”
윤 실장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같은 소리였다. 현 여사는 불면증이 사라졌고 안드레아는 다시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불편한 구석이 없자 다들 성격들도 유해졌다. 이상하게도 집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했다.
“아니, 무슨 그런 좋은 일이 다 있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다 고 선생 덕분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정확히 이렇다저렇다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윤 실장은 백이 온 다음부터 이 집이 달라진 것 같다고 믿었다.
“아, 저기 나오시는군요. 고 선생님! 이쪽입니다.”
박 과장이 윤 실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헙!”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사람이 예뻐도 저렇게 예쁠 수가.
단지 생김새가 예뻐서만은 아니었다.
한눈에도 아주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은 상냥했고 태도는 우아했다.
오밀조밀한 흰 얼굴이 어찌나 말간지 혼자서만 빛이 났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예의바른 인사는 기품이 넘쳤다.
가슴이 하도 떨려와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아, 예. 처, 처음 뵙겠습니다. 여, 영광입니다!”
윤 실장이 알 만하다는 듯 박 과장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박 과장님. 정신 차리세요.”
“예? 아…… 예! 오늘 두 분이 밖에서 만나기로 하셨다고 그래서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식당도 제가 온 서울 시내를 뒤져서 아주 좋은 곳으로 알아뒀습니다!”
저녁 식사를 제안한 것은 이현이었다.
시간에 맞춰 차를 보낸다고 미리 말을 해두었다.
백은 박 과장을 향해 생긋 웃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박 과장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후하, 후하 내쉬었다.
감사하다는 말이 이렇게 과분하고 황송한 말일 줄이야.
윤 실장이 걱정 어린 눈으로 박 과장을 보았다.
“박 과장님. 운전은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틀림없이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박 과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오늘 빈틈없이 안전하고 편안한 드라이빙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서일 것만 같았다.
“타십시오, 고 선생님.”
박 과장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백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현이 보내온 큼지막한 차에 탔다.
어제 그 엄청난 선물들을 풀어서 정리하는 것을 새벽까지 거들었던 이현은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이런 말을 남겼다.
내일은 우리 데이트하자.
데이트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 말을 할 때 이현의 표정이 어떤지는 똑똑히 기억했다.
가슴을 두근대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일찍 눈을 뜬 백에게 구 씨가 데이트가 뭔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이현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들의 첫 데이트였다.
* * *
“어쩐 일이십니까?”
뜻밖의 방문이 이현을 찾아왔다.
백과의 저녁 약속을 30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내가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잖니.”
현 여사는 마땅히 앉을 데가 없는 이현의 사무실에서도 별로 불편한 눈치가 아니었다.
“자리 옮겨야 합니까?”
“긴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집에서 할 얘기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부러 회사로 찾아왔을 것이다.
현 여사가 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나 나나 둘러말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들이지. 짧게 하마. 공사 진행 어떻게 되는지 들으려고 왔다.”
그 공사라는 게 현라현을 내쫓기 위해 억지로 진행하는 별채 얘기는 아닐 것이다.
“다음 달에 착수할 겁니다. 도로 사용 허가 때문에 일정 조율 중입니다.”
“길어야 한 달이겠구나.”
“그렇게까지 안 걸립니다.”
현 여사가 잠시 이현을 쳐다보았다. 표정이 복잡했다.
오금도사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있거나 없거나 시현은 죽었다.
현성태 회장은 오금도사의 시기적절한 조언이 오늘날의 태보를 있게 했다고 했지만 그건 어떻게든 끼워 맞출 수 있는 얘기였다.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를 모르겠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 땅 말이다.”
“……. 말씀하세요.”
이현의 대답에 약간의 틈이 생겨났다. 그 짧은 틈은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을 만들었다.
“왜 하필 그 땅이었니?”
“이제 와 묻기에는 늦지 않았습니까?”
“궁금한 게다. 그게 시현이 때문인지.”
“…….”
틈이 길어졌다. 긴장도 늘어났다.
“그 땅이 시현이 몫으로 가긴 했다만 사실 누구한테 가든 조건은 똑같았을 게다.”
“건드리지 말라는 조건이요? 그래서 처분하는 대신 쓰겠다고 한 겁니다.”
“쓰는 건 건드리는 게 아니라니?”
“이미 끝난 얘깁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현에게 넘기고, 그리고 물러나자고.
집안에 남은 상처는 저 몫으로 끌어안겠다고. 젊은 사람들은 다르게 살라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더구나.”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회장님 뜻대로 그건 남겨두자. 그게 맞는 것 같아.”
……툭.
이현이 쥐고 있던 펜이 가볍게 책상 위로 떨어졌다.
대신해서 무거워지는 것은 긴장감이었다.
“이제 와서 말입니까?”
“공사 시작 전이다. 시작한 것보다야 손해는 덜 보겠지.”
“손실이 적어도 안 됩니다.”
이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오너 일가의 변덕으로 회사에 손실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구태의연한 경영에서 벗어나는 게 그가 하려는 일이었다.
“쓸데없는 얘기였습니다, 부회장님.”
“나 좋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너를 위한 거라고 해도 안 되겠니? 그 땅을 건드리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면 말이야.”
현 여사의 말에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 아마도 조금은 간절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현에게는 현 여사 스스로도 다 믿지 못하는 얘기를 받아들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다각도로 검토를 마친 일입니다. 신사옥 건설을 전제로 대모동 땅을 사용하는 게 가장 자금 부담이 적고 기대 이익은 컸습니다. 어떤 면에서 안 좋은 일이라는 겁니까?”
“안 좋은 일이라는 게 꼭 돈 문제만은 아니잖니. 그 땅은 늘 돈 이상의 의미였다.”
“그런 거라면 이유도 못 됩니다.”
“……그래. 역시 그렇게 나오는구나.”
이대로 가면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말리고 싶었다. 오금도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 얘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 제 마음이 그랬다.
현 여사가 결론을 지었다.
“그렇다면 나도 반대하마.”
“TB에 부회장님 실권은 없습니다. 무의미한 일입니다.”
“집안에서라면 아직 있다.”
“연 전무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쪽이라면 양손을 번쩍 들어 부회장을 거들고 나설 것이다.
“아니. 고 선생 말이다.”
“네?”
실소가 먼저 나왔다.
“그게 상관이나 있는 얘깁니까?”
“주고받자는 거야. 네가 실권 운운하며 내 말을 무시할 작정이라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부회장님.”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그게 혹시 백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현 여사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좀 알아봤다. 고 선생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도 너와는 이미 아는 사이라고 했지. 박 과장은 너한테 스토커가 있었다고 했고. 고 선생 주소가 재미있게도 대모동이라더구나. 이게 다 우연이니?”
“……대모동?”
이현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니, 들었던 적이 있었다.
제 이름은 고백이고 대모동 고 씨 일족 32대 손입니다, 라고.
왜 그때는 그걸 흘려넘겼을까.
“대모동이 전부 제 땅은 아닙니다. 그 외에는 제 사생활이지 회사일 아니니 연관 짓지 마십시오.”
“어쩌겠니. 네가 내 집에 사는 이상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애를 하든 더한 걸 하든 내 집에서는 못 한다.”
“이제 와 자르시겠다는 겁니까?”
“다행히도 안드레아가 많이 좋아졌으니 말이다.”
현 여사가 쐐기를 박았다.
“둘 다 너 좋을 대로는 못 해. 그 땅은 놔두든지, 아니면 고 선생을 놔두든지. 고 선생 계속 만날 참이라면 나는 연 전무를 끼워 넣어서라도 그 땅 못 건드리게 하마.”
얘기는 그게 다였다.
말리려고 마음을 먹었으니 어떻게든 말릴 생각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왔다.
“그리 알고 있거라.”
현 여사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 * *
“이쪽입니다, 손님. 예약하신 분은 미리 와 계십니다.”
백은 이현이 예약을 해두었다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창밖으로 남산이 비스듬히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박 과장이 이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백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박 과장은 이 레스토랑이 이현의 마음에 꼭 들 것이라 확신했다.
음식 맛은 몰라도 오늘 홀을 담당하는 직원이 전부 여자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백이 배시시 웃으며 직원의 뒤를 따라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
어젯밤 이현이 함께 저녁을 먹자는 말에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막상 낯선 장소에 들어서니 조금 두근대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정갈히 다듬어놓아 기운이 맑은 장소이니 탁기의 문제는 아닐 테고, 이현 때문일 것이다.
이현을 생각하면 늘 이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두근대고 뜨끔하면서 간질대고 따듯한.
“……어?”
그러나 예약이 되었다는 자리에서 백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이현이 아니었다.
“제 자리가 아닌데요.”
“네?”
직원이 당황해 앉아 있던 사람과 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이현 씨 이름으로 예약된 좌석 맞습니다.”
“저 사람은 현이현 씨가 아니에요.”
이현이 아니었다.
아주 예쁜 여자였다.
아니, 지나치게 예쁜 여자였다.
그녀가 백을 향해 공들여 색을 입힌 입술을 열었다.
“네. 그런데 현이현 씨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쪽처럼.”
“……?”
백이 고개를 갸웃대는 동안 이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는 직원에게 눈짓을 했다.
직원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앉으세요. 잠깐이면 되니까. 저는 현이현 씨가 오기 전에 사라질 거예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현이현 씨를 아는 분이라면서 현이현 씨를 만나러 온 건 아닌가요?”
“네. 저는 고백 씨를 만나러 왔어요.”
지나치게 예쁜 여자가 까만 안경을 벗었다.
여기서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백 하나였다.
현이현 이름으로 예약된 자리를 찾아왔다는 그녀에게 자리를 안내해준 직원도, 이런 일이 있을 줄 까맣게 모르는 박 과장도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는 신해연이었으니까.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백에게 손끝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신해연이에요.”
고개를 갸웃대던 백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모동 고 씨 일족 32대 손 백이라고 합니다.”
* * *
장소를 알아내는 것은 쉬웠다.
그런 면에서 현라현은 제법 성실했고, 박 과장은 허술했으니까.
레스토랑 입구는 매니저가 지키고 있었다.
이현이 도착할 즈음이면 미리 연락이 올 것이다.
“저를 왜 만나려고 하셨어요?”
이렇게 묻는 저쪽은 신해연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해연은 백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현이현이나 현라현이나 안목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백은 자존심이 아플 만큼 예뻤다.
“해줄 말이 있어서요.”
해연은 연기를 할 때처럼 능숙하게 웃었다.
배우에게도 미소가 힘든 순간은 종종 있었다. 해연은 지금이 아주 어려운 촬영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말을요?”
“현이현 씨가 사람을 죽였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어려운 촬영장에서 하는, 아주 어려운 대사 같다고.
고백이라는 여자의 해맑은 얼굴이 비로소 흐려졌다.
“……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요.”
해연은 저 얼굴이 더 많이 어두워지길 바랐다.
더 어둡고 더 그늘지고 더 우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해연이라는 배우처럼.
“현이현 씨하고 연애하기 전에 생각 좀 해보라고 충고해주려고 온 거예요. 고백 씨는 그런 인간을 좋아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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