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감당할 수 없는 일
2018.03.31.
“하나 물어보자.”
라현의 목소리가 그새 탁해졌다.
라현은 백의 어깨를 붙든 손을 놓지 못했다. 이걸 놓으면 백이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고 선생 땅문서 필요하잖아. 그거 현이현이 해결해준다고 했어?”
“……아니요.”
“그런데도 연애한다고 한 거야? 당신 결심이 고작 그 정도였어?”
“그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이현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그 감정이 대모산의 식구들 전부보다 더 클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여전히 그 땅이 필요합니다.”
“그럼 좋아하지 마.”
라현이 백을 붙든 손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하면 제 말이 진실이 된다는 듯이.
“당신은 현이현이 어떤 인간인 줄 몰라. 내가 말했지. 현이현이 당신 같은 여자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당장 봐도 알잖아. 현이현이 당신을 좋아하는 거라면 당연히 대모동 땅부터 해결을 했어야지. 당신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데 당연히 그것부터 신경을 써야지. 그런데 현이현이 그랬어? 당신한테 왜 그 땅을 원하냐고 물어보기나 했어?”
“아니……요.”
“관심이 없는 거야. 들어줄 마음이 없으니까. 대신 순진한 당신이 저를 좋아하게 됐다는 이유로 실컷 휘두르다 제 욕심만 채우겠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현이현은.”
혼란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었다.
이현을 좋아한다는 자각이 애초에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였기도 했다.
백은 인간 세상에서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이현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 일을 방해한다고 하면 무엇보다 저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현을 좋아하는 제 마음은 그 자체로 사실이었다.
“대모동 땅문서는 그것대로 계속 애쓸 거예요. 저를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백은 라현을 바라보았다.
헐렁한 바지만 걸친 그는 신발도 신지 않았다.
머리칼은 젖어 있었고 얼굴에도 제대로 닦지 않은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급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저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 마음은 분명히 고마운 것이었다.
그래서 백은 라현이 가엽고 사랑스러웠다.
지기를 모으고 다스리는 영수가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그러하듯이.
“괜찮아질 거예요, 현라현 씨.”
백이 그에게 아주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툭.
라현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당신, 나한테는 정말로 마음이 없구나.”
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현라현 씨. 저는 현라현 씨가 몹시 고마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집에 있는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요.”
“그게 그 소리잖아.”
라현이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시선을 틀었다.
“……젠장. 나는 처음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좋아진 거.”
그래서 뭐든 다 해주고 싶었던 거. 엄마한테 배알없는 새끼 소리 듣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현이현하고도 싸울 생각이었는데.
“현라현 씨. 그건 제가,”
백이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위로일 게 뻔했다.
그런 건 필요 없었다. 라현은 위로가 아닌 다른 게 필요했다.
“됐어. 지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라현이 홱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계속 커지던 보폭이 결국은 달리는 게 되었다.
“젠장.”
별채까지 달려온 라현은 문을 쾅 닫고서야 발이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또 뭐야. 왜 이런 게 밟히고 지랄이야.”
발바닥에 상처가 났다. 뭔가 뾰족한 걸 밟고 온 모양이었다.
털썩.
라현이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등에 닿는 현관문이 차가웠다.
“……아프네, 젠장.”
발이 아팠다. 그리고 마음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라현이 갑자기 불쑥 일어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통화 화면을 누르자 최근에 알게 된 누군가의 번호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상대는 신호가 두 번도 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난데.”
라현이 뾰족한 음성을 내뱉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한다는 그거, 나도 할게.”
[어마?]
상대가 가르릉대는 웃음을 흘렸다.
[고마워요, 현라현 씨. 저 최선을 다할게요.]
“…….”
라현은 그 말만 듣고 그대로 전화를 뚝 끊었다.
그가 전화한 사람은 신해연이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이현은 오늘 40분을 지각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 듯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었다.
“좋지 못합니다, 본부장님.”
이현의 사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박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벌써 전화를 몇 통이나 받았는지 아십니까? 오늘은 무려 TB테크의 강 사장님까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아니, 강 사장님이라니까요?”
“출근 시간이 불규칙한 걸로 따지면 그쪽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전화가 오면 제가 그렇게 말했다고 전하시면 됩니다.”
“아.”
박 과장이 손바닥을 찰싹 내리쳤다.
“그것참 예의 없다면 예의 없고 도전적이라면 도전적인 방법입니다만 효과적이긴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이현이 재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윤 실장이 건네준 리스트였다.
“이게 뭡니까, 본부장님?”
“집 근처 가게들입니다. 여기서 사장이나 점원이 남자인 곳 알아봐서 표시해놓으세요.”
“네?”
박 과장이 눈을 끔벅였다.
“설마 개인 취미로 요식업체에 투자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그런 거라면 저보다는……,”
“아닙니다. 알아봐 달라는 것만 알아봐 주시면 됩니다.”
“에…….”
여전히 이런 일을 왜 시키는지 의문은 남았지만 그래도 며칠 전에 시킨 일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그러지요, 그럼.”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이현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두 눈은 이미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업무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워커홀릭의 표본 같은 자세라 박 과장은 방금 이현이 지시한 일이 설마 치졸한 질투로 점철된 데이트 장소 후보지의 사전조사라는 사실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 * *
“다 왔습니다, 부회장님.”
“아.”
간만의 외출이었다.
현 여사는 윤 실장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나직한 나무가 모양 좋게 들어선 양지바른 산은 아무리 푸르러도 늘 쓸쓸해 보였다.
“바람이 아주 좋습니다, 부회장님. 회장님께서도 부회장님이 오실 줄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문을 열어준 윤 실장이 일부러 가벼운 말을 건넸다.
“됐어요, 윤 실장. 그 양반하고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돈독했다고. 다 늙어서야 간신히 서로 참고 살게 된 것을.”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남매들은 아주 달랐다.
둘째 오라비였던 현성태 회장은 여덟이나 되는 남매들 중에서 가장 야심가였다.
돈을 위해서라면 이런 저런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걸 말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게 질려서 집을 떠났다.
공부를 핑계로 오라비가 보내주는 돈을 받아 썼지만 단 한 번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번 돈이니 저라도 악착같이 써줘야겠다는 오기만 들 뿐이었다.
그렇게 몇십 년 동안 외국을 떠돌다가 돌아온 집안 꼴은 가관이었다.
상상도 못 할 부를 쌓아놓고 사는 집이었지만 정작 가족들은 백 년쯤 굶은 사람들 같았다.
혼자 힘으로 그 부를 만들어낸 둘째 오라비는 말도 못하게 늙어 있었다.
과연 당신이 일생을 바쳐 얻고자 한 게 이 아귀밭이었냐며 한마디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라도 있어줘라.”
그 말을 듣고는 다시 떠날 생각을 못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머물러 살았더니 저는 태보의 부회장이 되어 있었다.
둘째 오라비는 세상을 떴지만 한 몫씩 챙긴 가족들은 여전히 귀신들처럼 시끄러웠다.
그런 걸 보면 왜 둘째 오라비가 굳이 사이가 좋지도 않던 저에게 모든 걸 떠맡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지킬 수 있을 만큼 지켜서 무사히 다음 사람에게 넘겨놓으라는 것 같았다.
그게 가장 귀애한 큰손자였기를 바랐을 것이다.
큰손자가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
“나 왔어요.”
잘 닦아놓은 산길을 걸어 현 여사는 현성태 회장의 무덤 앞에 앉았다.
윤 실장이 담요를 깔아준다 수선을 피웠지만 그녀는 잔디 위에 그냥 앉았다.
짧게 깎아놓은 풀이 따끔하게 살을 찌르는 게 좋았다.
그래야 무덤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지겹지? 나도 그래요. 오빠 마주하는 게 뭐 좋다고 매번 오는지 몰라.”
그래도 얘기는 멈추지 않았다.
“둘째도 셋째도 다 집에 들어왔어요. 둘째가 생각보다 잘하고 있어요. 몇 년 안에 다 둘째한테 넘겨놓을 작정이에요.”
윤 실장은 아예 없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빠는 마음에 안 드시려나? 둘째가 그 땅으로 회사를 옮기겠다고 해요. 얘기 들어보니 뭐 그럴 만해서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회사 옮기고, 제 생각대로 잘 흘러가면 다 맡겨도 되겠지요.”
생전에 현성태 회장이 그 땅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알았다.
그러니 큰손자에게 전부 넘겨놓았을 것이다.
큰손자가 죽고, 그것은 이현의 몫이 되었다.
“마음에 안 드셔도 어쩌겠어요. 죽은 사람은 원래 아뭇소리 못 하는 것을. 그래도 이승 들여다볼 힘이 남아 있거든 이현이가 잘하는지 지켜나 보든가요.”
얘기가 끝났다.
현 여사는 삐쭉하게 자라 있는 잡풀 몇 개를 뽑았다.
“그럼 가볼게요. 나 아직 바빠요. 오빠가 남겨놓은 일이 많아서.”
그렇게 일어나 마음과는 달리 미적대는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음?”
현 여사는 산 아래서 이쪽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희끗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윤 실장. 여기 지키는 사람 없어요? 저건 뭐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사유지라 입구를 항시 닫아놓고 있는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다.
윤 실장이 미처 내려가기도 전에 산 중턱을 가뿐히 넘어온 사람이 수염을 쓸며 소리쳤다.
“여기 오면 뵐 줄 알았지. 그간 잘 지내셨나?”
“아니, 저 양반이…….”
현 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산신령 흉내 같은 허연 수염은 분명 오금도사였다.
* * *
“무슨 일이시래?”
현 여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런 걸 보면 이현과 한 집안 식구가 틀림없었다.
별것 아닌 걸로도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저 표정은 이현과 비슷했다.
“이 몸이야 오래된 친우를 뵈러 왔지. 부회장은 어쩐 일이신가?”
“친우는 무슨.”
현 여사가 코웃음을 쳤다.
현성태 회장이 어쩌다 저런 사기꾼 같은 인간과 죽이 맞아 어울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신뢰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영악하고 야심찬 둘째 오라비가 허튼 소리를 귀 담아 들었을 리 없으니 오금도사도 완전히 돌팔이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제자랍시고 인사시킨 사람 역시 현 여사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스승을 흉내 내듯 어쭙잖게 거뭇한 수염을 달고 있었지만 박주환이 얼마나 똑똑했는지는 그 부모가 하도 자랑을 해놔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얄팍한 믿음도 큰손주가 죽은 뒤로는 없던 일이 되었다.
현 여사는 지금도 오금도사를 원망했다.
그렇게나 이 일 저 일 잘도 맞춘다는 이가 어째서 큰손주의 죽음은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지. 어째서 미리 지켜보라, 조심하라, 더 아껴주라 충고해주지 않았는지.
그 뒤로 오금도사는 그저 수염 난 돌팔이일 뿐이었다.
“이거 인사가 너무 매정하네. 내 아무렴 친우를 잊고 있었겠나.”
“흰소리 집어치우고 볼일이나 보세요. 나는 이만 갈 터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오금도사가 펄쩍 뛰었다.
“예 누워 있는 친우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인사야 천천히 해도 되지. 내 대신 부회장께 할 말이 있네만?”
현 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보니 나를 만나려고 오셨군.”
수상했다.
아무리 돌팔이 취급이라지만 그래도 전화를 하면 일부러 피할 사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나이가 되면 오래도록 알아온 사람과 매정히 연을 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금도사는 현 여사에게도 묵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굳이 죽은 사람 만나러 온 자리까지 쫓아오다니.
현 여사는 오금도사가 할 말이라는 게 그리 가볍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뭔데요.”
“역시 눈치가 빨라. 현 씨 집안 인간이라면 대개 그랬지.”
“그런 말 해도 좋다 할 나이 아니니까 용건만 얘기해요. 나 바빠요.”
“에이, 설마 내가 그걸 모르려고.”
오금도사가 수염을 슬슬 쓸었다.
그 옆에서 제자가 짧은 수염을 긁적였다.
“그 땅을 둘째에게 줬다지?”
“한참 된 얘기를 왜 새삼 꺼내세요? 그땐 아무 말 없었으면서.”
“아니, 내 그걸 딱히 뭐라 하려는 게 아니고.”
묘하게 뜸을 들인다 싶던 오금도사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쳐다보고 난 뒤 말했다.
“누가 갖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 땅은 건드리면 안 되네.”
현 여사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내 얼마 전에 셋째 어미가 신림동에 다녀갔단 얘기를 들어뒀더니 그게 이렇게 이어지네. 대모동은 안 되니 평택으로 가라는 얘기나 하려고요?”
“뭐? 아니야, 아닐세!”
오금도사가 펄쩍 뛰었다.
“평택이든 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말하려는 건 대모동 땅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게야.”
현 여사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 안 되는데요? 건드리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나요?”
“그래.”
툭 떨어지는 말이 평소와는 달랐다.
현 여사는 오금도사가 진심이라는 것, 그가 말하지 않은 더 큰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무슨 일이요?”
“자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
이어지는 오금도사의 말은 무서웠다.
이미 큰손자를 잃은 경험이 있던 현 여사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더 귀한 것들을 잃게 될 걸세. 특히나 그 집안 둘째가.”
“이현이가요……?”
현 여사의 안색이 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더 애절한 것을 잃게 된 큰손자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도 선명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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