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네가 제일 달아
2018.03.27.
“헉헉. 여기……야.”
이현은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매일 차를 타고 다니던 길이라 그저 동네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멀 줄은 몰랐다.
중간에 적당히 달리는 걸 멈추고 걸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시기를 놓쳤다.
백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구두를 신고 달리는 백은 굉장히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평소에도 걷기보다는 달리고 살았다는 것처럼 백은 지칠 기미가 없었다.
달리는 게 이렇게 자연스러운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보고 있으려니 멈출 틈을 만들지 못했다.
“현이현 씨는 달리기를 잘 못하시네요. 괜찮으세요?”
좀 억울했다.
나는 훌륭한 평균치야.
당신이 이상한 거라고.
그런데 걱정스럽다는 듯 저를 쳐다보는 표정이 너무 예뻐서 억울하다는 말도 안 나왔다.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이현은 언젠가처럼 슬쩍 백의 눈을 가렸다.
“괜찮다니까.”
이럴 때마다 이현은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대체 백은 언제까지 이렇게 정신 못 차릴 만큼 예뻐 보일까.
“그런데 여기서 아침을 먹는 건가요?”
그가 백을 데려온 곳은 동네를 벗어나지 않는 위치에 있는 자그마한 브런치 카페였다.
엊그제 윤 실장이 슬그머니 뭔가를 내밀었다.
받고 보니 이 근처 데이트하기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 산책 코스 등을 추려놓은 목록이었다.
그걸 건네며 윤 실장은 마음을 전하려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곁들었다.
아무리 봐도 조언을 핑계 삼아 한 잔소리에 가까웠지만 그 리스트는 꽤나 유용할 것 같아 일단 받아두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동네 브런치 카페가 문을 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문이 닫혔네요.”
백이 작게 중얼대는 소리가 한숨처럼 들려와 이현은 머릿속이 굳는 기분이었다.
이걸 어쩌지. 왜 나는 시간을 생각 못 한 거지.
그야 뻔했다.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브런치 카페의 오픈 시간 따위 신경 쓸 이유가 이제껏 그의 삶에는 없었다.
“어쩌지요?”
“…….”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딸랑!
영업 준비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는 카페의 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젊은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희 가게 오신 거 맞으시죠?”
백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문을 안 여신 것 같아요.”
“아니, 아닙니다! 이제 막 열려고 했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 정말인가요? 다행이네요.”
백이 환하게 웃었다.
사실 아직 오픈 시간이 아닌 것은 맞았다. 문을 여는 시간은 11시였고, 그전까지 재료 준비며 청소며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아직 점원들도 출근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하루쯤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저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환하게 웃어주는데.
카페의 젊은 사장은 유리문 밖으로 백을 보자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후다닥 문을 연 자신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가 한껏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아니, 다른 데 가자.”
하지만 백을 보는 카페 사장의 눈빛을 파악하지 못할 이현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온갖 여자 문제를 몰고 다니던 인간 말종 현라현을 한눈에 반하게 만든 백이었다.
그 윤 실장도, 현 부회장도 백이라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인간이 되는 것처럼 굴었다.
하물며 동네 카페 젊은 사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현이 매서운 눈으로 사장을 쳐다보며 백의 손을 잡았다.
“여긴 아직 청소중인 것 같아.”
“아, 정말요?”
백은 새삼스럽다는 듯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유리벽이라 채광이 끝내주는 카페 내부는 분명히 사랑스러웠지만 플로어 한복판에 누가 막 내려놓은 듯한 걸레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마. 그럼 폐가 되겠네요.”
카페 사장이 펄쩍 뛰었다.
“아니요! 폐는 무슨! 절대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그가 몸으로 백의 시야에서 걸레를 감추려고 애쓰며 말했다.
“혹시 인스타 같은 데서 보고 오셨어요? 저희 가게가 사실 오늘 개점 1주년 기념일이라서요 첫손님께는 무조건 무료 이벤트 중이었거든요. 하하, 진짜 맛있게 해드릴 테니 꼭 드세요. 게다가 공짜라니까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개점 1주년은커녕 이제 3개월째였다.
이런 헛소리를 남발해가며 어떻게든 이 예쁜 사람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이유를 그 역시 정확히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백이 천진한 얼굴로 이현을 잡아끌었다.
“그렇대요, 현이현 씨. 우리 여기서 먹어요.”
이현이 저도 모르게 짜증을 드러냈다.
“나 돈 많아.”
젠장. 공짜가 뭐 어떻다고.
“맛있게 해주신다잖아요.”
“그럼요. 저를 믿고 어서 앉으세요.”
믿긴 내가 너를 왜 믿어. 그렇게 흑심이 가득한 눈을 한 주제에.
하지만 이현은 저를 잡아끄는 백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백이 하자고 하면 도무지 아니라는 말을 못 하게 될 것 같아서.
“……그렇다면.”
맛없기만 해봐라.
걱정은 단지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현은 제 속이 얼마나 더 좁아질지도 예상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 * *
“주문하신 브런치 세트 두 개 나왔습니다.”
카페 사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음식을 백과 이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비록 백의 접시에 담긴 팬케이크가 이현의 것보다 두 배는 더 크고 더 두툼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착각일 것이다.
함께 나오는 과일 샐러드와 요거트도 백의 것이 세 배쯤 많아 보였지만 크게 문제될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전부 다 공짜라고 말한 이상 이것은 순수하게 백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었다.
“그럼 맛있게 드시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물론 다 제가 내는 겁니다.”
카페 사장은 백에게 찡긋 눈웃음까지 건네고 아주 느릿느릿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현은 그에게 우연을 가장해 포크를 집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집적대는 거야. 네가 뭐라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밥을 사겠다는 건데.
“어…….”
접시를 받아 든 백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현이 재빨리 반응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다른 데 가자.”
“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요.”
백이 신기하다는 듯 이것저것 가리켰다.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이것도 먹는 건가요? 그런데 이건 칼로 먹어야 하나 봐요.”
백이 어색하게 나이프를 쥐었다.
“되게 이상한데.”
“그 옆에 포크를 쓰면 돼.”
“네?”
나이프 바로 앞에 포크를 두고서도 두리번거리는 걸 보면 포크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따질 것도 없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 이상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용인하는 자신이었다.
“이것.”
이현이 포크를 들어 백의 손에 쥐어주었다.
“처음 봐?”
“네.”
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팬케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인간 세상에는 신기한 게 너무 많아요. 제가 모르는 게 아직 더 많을 거 같아요.”
저런 낯선 말이 왜 낯설게 들리지 않는 걸까.
어쩐지 백이 할 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포크를 움직이자마자 접시 위로 다시 뚝 떨어지는 팬케이크도.
“엇,”
백이 팬케이크를 따라 시선을 떨어트렸다. 뾰로통하게 나오는 볼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이현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이러다 포크질에 서툰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하겠군.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지금의 자신을, 과거의 자신이 보게 된다면 정신 차리라며 한 대 후려칠 것 같았지만 이현은 도무지 이 기분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좋아하면 얼간이가 되는 건 유전일지도 몰랐다.
그가 팔을 뻗어 접시를 바꿨다.
“내가 잘라줄게.”
백은 왜인지 얼굴이 빨개졌다.
볼을 부풀린 백이 아주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처음 해봐서 그런 거예요. 아직 잘 모르는 일이 더 많지만 그래도 배우는 건 빠르다고 어머니와 언니들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실수한 장면을 그가 봐서 부끄럽다는 말 같았다.
“누구나 처음 해보는 일은 있는 거잖아.”
“그럼요.”
“응.”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을 보면 알았다.
그 역시 이렇게 속 좁은 얼간이가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싫다는 생각도 들지 않으니 할 말 다 했다.
“다 됐어.”
이현은 한 입 크기로 자른 팬케이크 접시를 다시 백의 앞에 놓아주었다.
백이 몹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큰 건 칼로 자르면 되는 거군요.”
“아니면 나한테 잘라달라고 하면 돼.”
백이 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으로는 잊지 않고 잘 하겠습니다.”
저 진지한 태도를 보니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나한테 하면 안 되고. 나한테만 해야 해.”
“그건 왜인가요?”
“나는 당신이 나이프와 포크에 서툴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런가……?”
백은 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제 눈에는 예쁘게만 보이니 됐다.
“어서 먹어.”
이현은 시럽을 듬뿍 적신 팬케이크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백에게 내밀었다.
백은 아주 자연스럽게 입으로 그걸 받아먹었다.
“아, 달아요!”
“시럽이 너무 많았나?”
백이 입을 우물대며 생긋 웃었다.
“현이현 씨는 저한테 달콤한 것만 주시네요.”
그냥 꿀물도 팬케이크도 달았다는 말일 텐데 심장이 지끈거렸다.
네 미소가 더 달아.
이런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팬케이크가 무슨 맛인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현은 사람들이 왜 집을 놔두고 브런치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곳에 와야겠다.
단, 사장이나 직원이 모두 여자들인 곳으로.
* * *
이현은 절대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카페 사장에게 기어이 팁이라는 명목으로 수표 한 장을 건네고 나왔다.
카페 사장은 돈을 받는 게 몹시 화가 난다는 식이었고 이현은 그를 평소 같은 무표정으로, 그러나 눈매는 날카롭게 쳐다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물론 백은 카페 사장과 이현이 왜 한동안 서로 노려보기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다녀올게.”
카페를 나오니 출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 지각을 기록하게 된 이현은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일은 내가 제일 많이 하는데.
게다가 월급 주는 사람도 나라고.
이현은 늦었다는 표시는 조금도 내지 않고 차에 탔다.
지각의 대가로 백이 출근길을 배웅해준다면 그쪽이 훨씬 더 나은 게 당연했다.
“네. 다녀오세요.”
백이 몸을 낮춰 운전석 창문을 통해 그와 눈을 맞췄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었고, 백은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그의 볼에 입술을 댔다.
“……엇,”
하고 나서야 자각이 든 모양이었다.
백이 화들짝 몸을 떼며 변명을 했다.
“어, 그러니까 그게…… 아, 아침도 사주셨고…… 아니, 아침은 공짜였지만요. 그래도 같이 달리기도 했고…… 밥 먹고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셨고…… 그리고 음…….”
키스를 한 이유를 찾으려 하는 걸까.
고마운 일을 해줘서, 그래서 했던 거라고.
이현이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백을 끌어당겼다.
“엄마야.”
백이 다시 제 위치로 돌아왔고 이현은 당황한 입술에 제 입술을 꾹 찍었다.
키스가 끝나자 백이 말없이 저를 쳐다보았다.
“나는 하고 싶어서 했어.”
이현은 백도 그랬을 거라고 믿었다.
이제 이유는 필요 없다고. 하고 싶으니까 했을 거라고.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백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 저녁에 봐.”
부웅!
이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끝내주는 출근길이면서 동시에 괴롭기도 했다.
아, 회사 가기 싫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미친 속도로 오늘 업무를 끝낸 다음 누구보다 빨리 퇴근할 것이다.
이현은 그런 각오로 이를 지그시 물고 속도를 높였다.
* * *
“미치겠군. 저게 뭐야.”
기가 막히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유감스럽게도 그가 머무는 별채의 2층에서는 대문 앞이 훤히 보였다.
그 말은 현이현의 출근길도, 그를 배웅하는 백도 또렷이 볼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현이현이 미친 거야? 나 모르게 땅이라도 팔아 치웠대?”
라현은 쿵쾅대며 걸음을 옮겼다.
아침이 늦는 그는 이제 막 옷을 갈아입던 중이라 맨발에 바지만 걸친 채였지만 그런 일은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봐, 고 선생님!”
라현이 숨을 헐떡이며 안채로 돌아가는 중이었던 백을 따라잡았다.
“안녕하세요, 현라현 씨.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은 개뿔.”
저절로 이가 갈렸다.
라현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자 백이 깜짝 놀랐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화가 나신 것 같아요.”
“당연히 화가 나지! 그럼 안 나게 생겼어?”
“무슨 일이 있는데요?”
“무슨 일이라니. 당신이 방금……,”
울컥 숨이 밀려와 라현은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짓말하지 말고 대답해줘. 현이현하고 연애하기로 했어?”
“네?”
“그새 현이현이 좋아지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
라현은 똑똑히 보았다.
좋아하냐는 말에,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양 볼에 홍조가 가득 피어나는 백의 얼굴을.
“그게…… 저도 잘…….”
“아, 젠장!”
라현이 발을 쿵 굴렀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필 좋아해도 왜 현이현이야!”
라현이 백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 얼굴 똑바로 봐, 고 선생님. 진짜야, 그게?”
백의 눈이 호수가 된 것처럼 흔들렸다.
“그게 잘 모르겠……,”
아니, 흔들리다 멎었다.
사실 백은 알고 있었다.
이현의 키스가 라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현이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똑같은 말을 해도 똑같은 친절을 베풀어도 이현은 달랐다. 이현이 한 것은 모두 생각이 나고 모두 기억에 남았다.
그만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건 좋아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건 처음이라 제 마음이 서툴렀던 것뿐이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백은 호수처럼 찰랑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굳게 서 있는 나무처럼 확고해 보였다.
“저는 현이현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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