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준비, 요이, 땅
2018.03.24.
“누군가 했더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나이를 하도 잡숫더니 망령이 났나.”
오금도사의 수제자, 박 과장의 형 박주환은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비록 산속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들 찾으며 울고불고 엎드려 있자 스승님이 두 눈 똑바로 뜨라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살아 있는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모양을 한 바위였다.
이미 흘린 눈물 콧물이 참 멋쩍어서 훌쩍대고 있자니 정말이지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홀연히 선녀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셋이나.
재미난 것은 나타난 장소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선녀가 분명한데 입고 걸친 것은 죄다 인간의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아찔한 하이힐에 반짝대는 에나멜 가방, 다이아몬드가 콕콕 박힌 시계 같은 걸 차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고 있으려니 선녀들이 입을 여는데 어째 말에 날이 서 있는 듯했다.
“오랜만일세. 다들 잘 지내셨나.”
오금도사가 점잖게 인사를 받았다.
선녀 중 하나, 그러니까 사실은 대모산 고 씨 일가의 당주 백의 모친이 우아하게 코웃음을 쳤다.
“어째 그 꼴로 살아계셨나 싶네. 진작 무덤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줄 알았더니만.”
“에이, 반갑다는 말을 어째 그리 상스럽게 하나. 대모산 영수께서 예절을 잊으신 모양이야.”
“상스럽다니?”
모친이 대뜸 눈을 흘겼고 두 언니들도 뾰족 귀를 세웠다.
“이제는 다 모르겠다며 내팽개치고 잠이나 주무시겠다는 양반이 그 꼴로 나타나서 무슨 말씀이세요?”
“맞아, 맞아. 그리고 남들 한창 잘 시간에 꼭 이리도 요란하게 나타나셔야겠어요? 왜 남의 산 문지기는 깨우고 그러신대?”
오금도사가 턱수염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그럼 밤에 깨우지 낮에 깨우나? 낮에 호랑이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 어쩌라고. 산 아래 인간들이 바지라도 적시면 가엽지 않겠나.”
모친이 발을 쾅 굴렀다.
“안 깨우면 될 거 아냐, 그러게!”
오금도사도 할 말이 있었다.
“저리 험한 문지기를 안 세우면 되는 일을 가지고! 그러니 내가 한번 와보기 힘들었던 게 아니냔 말이야.”
“보자보자 하니까! 이 영감탱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게야!”
오금도사의 멱살을 쥐려고 드는 모친을 두 언니가 말렸다.
“엄마, 너무 열 내면 털 빠져.”
“맞아. 엄마는 좀 계시우. 이보세요, 관악산 영감님. 이 오밤중에 뜬금없이 찾아온 이유부터 말씀하세요. 우리가 살가웠던 사이도 아니고, 피차 얼굴 맞대고 있기 껄끄럽지 않겠어요? 할 말 하고 어서 사라집시다.”
그러자 오금도사가 휘영청한 달을 한번 바라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말세라지만 이 몸이 이제 대모산에서도 괄시를 받나.”
“제 집 구석 하나 못 지키고 떠난 양반이 뭐 이것저것 따지고 그런데. 어서 볼일이나 마치자니까요?”
오금도사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아, 진짜. 고만 좀 긁으라고. 난들 정든 집을 버리고 싶어서 버렸겠나? 관악산은 대모산하고는 사정이 다르다 이거야! 하루가 멀다 하고 등산객들이 늘어대는데 내가 그걸 무슨 수로 다 감당해?”
한때 오금도사도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한양 땅에 아무리 이 산 저 산 많다 했지만 관악산이라면 개중에서도 덩치 크고 터가 발라 으뜸으로 치던 곳이었다.
그때는 인왕산 터줏대감 호랑이한테도 인사를 받았더랬다.
그런데 세월이 변했다고 관악산은 인간들의 땅이 되었다. 덩달아 힘을 잃은 그는 산신령이라는 본모습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아직 남은 재주를 살려 도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한때는 제가 더 잘났다고 영수들한테 고까운 소리도 좀 했더랬다.
그걸 저 여우들이 잊지 않고 저리 날을 세워대는 것이었다.
“신세한탄 하러 오신 거라면 번지수 틀렸어요. 여기 영감님 말 들어줄 여우 아무도 없으니까 고만 돌아가세요.”
“아, 그게 아냐!”
답답해진 오금도사가 손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렴 내가 몇십 년 만에 고까짓 얘기를 하려고 왔겠나. 대모산에 큰일이 있다 알려주러 온 게야.”
“아니, 우리 집 일을 설마 우리가 몰랐으려고. 다 알고 있고 지금 막내까지 내보내서 손쓰고 있으니까 신경 끄세요, 영감님.”
그걸 몰라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백여우가 나서봤자 소용이 없게 됐으니 하는 말일세.”
오금도사의 말에 여우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요?”
“이 영감탱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아무리 관악산을 빼앗기고 개터럭이 되었어도 본분은 다 하고 있었지! 내가 힘쓴 게 아니라면 대모산이 어찌 이날 이때껏 무사했겠는가.”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영감님이 힘을 쓰고 있었다니요.”
“암. 애초에 현 부자한테 이 땅은 건드리지 말라 신신당부해놓은 게 이 몸이란 말일세.”
전직 관악산 산신령으로서 오금도사는 한양 땅에 남은 마지막 영산을 지키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야 배가 아프긴 했다만 그래도 마지막 영산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산은 그 자체로 지기를 평탄하게 다스리는 바, 대모산 마저 사라진다면 그나마 저가 움켜쥐고 있는 영력도 사라지고 그는 평범한 인간처럼 늙어 죽을 것이다.
모친이 입술을 씰룩였다.
“하여간 영감탱이. 기왕 손을 쓸 거 잘 좀 해놓을 일이지.”
“이 몸이야 내 할 일은 아주 잘 해놓았다지. 그런데 어쩌겠는가. 하늘이 대모산의 명운을 바꾸신 것을.”
“명운이 바뀌어요?”
오금도사가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뿜어냈다.
“점괘가 안 나와. 도통 읽을 수가 없네.”
답답했던 둘째 언니가 오금도사의 멱살이라도 쥘 기세로 소리쳤다.
“아, 괜히 어려운 말 쓰지 마시고 탁 까놓고 얘기해보아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감님?”
오금도사의 안색이 밤하늘만큼이나 깜깜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게 됐다는 소리일세. 어쩌면 대모산이 사라질지도 몰라.”
“예에?”
“어머나, 어떡해…….”
세 여우가 서로 손을 꼭 움켜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엄마, 그럼 이제 우린 뭘 어째야 하는 거유?”
* * *
꼬끼오오오. 꼭꼭.
아침이 밝았다.
병돌이와 병순이가 기운차게 우는 소리가 평창동 일대를 깨웠다.
알람이 필요 없게 생겼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반, 덕분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어쨌거나 현 씨 집안 식구들도 모두 일어났다.
다들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며 분주한 아침 준비를 하는 와중에 백은 문가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백아.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응응. 확실해.]
백은 청설모 오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섣불리 문을 열지 못했다.
“아직까지 자는 건 아닐 테고. 벌써 나간 거겠지?”
[그럴걸.]
[인간이 하는 일을 어떻게 다 알아.]
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문틈 사이로 밖을 살폈다.
“응, 그래. 소리가 안 들려. 나가도 될 것 같아.”
드르륵.
백이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살금살금 걸어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1층으로 내려가 현 여사 및 이 집 식구들과 아침 식사를 하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현은 늘 아침이 빨랐다.
윤 실장의 말로는 아침 식사 대신 출근길 커피 한 잔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이현의 출근 준비 시간을 피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휴우.”
백은 욕실 문을 열며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키스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문제였을까.
당분간은 이현을 피하고 싶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더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괜히 확인했어. 그냥 가만히 있는 건데.”
“뭘?”
“엄마야!”
열리다 만 욕실 문 사이로 이현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란 백이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쿵!
“……이런.”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현의 머리를 욕실문으로 때리는 상황이 되었다.
“엄마야! 괜찮으세요?”
백이 욕실 문을 열었다.
이현이 이마를 손으로 누른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많이 다치셨어요?”
“다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목소리가 차가웠다.
백은 저도 모르게 힐금 이현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얼굴에 지금 몹시 기분 나쁨이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화나셨어요? 제가 때려서요?”
“아니.”
“표정은 그래 보이는데요.”
“기분은 좀 나빠. 아니, 상당히.”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랬을 것이다. 왜냐면 일부러 소리를 죽이고는 없는 척하고 있었으니까.
한 집에 살면 의외로 상대방이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을 알게 되는 우연이 자주 일어났다.
이현은 백이 몇 번이고 문을 살금살금 열었다 닫았다 하며 뭔가를 살피는 것을 보았다.
그게 저라는 것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어젯밤 그렇게 도망치듯 가버리고는 아직은 얼굴을 맞대기 싫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가만 내버려둘 만큼 제 속이 넓지 않다는 게 유감이었다.
“왜 사람을 피해?”
“네?”
이현이 불쑥 정곡을 파고들었다.
당황한 백은 변명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차피 거짓말은 해본 적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당황하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
백은 얼굴만 빨개진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표정에 이현은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이현이 덥석 백의 손을 잡았다.
“나가자.”
“예? 어디를요?”
“글쎄……. 일단 아침 전이니까 밥 먹으러.”
“아직 세수를 안 했는데요.”
인간은 아침을 먹기 전에 세수부터 한다고 했다.
산의 일족이 하루 중 배가 노곤히 부르고 해가 따뜻하게 등을 데울 무렵 몸단장을 하고 싶어 하는 것과는 반대였다.
“안 해도 돼.”
“아니에요, 현이현 씨. 인간은 자고 일어나면 씻는 게 가장 우선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 돌아다니면 흉을 볼 거라고 했어요.”
“그런 건 당신하고 상관없잖아.”
“엇……. 왜, 왜지요?”
혹시나 정체를 들켰나 싶어 백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현은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씻거나 말거나 똑같아서.”
씻거나 말거나 너무 예쁘니까. 예뻐서 눈이 아플 지경이니까.
“아, 그런 말이라면 다행입니다.”
“응. 그러니까 나가자.”
이현이 백을 잡아끌었다.
백은 손이 잡힌 채 종종걸음으로 이현과 속도를 맞췄다.
모를 일이었다.
손이야 어떻게든 뿌리칠 수 있을 텐데 백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표정이 변해서야.
백이 이현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것처럼 보였는데, 저렇게 달라져서.
백에게도 전해져왔다. 갑자기 들뜨는 기분이.
이현이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었다. 그게 이유 같았다.
그를 따라 저도 신이 나는 것 같았다.
쿵쿵쿵쿵.
두 사람의 걸음이 더해진 계단 소리가 심장 소리하고 뒤섞여버렸다.
[냐앙? 백님 어디 가시는 거냥?]
때마침 백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2층으로 올라오던 안드레아와 마주쳤다.
“아, 안드레아. 도도와 도래에게 나 잠깐만 나갔다 온다고 전해줘.”
[저도 데려가시면 안 되냐앙.]
안드레아가 이마로 백의 다리를 문지르며 아양을 피웠다.
[백님이 안 계시면 쓸쓸하다냥. 저도 데리고 가시라냥. 제가 고르륵 노래도 불러드리겠어냥.]
그걸 본 이현이 안드레아의 목덜미를 덜렁 들어서 옆으로 밀어냈다.
[캭! 뭐하는 짓이냥!]
안드레아가 날쌔게 몸을 돌려 앞발을 뻗었지만 이현은 벌써 백을 데리고 계단을 내려섰다.
“내가 이렇게 속이 좁았나.”
이현이 미간을 찡그리며 못 알아들을 혼잣말을 하자 백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빨리 가자.”
고양이를 질투하고 싶지는 않아.
이현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던 백은 뭔가 서두르는 이유가 있는 줄 알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안드레아. 다녀올게.”
[백님! 가지 마시어냥!]
안드레아가 눈물을 글썽댔지만 이현의 걸음이 더 빨랐다.
“어라? 두 분 어디 가십니까?”
방해꾼은 안드레아뿐만이 아니었다.
1층으로 내려서자 윤 실장과 마주쳤다.
“아직 식사 준비가 덜 됐을 텐데요, 고 선생님.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대답은 이현이 했다.
“백이는 오늘 아침 안 먹습니다.”
“저런?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요. 저와 먹을 거라서요.”
“네? 두 분이서요? 아니, 게다가 본부장님은 아침 식사 안 하시지 않습니까?”
“오늘은 먹을 생각입니다. 그럼.”
이현은 짧게 말을 끊었다. 그게 전부 다 방해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들렸다.
대충 신발을 신은 이현과 백이 현관을 나섰다.
이번에도 방해꾼이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고 선생님. 그런데 너는 식사도 아직인 고 선생님을 어디로 데려가는 게냐?”
깨끗한 아침 공기와 함께 정원의 파라솔 아래서 모닝 티를 즐기고 있던 현 여사였다.
“아침 먹으러 갑니다.”
현 여사가 찻잔을 들어올리며 혀를 끌끌 찼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겐지, 아니면 납치를 하는 겐지. 손은 왜 그리 꽉 붙들고 있어? 고 선생님,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요. 이현이 녀석이 억지로 잡아가는 거 아니에요?”
백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조심히 다녀와요. 혹시 일 생기면 전화하고요.”
어디선가 푸드덕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요새 쉴 틈이 없는 평창동 구 씨였다.
[구우우! 백님! 혹시 큰사내가 해코지라도 하려고 들거든 냅다 소리쳐 부르십시오! 제가 번개마냥 날아가겠습니다!]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구구구구 아주 야단인 것은 잘 알겠다.
이현이 혀를 찼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왜 죄다 방해를 못해 안달인 것처럼 느껴질까.
“안 되겠어. 달리자.”
“네?”
이현이 백의 손을 꼭 잡았다.
“달려도 되지?”
물론 달리는 거라면 자신 있었다. 비록 산속은 아니었지만 인간보다야 잘 달릴 것이다.
“그건 괜찮은데요, 꼭 달려야 하는 걸까요?”
대체 어디를 데려간다는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달려서까지 아침을 먹으러 갈 필요가 있는 걸까.
“응. 감이 안 좋아.”
이현에게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러다가 현라현까지 가세할 것 같았으니까.
“그럼 간다.”
“예. 저는 아주 빠르니까 혹시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빠르다니 잘됐네.”
이현은 백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낮보다 시원하고 상쾌한 아침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갔다.
입을 꼭 다물고 열심히 달리는 백을 보자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