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연애는 아직 아닙니다
2018.03.06.
“왜 이렇게 늦었다니?”
라현은 급하게 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겼다.
“목소리 좀 낮춰줘요. 지금 골 아파.”
“쯧쯧…….”
모친이 혀를 찼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가 어딘가 몸이 안 좋다는 기색을 내보일 때 모친은 따듯하게 안아주거나 한 적이 없었다.
하긴. 몸이 안 좋은 경우는 지금처럼 숙취 상태일 때거나, 혹은 술 먹고 운전한 뒤 사고가 나서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할 때가 대부분이었으니 라현도 원인제공을 하긴 했다.
“한국에 들어온 것치고는 별 얘기 안 들려온다 싶더니 버릇 어디 안 가네.”
“집에서 마셨어요.”
“그래?”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뜨는 모친을 향해 라현이 심술 맞게 웃었다.
“평창동에 사람 안 심어두셨어요? 현이현이 절 바닥에 처박았다는 얘기도 모르시겠네, 그럼.”
“뭐?”
모친이 입을 딱 벌렸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래도 제 자식인데 어느 놈이 감히 손찌검이냐는 의미는 아닐 거라는 게 라현의 생각이었다.
그보다는 현이현이 더 꼴 보기 싫다는 이유겠지.
늘 그랬듯이.
“그래서 보복이랍시고 신사옥 부지 바꾸자는 거였니?”
“보복은 맞아요. 이유가 고작 그건 아니지만.”
라현은 희미하게 남은 두통으로 계속 찌푸려지는 눈을 들어 모친을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생각 있으세요?”
모친이 킁, 불쾌한 소리를 냈다.
“없지야 않지. 현이현이 하도 손을 잘 써놔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던 거지.”
“그 도리, 생길 수는 있어요?”
“글쎄다.”
모친이 라현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라현이 별수 없이 몸을 기울이자 모친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네 아빠가 어떤지 너도 알잖니. 눈 밖에 나는 일이라면 죽어도 싫어서 그저 오냐오냐 하는 거. 회장님 돌아가신 지 한참 됐어도 그 버릇 못 버려서 기껏 있는 땅 쓰자는 얘기도 못 하고 현이현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둔 거야. 부회장님이 일단은 현이현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그러신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어머니는 뭐하셨는데요, 그럼.”
“얘가?”
모친이 손을 뻗어 라현의 팔뚝을 꼬집었다. 살보다 옷이 더 많이 쥐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럼 너는 뭐했는데? 배알 없는 네 아빠나 회사에 통 관심 없는 너나 다를 게 뭐야? 얘가 간만에 기특한 소리 하나 했더니 왜 복장을 뒤집어?”
“아파요. 이런 짓은 이제 그만하시고요. 제가 아직 일곱 살로 보이세요?”
“일곱 살이나 스물일곱 살이나. 철없는 건 매한가지면서 나이는 왜 들먹거려.”
입술을 실룩이던 모친은 한차례 더 꼬집은 뒤에야 손을 떼주었다.
“철없다고 칠게요. 방법이 있어요?”
모친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팔짱을 꼈다.
“뭐…… 다른 인간들 끌어들이는 건 글렀어. 네 아빠가 저 모양으로 미적거리니 내가 손 뻗을 수 있는 사람은 한계가 있더라고. 그러는 사이에 강남 쪽으로 결정이 나버린 거고.”
라현이 짜증을 드러냈다. 두어 차례 꼬집힌 팔뚝이 아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왜 자꾸 지난 얘기 하세요. 지금 방법이 있냐고요.”
“아, 진짜. 보채기는.”
모친과 라현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그런 걸 보면 식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모친이 팔짱을 낀 채 한참 그를 노려보더니 입을 뗐다.
“……없지는 않아.”
“쓸 만해요?”
“그걸 모르겠어.”
“왜요?”
“좀 그런 쪽 얘기라서.”
“그런 쪽?”
모친이 턱을 까닥였다.
“오금도사.”
“……. 제정신이세요?”
기어코 그런 말이 나왔다. 모친이 탁자 위에 놓인 물건 중에서 그나마 덜 아플 것 같은 휴지 상자를 들어 라현에게 집어던졌다.
퍽!
다행히 잘 피해서 맞진 않았다.
“말 가려서 해.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말 같은 소리를 하셔야죠. 오금도사라니. 굿판이라도 벌이자는 소리세요?”
“아냐! 그런 거라면 방법이라고 하지도 않았어.”
모친은 짜증을 내면서도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그런 금싸라기 땅을 왜 이제껏 놀리고 있었는지. 회장님이 태보 세울 때도 그 땅은 현 씨 집안 땅이었어. 그간 온갖 평지풍파를 겪으면서도 그 땅은 절대 손대는 일 없게 했고. IMF 사태가 왔어도 담보 한 번 못 잡게 한 땅이야. 그게 이유가 있었다잖아.”
“……?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무렴.”
라현이 관심을 보이자 모친은 표정을 풀었다.
“그 땅이 그렇게 복이 많은 땅이란다. 오금도사가 회장님 생전에 귀가 닳도록 그 소리를 해대서 일절 손 못 대게 했다더라. 그런데 그게 오금도사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쪽 사람이라면 대부분 다 그러는 곳이래. 현 씨 집안이 잘나가는 이유가 다 그 땅 때문이라고.”
“흐음…….”
“그래서 그 땅에 신사옥 짓는다고 했을 때 부회장님도 원래 반대하는 쪽이었대. 그걸 좋은 터에 지으니까 더 잘되지 않겠냐며 현이현이 말장난 쳤다더라.”
“아하.”
다 라현이 없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모친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주 그냥, 저는 마음 편히 해외서 놀다 보니 집안에서 일어난 일도 다 처음 듣는 소리지.”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신사옥 부지가 결정될 때 한국에 있었으면 모친의 등쌀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방법이 된다는 거예요?”
“아유, 여기까지 말했으면 좀 알아들어라. 다 차려준 밥도 엄마가 숟가락 쥐어줘야 해?”
말은 그랬지만 연 전무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러니까 부회장 쪽을 흔들어야지. 좋은 걸 건드려서 더 좋은 게 아니라 그 반대라고.”
“아……?”
“오금도사 같은 사람들을 좀 이용해보잔 거야.”
연 전무의 눈이 반짝 빛났다.
* * *
라현이 모친을 만나고 있을 시각, 대모산에서도 심각한 만남이 진행 중이었다.
“아니, 대체 그럼 뭐라는 거야.”
“끄응……. 나는 도통 모르겠다.”
“하, 답답하네.”
평창동 구 씨가 도착해 오늘의 소식을 전했다.
큰 현 씨 사내가 백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그럼 성공이네? 했더니 땅문서는 안 주겠다 했단다.
“그간 세월이 참 많이 변했는가 보아.”
둘째 언니가 앞발로 수염을 슥슥 쓸며 말했다.
과연 박식하기로 소문 난 대모산 고견님이라 그런지 그 모습도 총기가 넘쳐 평창동 구 씨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요새 인간들은 예전하고는 달라 미혹술도 쉽지 않네. 아랫세상에 탁기가 매일 쌓여가니 영기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소용이 없을지도.”
큰언니가 영 걱정스럽던지 앞발을 할짝였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 거니? 백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게야?”
모친이 근엄한 표정으로 나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어도 끝까지 지켜지는 게 있는 법이야. 인간이 제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하늘 아래 나고 죽는 건 다 매한가지다. 영수가 인간 위에 있는 것도 당연지사. 그러니 미혹술이 더디 먹힐 수는 있으나 안 될 일은 없다.”
그 말에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둘째 언니가 턱을 괴었다.
“엄마 말이 맞수. 현 씨 사내가 그리 나왔다는 건 어쨌거나 진척이 있다는 소리지.”
“그럼 그냥 두고 보면 되는 거야? 걱정할 거 없고?”
“일단은 지켜보잔 말이우. 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다른 수도 생각해봐야 될 것 같아.”
“다른 수?”
“우리도 이제 이판저판 생사판이 아니우. 그러니 이것저것 잴 것 없이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왜 그때 백이하고 같이 왔던 다른 현 씨 놈 기억나?”
모친과 큰언니가 나란히 앉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착한 인간은 기억을 해야 마땅하지.”
“그런데 네가 작은 놈은 별 볼 일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기야 했지. 그런데 사정이 이러니 별수 있나. 지푸라기라도 붙들어야지.”
라현은 그렇게 지푸라기가 되어버렸다.
둘째 언니가 구 씨를 향해 말했다.
“내 서간을 한 장 쓸 테니 그걸 작은 놈한테 전해줘.”
[구우!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시지요.]
큰언니가 물었다.
“서간까지 쓰게? 작은 놈한테 뭐라고 하려고?”
똑똑한 둘째 언니가 답했다.
“자고로 몸이 단 사내는 불씨와 같지.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면 활활 타오르게 되어 있어.”
큰언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서간이 부채야?”
“아니. 작은 놈이 부채가 되는 게지.”
질투라는 이름의 부채를 작은 놈이 부치는 순간 큰 놈이 품은 불씨가 활활 타오를 터였다.
라현의 방 창가에 멋들어진 붓글씨 편지가 고이 놓인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 * *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쿵, 문을 밀며 들어온 사람은 박 과장이었다.
이현의 눈이 박 과장을 힐긋 향했다 다시 모니터로 돌아갔다.
그걸 발견한 박 과장이 대뜸 눈을 치켜떴다.
“아니, 본부장님. 사람이 왔는데 아는 척도 한번 안 하십니까? 이러면 저 섭섭합니다.”
“지금 좀 바빠서요.”
“이제 대놓고 서럽게 하시는군요. 그런다고 저 함부로 사표 던지고 그럴 사람 아닙니다, 본부장님.”
이현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일단 오늘 예정에 없이 늦는 바람에 그만큼 업무가 지연됐고, 그래서 처리할 일이 훨씬 더 많아졌고, 그 와중에 박 과장에게 볼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박 과장이 무슨 일로 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제 덕분에 전화 좀 받으셨겠군요. 알아서 대답하셨을 테니 보고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헉.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일이 없을 테니까요.”
박 과장이 혀를 내둘렀다.
“……에잇, 진짜. 그렇게 다 알고 그러시면 사는 거 재미없지 않습니까?”
“바쁩니다.”
이현의 짧은 대답에는 바쁘게 살면 그런 재미 따위 필요 없고, 그러니 알아서 적당히 나가달라는 긴 얘기가 생략된 채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이 건은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전화하신 분들 중에 연 전무님도 계셨습니다.”
태보건설의 연서희 전무는 숙모였고, 한집에서 같이 산 기간도 짧지 않았지만 가장 가족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뭐라던가요?”
박 과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주변을 은밀히 살피더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이기까지 했다.
“본부장님께서 저에게 따로 비밀리에 지시하신 업무에 대해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이현이 어깨를 돌려 박 과장을 피하며 말했다.
“그게 귀에 대고 할 말입니까?”
“비밀 업무 보고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경영기획 팀 내에 첩자가 있는 게 아닐까요?”
마침내 이현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제 차 안에서 단둘이 있을 때 나눈 말 아닙니까? 그걸 사무실 직원이 들었다고요?”
박 과장이 아하, 하며 손바닥을 탁 쳤다.
“그럼 역시 도청장치가……!”
“…….”
이런 말을 할까 봐 시선도 안 줬던 거였다.
“보고 끝입니까?”
타닥, 타닥.
이현의 손이 키보드 위를 바쁘게 오갔다.
“아닙니다, 본부장님. 연 전무님 전언은 아직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빨리 하십시오. 그전에 뒤로 몇 발 가시고요.”
박 과장이 킁, 콧김을 흘렸다.
“거 아무리 제가 찰떡같은 본부장님 사람이라지만 너무 서운하게 하시면 저도 떨어져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아, 물론 협박 같은 건 아니고요.”
투덜대면서도 몇 발 뒤로 물러나긴 했다. 네 발 가면 자존심 상할 것 같다는 계산 하에 두 발 반만 가긴 했지만.
“연 전무님 말씀으로는 제가 본부장님 지시 하에 신사옥 강남 건설에 반대했던 임원들 뒤를 캐고 다니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답니다. 덧붙여 물어볼 게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 하셨습니다.”
거기까진 예상했던 바였다.
박 과장이 어떻게든 여기저기 묻고 다니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현이 원했던 것은 소문이 나면 제풀에 놀란 임원진 누군가가 저린 발을 내미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진 아무도 없었다.
신사옥 건설과 백의 등장은 누가 고약하게 일을 꾸민 게 아니라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리고 또 무슨 얘기가 있었는데…… 아, 본부장님께서 왜 하필 오늘 무단 지각을…… 아니, 무단 중역출근을 하신 건지 궁금해하는 눈치 같았습니다.”
이현의 동작이 잠시 멎었다.
“오늘이요?”
“예.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눈치는 좀 빠른 편 아닙니까. 확실히 그런 것 같았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오늘 정말 무슨 날입니까? 갑자기 무단 중역출근하신 것도 그렇고요.”
오늘 집 안에서 이러저런 일이 있긴 했다.
그걸 연 전무가 알 리 없다. 그러니 연결 고리는 라현이라는 얘기였다.
“현라현이 전화라도 했을 겁니다. 둘 다 연 전무에게는 이례적인 일이니 엮어본 거겠죠.”
“음? 두 분 모자지간 아닙니까?”
“태보 가족사야 박 과장님도 알 만큼 아실 텐데요.”
“예? 아니, 그런 말을 그렇게 막 아무렇지도 않게 하셔도 되는 겁…… 에,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건 일절 모르고 있습니다. 괜히 저 입 무거운지 간 보고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 별 의미 없는 대화는 그만 접을 때가 됐다.
하지만 라현이 모친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조짐이었다.
라현은 몰라도 연 전무라면 회사 내에서 다른 일을 꾸밀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신사옥 관련해서 연 전무 측에서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라현이와 무슨 얘기 주고받았는지 알아 오세요.”
“네……?”
박 과장이 입을 딱 벌리고는 고개를 휘적휘적 저어댔다.
“아니, 본부장님. 그래도 인간적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할 대화를 알아오라는 것도 아니고, 오늘 아침에 한 대화를 제가 무슨 수로 알아냅니까? 그럴 거면 저한테 타임머신이라도 한 대 사주시든가요!”
“타임머신이 왜 필요합니까.”
“그게 없이 이미 지나간 일을 어떻게 알아냅니까!”
“둘 중 한쪽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입니다.”
“…….”
박 과장이 손을 올려 목을 짚었다. 물론 그전에 입술을 실룩대며 속으로 온갖 못 할 말을 쏟아내긴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몰래 알아내라는 말씀은 안 하셨군요.”
“네.”
“…….”
박 과장이 어쩐지 눈물이 그렁대는 것 같은 눈으로 모니터만 보고 있는 이현을 노려보았다.
“본부장님. 제가 진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밤에 잠은 잘 오십니까?”
저렇게 사람 막 놀려대는 거 좋아하고 곤란하게 만드는 거 좋아하고 말도 안 되는 일로 부려먹는 못된 인간은 꿈자리가 사나워야 마땅했다.
“적당히 잡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원래 때린 놈은 아픈 거 모르니까요.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살면…….”
박 과장은 진심을 다해 자신이 아는 가장 뼈아픈 말을 해주었다.
“……연애도 하기 힘들 겁니다. 본부장님 애인 없으시지요? 그 외모에 그 재력에 그 학벌에 아직도 좋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아주 심각하지요. 그 조건으로도 커버가 안 되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
탁.
이현이 갑자기 의자를 젖히는 바람에 박 과장이 말을 끊고 목을 움츠렸다.
의자에 몸을 기댄 이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렇게 대놓고 알아보기 쉬운 표정을 짓는다는 건 심기가 매우 몹시 불편하다는 소리였다.
박 과장의 얼굴에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라는 후회가 철썩 주저앉았다.
이어서 박 과장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물론 저는 그만한 재력이 있으면 연애 따윈 안할 겁니다. 어디 돈하고 연애하고 비교가 된답니까. 그 뭐냐, 나중에 여자친구형으로 나온 안드로이드 같은 거 사도 되는 일이고요. 이게 제가 오늘 아침 신문을 읽었는데 영화에서나 보던 휴머노이드의 상용화가 아주 멀지는 않았다고,”
“고민이긴 합니다.”
“다고 합니, ……네?”
박 과장이 숨을 훅 들이쉬었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고?
“저기, 본부장님? 제가 아무래도 이명증이 생긴 모양입니다. 왜 갑자기 잘 안 들리고 그럴까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현이 양손을 뒤로 돌려 머리를 받쳤다. 마치 고민이 아주 많아 머리까지 무겁다는 듯이.
“연애 말입니다.”
“어……라.”
박 과장이 눈을 끔벅였다.
“누구…… 본부장님이 연애요?”
“연애는 아직 아니고.”
이현의 다음 말은 그가 연애를 한다는 말보다 몇 배나 더 놀라웠다.
“저 혼자 좋아하는 단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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