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27화 (27/68)

#27. 방심은 금물

2018.03.03.

숙취 탓일 거야.

라현이 이를 갈았다.

지금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라서 헛소리가 들리는 거지.

“들었잖니. 이제 술도 다 깼을 테니 두 번 묻지 마라. 대답하는 쪽도 피곤하다.”

그런데 헛소리가 아닌 모양이다.

라현은 지끈대는 머리를 양손으로 눌렀다.

“……그렇다고 두 사람더러 연애하라고 등 떠밀 사람도 아니잖아요, 우리 대고모님께선.”

“그것도 벌써 말해뒀다. 젊은 남녀가 연애하는 게 뭐 어떻겠냐고.”

라현이 발끈해 다음 말을 찾는 사이 현 여사는 우아하게, 그러나 냉정하게 시선을 돌려 별채를 한 바퀴 훑었다.

“이현이 말이 맞았네. 수리를 좀 해야겠어. 윤 실장, 공사 언제 들어간다 했지요?”

“본부장님이 물산 쪽과 따로 계약을 하신다고 들어뒀습니다.”

“정말로 알아서 할 생각인가 보네. 그럼 됐어요. 라현이 너도 들었지? 공사 시작하기 전에 갈 곳 알아둬라. 우리는 이만 돌아가지요.”

“예, 부회장님.”

라현이 두 사람의 뒤에 대고 펄쩍 뛰었다.

“그래서 저를 내쫓으시겠다고요? 대놓고 현이현 편만 드시겠다고요?”

“좋을 대로 생각해. 하지만 네가 사고치는 꼴 보기도 지긋지긋하구나. 말년은 속 편히 보내고 싶다.”

현 여사는 더는 상대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별채를 떠났다.

“내가 진짜…….”

절반은 흘러넘쳐 사라진 꿀물 그릇을 보며 라현이 발을 쿵쿵거렸다.

“그깟 꿀물이 뭐라고. 숙취만 아니었으면 내가 진작 해다 바쳤어.”

그 점이 가장 화가 났다. 누가 하면 사고지만 누가 하면 대단한 뭔가가 된다는 점.

“현이현하고 내가 다를 게 뭐야. 어차피 백은 그 땅을 갖다주는 인간을 고를 텐…… 아, 그랬지.”

불쑥 숙취를 헤집고 뭔가가 떠올랐다.

백과 나눈 대화의 일부였다.

-그럼 신사옥을 짓는 게 싫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 순간 머리가 후다닥 돌아가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런 거라면 더 쉽지. 방해만 하면 된다는 소리잖아.

퍽!

성급하게 몸을 돌리던 라현이 티테이블 다리에 정강이를 부딪쳤다.

“윽! 제기랄. 운도 더럽게 없…… 씨이.”

라현은 한 발로 겅중겅중 뛰어 방으로 갔다. 침대며 책상이며 마구잡이로 뒤져 전화기를 찾아낸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마? 어쩐 일이니.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모친이었다.

“반가우면서 아닌 척 마세요. 저 물어볼 거 있어요.”

-뭔데?

“TB 신사옥, 평택은 아직 가능성 있어요?”

-뭐?

모친은 당연히도 놀랐다.

-너 라현이 맞니? 얘가 왜 갑자기 회사 얘기를 꺼내고 그래?

라현이 짜증스럽게 모친의 말을 끊었다.

“저도 끼어들 때가 돼서 그래요. 어머니가 마음먹고 나서면 지금이라도 평택으로 옮길 수 있어요?”

짜증내는 일이라면 모친도 일가견이 있었다.

-얘가 뭘 잘못 먹고 아침부터 목소리를 높여. 끊어. 전화로 할 얘기 아니니까 와서 해. 나 점심 약속 있으니 한 시간 안에 와야 한다.

뚝.

전화가 끊겼다.

“한 시간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든가.”

버럭 소리를 지른 라현이 전화기를 침대 위로 던지고는 부랴부랴 욕실로 뛰어갔다.

* * *

안채로 돌아가는 걸음은 상대적으로 느긋했다.

햇빛 좋은 날 산책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만.”

윤 실장이 슬그머니 말꼬를 텄다.

아무래도 현 부회장이 걸음을 늦춘 것은 얘기를 좀 하자는 뜻일 듯했다.

“너무 자극하신 거 아닐까요. 셋째 도련님께서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해가실 성격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회장님.”

처음에는 이현을 집에 붙들어두려고 백을 이용하는 건 줄 알았다.

현 부회장이 백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진짜였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식이었다.

그런데 라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모르긴 해도 셋을 지켜보는 속내가 복잡해졌을 게 뻔했다.

“바람과는 다르게 오히려 더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라현이 성격을 내가 모르는 건 아니고요.”

현 여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이현이 편을 드는 것도 아니지요. 뭐, 그 녀석이 언제 편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하던가요. 공치사도 못 할 짓 해봤자지요.”

“그럼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현 여사가 빙그레 웃었다.

어딘가 장난기가 섞인 웃음은 손자들과도 많이 닮은 듯했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요. 나는 이제 와 할미 노릇을 하는 데 재미를 들였을 뿐인데.”

“저런. 그러셨습니까?”

“나름 선을 그어준 게지요. 이현이 녀석이 하는 걸 보면 마음이 벌써 많이 간 듯한데 그걸 라현이가 모르고 있으면 그게 진짜 큰 싸움이 되지 않겠어요?”

“……하긴. 셋째 도련님의 그…… 연애 문제는,”

윤 실장은 여자 관련 문제라는 말을 애써 둘러 연애라 포장했다.

그래봤자 다들 알 거 아는 처지에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다.

“한참 잘못 배웠지요. 제 부친한테서 배웠을 테니 그간 잔소리도 못 했고요.”

“저도 그건 동감입니다, 부회장님.”

“이참에 좀 애써 봅시다. 이현이는 집에 정 붙이게 만들고, 라현이는 나쁜 버릇을 고쳐놓고요.”

윤 실장이 슬쩍 웃었다.

“잘될 것 같습니까? 두 분 다 저 나이 되도록 못 한 일인데요.”

“잘될 거예요. 잘되고 있고요. 고 선생 덕분이지요. 앞으로도 서운할 일 없게 잘 챙겨주세요.”

“알겠습니다, 부 회장님.”

그렇게 산책이 끝났다.

* * *

“안 되겠어. 일어나야지.”

백은 진작 비어버린 찻잔을 내려놓았다.

열기를 오래도록 품고 있는 찻잔은 쥐고 있을수록 자꾸만 이현을 생각하게 했다.

[응? 큰 놈이 식사를 대령한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랬어. 백이는 아프니까 잘 먹어야 해. 밥 먹고 일어나.]

도도와 도래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냐. 이젠 괜찮은 것 같아. 봐봐. 얼굴도 덜 빨갛잖아.”

백은 조금 진정이 된 얼굴을 보여주었다.

[음……. 그렇긴 하다.]

[하지만 백이가 아프면 큰일 나지 않아? 여긴 대모산도 아니고 인간 세상인데. 영력이 약해져서 둔갑술이 풀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백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영력이 약해진 느낌은 조금도 안 들어.”

[그래?]

[안 쉬어도 되겠어?]

“응.”

침대에서 일어난 백은 늘 하던 대로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매만졌다.

창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고 대모산 적송 가지와 솔방울을 흔들어 바꾼 공기를 맑게 했다.

“이제 다 됐나. 아, 하나 더.”

백이 동쪽 벽에 세워둔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부터 눈썹, 피부, 혈색, 눈동자까지 고루 살핀 백이 위아래가 나뉜 잠옷의 상의를 훌쩍 들어올렸다.

“너희들도 와서 봐줘. 혹시 달라진 데 없나.”

둔갑술이 온전한지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알았어, 백아.]

[말만 해.]

도도와 도래가 잠옷 안으로 쏙 들어가 눈이 닿지 않는 등 쪽을 꼼꼼히 살폈다.

[이상 없는데?]

[응. 완벽해.]

“그래? 다행이다.”

백이 잠옷을 훌쩍 뒤집은 채로 고개를 숙여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도 마저 살폈다.

“복부도 괜찮고 가슴도 괜찮아. 혹시 털이 난 데는 없어?”

[없어, 없어.]

[털이 나도 하얘서 잘 안 보일 거야.]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응응.]

“그럼 이제 엉덩이 봐줘. 거기가 제일 걱정돼. 거긴 꼬,”

백이 막 꼬리가 보일지도 모르잖아, 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괜찮아 보이는데. 뭘 걱정하는지 몰라도.”

“……엇!”

백이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는 이현이 문가에 서 있었다.

백이 후다닥 옷을 내렸다. 당황한 탓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엉덩이하고 복부 다 괜찮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고.”

백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잠옷 안에 숨은 도도와 도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사이 이현은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은 쟁반 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번져왔다.

“와서 먹어.”

“그전에 할 얘기가 있습니다!”

당황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자 입이 열렸다.

백은 어금니를 꼭 물고 팔짱을 꼈다.

“뭔데? 배 안 고파?”

사실 배는 고팠다. 그런데 꼭 해야 하는 얘기였다.

“저의 시장기를 염려해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시장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비록 인간 관계, 특히 남녀 사이에 대해서는 배움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한쪽이 다른 쪽을 훔쳐보는 일이 매우 적절치 못한 행위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현이현 씨는 어째서 그런 일을 저지르시고도 태연하신 거지요?”

“……그렇게 보여?”

“네. 유감스럽게도 몹시 그렇습니다.”

“눈이 나쁜가 본데. 전혀 태연하지 않아.”

“태연하게 보이는데요.”

“아냐.”

“거짓,”

말하지 마세요.

백이 막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이현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눈을 떠난 시선이 코끝에 닿고 입술을 스치더니 목선을 타고 쇄골을 지나 팔짱을 끼느라 모아진 가슴과 방금 전 드러났던 허리선을 훑고 허벅지를 따라 내려가 무릎을 건드리고 발가락에서 멎었다.

“…….”

그리고 그 과정이 반대로 반복되었다.

무릎이 가늘게 떨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하게 보이는 이현의, 태연하지 않다는 말을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변명을 하자면 훔쳐본 것도 아니야. 문이 열려 있었고 보이는 걸 봤어. 일부러 숨죽이고 있지 않았고 몰래 서 있지도 않았어.”

당황한 것으로 따지자면 이현이 더했을 것이다.

처음 등장부터 그랬지만 백은 무방비한 순간을 잘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느닷없이 속살이었다.

그야 몸이 닿은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예쁠지는 충분히 상상이 갔지만 그래도 대놓고 눈에 들어오는 건 너무했다.

제발 적당해 좀 해줘.

죽 그릇을 안 엎은 게 다행이었다.

그 와중에 입 다물고 좀 더 보고 있으면 안 될까 하는 불량한 생각마저 들었으니 할 말 다했다.

“그……런 거라면.”

훔쳐본 게 아니라고 하니 백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생기면 곤란합니다. 다음부터는 꼭 소리를 내주세요.”

만약 둔갑술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의복으로 가리지 않은 모습을 이현이 보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이현이 맞은편에 앉는 백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미리 말하는 건 괜찮아? 보고 싶을 때, 보여 달라고.”

백이 숟가락을 입에 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영수라는 걸 들킨 적이 없으니 저 보고 싶다는 말은 본신을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미리 말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그래.”

대답하기 전 이현이 왜 잠깐 뜸을 들였는지, 왜 헛숨을 한번 삼켰는지 백은 전혀 모르는 일이 되었다.

그가 오늘 밤 어떤 꿈을 꾸게 될지도.

“식기 전에 먹어. 맛은 괜찮아?”

“아, 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곳의 음식은 대체로 입에 잘 맞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

이현은 그가 가져온 인삼죽을 백이 오물대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없이 쳐다보는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평생 질릴 일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사이 시간은 벌써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 * *

“이것 참.”

박 과장이 시계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양복 아래 둥그스름한 어깨가 움찔대는 모습은 동그란 얼굴과 어우러져 가끔 나이답지 않게 귀여운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박 과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장난으로라도 귀여워 보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둥글게 보이는 몸집은 사실 다년간 삼종의 격투기로 다져온 실전형 근육의 집합체였다.

타고난 체형이 팔다리가 짧고 동그스름한 탓에 옷을 입으면 근육질 몸이라는 게 전혀 표시가 안 난다는 게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양반이 어쩌다 지각을 다 하고 그러시나.”

입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사 내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 있는 현이현 본부장의 측근은 박 과장이 유일한 관계로, 벌써 전화를 제법 받았다.

대부분 이현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중역들이었다.

“나야 모른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고. 참.”

마침 그때 개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누구시라고요? 예? 연…… 아, 연 전무님? 아이고, 어쩐 일이십니까?”

태보건설의 연서희 전무는 두 군데 계열사의 중역도 겸하고 있었다.

딱히 별다른 경력도, 학력도 없는 사람치고는 뜬금없는 일이었지만 연서희 전무의 남편이 태보건설의 부사장이라면 이해가 가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연 전무는 라현의 모친이었다.

회사 일에 관심도, 욕심도 별반 없는 부사장에 비해 그녀는 야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서요. 오늘 이현이 무단결근했다면서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 조금 늦으시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에…… 본부장님이면 지각도 아니고 중역출근이시지요.”

-헛소리 말고요. 무슨 일이래요?

“그냥 좀 늦는다고 하셨습니다. 본가에서 아침에 처리할 일이 있으시다고요.”

-흐응. 왜 하필 오늘일까.

“예?”

박 과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는 날입니까?”

-그건 박 과장이 알 것 없고.

연 전무가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요새 이현이가 박 과장 시켜서 신사옥 강남 건설 반대했던 인간들이 뭐하나 캐고 다닌다면서요? 나한테는 왜 안 물어오나 싶은데.

“아이고오…….”

박 과장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새 소문 다 났구나. 그거 비밀인데.

“에…… 음…… 잘못 들으신 겁니다, 연 전무님. 에…… 저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으음…… 본부장님께서 저한테 뭐 경호 업무 외에 다른 거 지시하시고 그러는 일도 절대, 저얼대 없었습니다. 저 경호학과 출신입니다. 전공 외에 다른 일은 일절 할 줄 모릅니다.”

-감춰봤자 소용없는 건 알고 있는 거죠?

“감추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하.”

-나한테 궁금한 거 있으면 이현이더러 직접 전화하라고 하세요. 남 시켜서 수작부릴 생각 말라고.

뚝.

전화가 끊겼다.

“나 참.”

박 과장이 전화기를 노려보며 한동안 혀를 찼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러신데. 신사옥 두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건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사내 평가와는 달리,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박 과장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곧 문제가 생길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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