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리쳐주세요-23화 (23/68)

#23. 기브 앤 테이크

2018.02.17.

“음……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한참 생각하던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바치는 공물에 대가가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같았지만, 사실 크게 보면 그것도 주고받는 것이었다.

인간은 영수를 공경하고 영수는 인간이 머무는 곳까지 두루 지기를 살폈다.

큰 재해가 나기 전 미리 하늘과 땅으로부터 조짐을 읽고 인간에게 경고를 주었다.

지금 시대야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지만 어쨌거나 라현에게서는 공물을 받았으니 주고받는다는 게 이치에 더 합당하긴 했다.

“그렇다면 저는 뭘 드릴까요?”

그러면서 백은 속으로 대모산 적송이 싫다고 하니 솔방울은 어떨까 고민했다.

“뭐긴. 다른 게 뭐 있겠어.”

“아, 그럼 역시 적송 가지가 싫었던 건 아니었나 보군요.”

“…….”

적송이라니. 그건 또 뭐야.

라현은 백에게는 말을 돌려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라현이 손을 뻗어 백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붙들었다.

그러자 백이 라현의 팔과 의자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 고 선생님. 너무 겁먹지 마.”

백이 눈을 깜박였다.

“겁먹지 않았습니다. 제가 겁을 먹어야 하는 일이라도 있나요?”

이렇게나 바짝 붙어 있는데도 백은 그가 보내는 신호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젠장. 그렇게 나오니까 차라리 겁을 먹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드네. ……아니, 아니. 이런 소리 하면 또 엉뚱한 걸 물어서 분위기 늘어지겠지. 좋아, 키스. 키스로 하자.”

“에…….”

백이 콧등을 구겼다. 라현은 백이 또 키스는 싫다느니 어쩌느니 할까 봐 잽싸게 선수를 쳤다.

“당신 나한테 빚진 거 하나 있잖아. 낮에도 해주기로 해놓고 이현이 형이 방해해서 얼렁뚱땅 넘어갔지.”

“음……. 그렇긴 했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해줘야 되지 않겠어?”

“…….”

백이 입술을 삐죽대다 반박할 말이 없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키스로 하겠습니다.”

“좋아.”

라현이 눈을 감고 얼굴을 내밀었다.

“자, 해줘.”

“예.”

하……. 작은 한숨 소리가 먼저 들리더니 백이 미적미적 다가왔다.

왼쪽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기 직전, 라현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볼에 닿았어야 할 입술이 입술에 닿았다.

입술을 붙인 채 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귀여워 환장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심했나 걱정이 들었다.

“……화났어?”

잠시 후 라현이 조심스레 눈치를 보다 물었다.

“아뇨. 좀 놀라워서요.”

“뭐가?”

“아, 잠시만요.”

그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이 라현의 양 볼을 붙들고는 스스로 먼저 덥석 입을 맞춰왔던 것이다.

“뭐…….”

어디 잠시 다른 별에 갔다 왔나 싶었다.

라현이 그대로 굳어 있자 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상하다아.”

“뭐, 뭐가?”

“싫지 않아서요.”

“응?”

라현은 저가 깜박 잊고 심장을 다른 별에 놔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쾅쾅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네요?”

“뭐…… 그러니까 뭐가?”

“키스가요.”

백이 갸우뚱 턱짓을 했다.

원래 키스란 건 열이 오르고 몸에 힘이 빠지고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역시나 그건 이현의 독기가 유독 강한 탓인 걸까.

어쨌거나 한 가지 좋은 사실을 알았다. 이현과의 접촉만 조심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제 키스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게 되자 그간의 부담감이 사라졌다. 백이 라현을 향해 생긋 웃었다.

“앞으로도 키스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해드릴게요. 현라현 씨에게는요.”

“어, 어? 진짜?”

“네. 피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라현의 눈이 번뜩였다.

“나한테만 해주겠다는 소리는 현이현과 하는 게 싫다는 소리지?”

백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 기준에서는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네.”

순풍이 온몸으로 불어왔다.

라현은 입술 사이를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백의 잔에 술을 따랐다.

“우리 고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 예쁜 말만 할까. 자, 더 마셔. ……어? 비었네? 기다려봐. 더 가져올 테니.”

백이 양손을 부딪치며 좋아했다.

“이 머루주 너무 맛있어요.”

그야 끝내주는 빈티지로 소문난 1998년산이니까.

고 선생님은 모르겠지만 이거 더럽게 비싼 거야. 이 집 식구들이라고 해도 이런 걸 만날 마시진 않는다고. 나야 내놓은 자식이니까 잘도 훔쳐먹고 있다만.

“같은 게 더 있나 찾아볼게.”

하지만 가격 따위가 무슨 상관이람.

라현은 재빨리 별채를 나서서 안채로 향했다.

안채의 주방에서 이어진 지하에는 조부가 생전에 꼼꼼히 모아둔 주류 컬렉션이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 * *

이상하다.

라현은 깜빡 방심하면 아득히 멀어지려고 하는 정신 줄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중이었다.

“어? 이건 맛이 달라요. 더 산뜻하고 부드럽네요.”

눈앞에서는 왠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은 고 선생이 얄쌍한 화이트 와인 잔을 기울이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신기해요. 빛깔이 완전히 다른데 이것도 머루주라니요.”

그러면서 홀짝홀짝 참 맛있게도 술잔을 비웠다.

“어, 그…… 그렇……지이.”

라현은 좀 전부터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혀를 애써 움직였다.

이상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알딸딸하게 붉어진 얼굴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람은 고 선생이어야 하는데.

라현은 백이 저를 붙들고 칭얼대는 동안 읊을 대사도 이미 다 생각해두었다.

-현이현 씨 취향을 가르쳐준다고 했잖아요. 그게 뭐예요.

라고 물을 테니

-이현이 형 취향은 아주 이상해. 눈이 작고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머리칼이 뻣뻣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어. 고 선생님하고는 정반대지.

라고 답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백이

-그럼 역시 저는 현이현 씨하고 안 어울리겠군요.

라며 실망하는 눈치면 백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실망하지 마. 내 취향은 백 퍼센트 고 선생님이니까.

라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역시 현라현 씨밖에 없어요!

라고 와락 안겨드는 백을 부드럽게 감싸고는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알고 있어.

라면서 자연스럽게 제 방으로 데려간다는 훈훈한 마무리가 이어져야 했다.

그런데.

“현라현 씨 잔이 그대로예요. 술이 약하신 모양이에요.”

고 선생은 두 볼이 붉어지기는커녕 반듯한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 아니…… 아냐. 내가 어디 가서도 술 약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 딸꾹!”

급기야는 딸꾹질까지 나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바닥은 물컹했고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 와중에 처음 술자리를 시작할 때와 변함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반듯하게 앉아 야금야금 와인 잔을 비워내는 고 선생은 죽도록 예뻤다.

“현라현 씨, 지금 음…… 아, 그래. 취하셨어요. 인간은 술을 마시면 취한다고 들었어요. 탁기를 조절하는 법을 모르니까요.”

“아, 아냐. 취하긴 누, 딸꾹, 가!”

“이제 그만 드셔야 해요.”

그만하긴 뭘 그만해!

그가 세운 계획을 세분화해 5단계쯤 나눈다고 하면 이제 고작 1단계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아니, 아니…….”

“술도 거의 다 마셨고요.”

“무슨 소리야! 지하에, 딸꾹, 잔뜩……!”

“말씀도 제대로 못 하시고.”

“아냐, 딸, 잘, 꾹!”

“저도 배가 너무 불러서 더는 못 마시겠어요.”

“그…….”

젠장. 할 말이 없다.

그 많은 술을 마셔놓고도 취해서 더는 못 마시는 게 아니라 배불러서 못 마시겠다니.

“혀, 현이현…… 취향, 알려달, 딸꾹, 그랬, 잖아. 조금만 더 마, 셔.”

“아아. 맞다, 그랬지.”

백이 반쯤 남아 있던 잔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빛나는 와인글라스처럼 백의 눈도 반짝였다.

“더 마셨어요. 이제 말씀해주세요.”

“아, 그…….”

라현이 이쯤 그만 멈추고 싶어 하는 머릿속을 억지로 굴렸다.

“현이현은 여자…… 안, 좋아해.”

“음……. 그건 현이현 씨가 남색을 더 좋아하신다는 말씀인가요?”

“뭐?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여자를…… 아, 당신처럼 예쁜 여자는 안 좋아해.”

“아하. 그건 좀 어려운 얘기네요. 예쁘지 않은 여자란 어떤 여자일까요?”

어떤 여자긴. 당신 말고 아무나겠지.

“당신처럼 피부 하얗고 눈 맑고 속눈썹 길고 머리칼이 찰랑찰랑하면 싫……어해.”

“저런.”

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화가 잘되는 여자도…… 싫어해. 말 걸어도 쳐다도 안 보고…… 무시하는 그런 여자가 좋……대.”

“아. 그거라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요?”

“노래 같은 거…… 하지 마. 노래 잘하는 여자도 싫어하니까.”

“그럼 노래를 못하면 좋아할까요?”

“어, 어……? 어, 그래. 노래 못하는 여자는 좋아한대.”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이야 했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젠장, 알 게 뭐냐. 현이현 취향 따위.

“그리고요?”

“그리고, 또오…….”

이제 한계였다.

말도 안 되는 취향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얘깃거리가 떨어진 라현이 불쑥 화살을 돌렸다.

“그런데에, 고 선생님. 너무, 하지 않아? 왜 아직도 현이현 취향이 그렇……게 궁금한 건데? 그 땅이야 내가 주겠, 다고 했……잖아.”

백의 한 가지 단점을 꼽자면 언제 어디서나 솔직한 면이라고 해야 했다.

“대모동 고 씨 일가를 돕겠다는 현라현 씨의 마음은 몹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땅은 현라현 씨 소유가 아니니 그렇게 쉽게 주실 수 없는 거잖아요.”

“하, 진짜 너무…… 너무하네. 결국 내 말은 안, 믿겠다는…… 거야?”

“불확실한 걸 믿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라서요.”

“젠……장. 대체 그 땅이 뭐라고. 왜…… 하필 그 땅이……야. 그건 신사옥인지 뭔지 짓는……다고 현이현이 난리를 피우는 땅……이란 말이야. 거기만 아니라면 내가 다 줄 수…… 있어!”

“꼭 그 땅이어야 해요.”

술에 취해 맛이 간 머리로도 거기에는 뭔가 있다고 짐작할 만한 대답이었다.

“신사옥……하고 관련이 있겠네. ……그럼. 그걸 못 짓게…… 하고 싶은, 거야?”

백이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신사옥을 지을 땅이라서 필요하다고 하면 목적은 그 반대밖에 더 있어?

“그런 거……라면 굳이 그 땅……,”

그 땅까진 필요 없잖아. 신사옥 건설을 훼방 놓는 거라면 얘기가 더 쉽지.

라현이 잘 움직이지 않는 혀로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띵동.

라현이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진 건물답게 고전적인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씨이, 누구……야.”

라현이 흐릿한 눈을 들어올렸다.

“누가 왔나 봅니다. 현라현 씨는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제가 나가 볼게요.”

백이 일어섰다.

라현이 그 와중에도 허우적 몸을 일으켜 백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냐. 갈 필요 없어. 누가 이 시간, 에 방해를…… 한다고.”

“그래도 초인종을 눌렀는데요.”

순풍은 불어왔지만 라현은 아직도 1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가만 있……으면 그냥 갈, 거야.”

라현은 길을 막는 것도 모자라 백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가지, 마. 나하고 더 있자. 응? 우리 아직 키스, 밖에 못 했, 잖아.”

하지만 야속하게도 라현 혼자 순풍이라 믿었던 바람은 그쯤에서 그쳤다.

삐익, 삑!

보안코드가 해제되고 현관문이 열렸다.

그럴 사람은 윤 실장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라현이 고개만 돌려 짜증을 부렸다.

“지금 뭐, 합니까? 이 시간에 멋, 대로 들어와, 도 된다고 누가 그, 랬어요?”

문을 연 사람은 윤 실장이 맞았다. 눈이 마주친 윤 실장이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제가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윤 실, 장이 아니라, 면 누가……,”

“내가 그랬어.”

초인종 소리에 반응이 없자 문을 열라고 지시한 사람은 이현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긴 걸음으로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형은 또 웬 참견,”

“먼저 그 손부터 놓고 얘기해.”

이현이 백의 손을 잡고 있는 라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라현을 쳐다보는 눈길이 사나웠다.

당연했다. 혼자 안절부절못하며 이제 그만 모시러 가야 하나 어쩌나 하며 흰소리를 중얼대던 윤 실장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부터 기분이 나빴으니까.

라현이 안채에 들러 술을 잔뜩 가져갔으며, 하는 걸로 봐서는 별채에서 백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단순히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라현이 음주와 관련된 사고를 친 전적은 고작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그중에는 여자와 관련된 사고도 아주 많았다.

라현의 부친은 입막음을 위해 관할 경찰서에 뿌린 돈이 아홉 자리 숫자를 넘게 생겼다며 매일 신세한탄이었다.

아니, 사실 기분은 그 이전부터 더러웠다.

백이 제가 볼일이 있는 건 현라현 씨예요, 라고 할 때부터.

너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같은 거라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생각이 없어 보일 때부터.

아니아니, 백이 라현의 차를 타고 돌아왔을 때부터.

라현이라는 방해꾼이 느닷없이 이 집에 등장했을 때부터.

제기랄.

기분이 나쁜 만큼 라현의 손목을 틀어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 아! 아프잖아!”

라현이 악을 쓰자 술 냄새가 훅 번져왔다.

미친.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저가 그렇게 마셔댔으면 백에게도 잔뜩 먹였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놔, 그럼.”

“아오, 씨……. 내가 뭘 어쨌, 다고…….”

“네가 술 먹고 친 사고들 전부 읊으라고 할까? 윤 실장이라면 아주 잘 기억하고 있을 텐데.”

윤 실장이 이현의 등 뒤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제가 보고 들은 일이라면 전부 기억합니다. 개중 아주 심각한 사고도 제법 많았지요.”

그 말에 라현이 펄쩍 뛰었다.

“무슨 헛, 소리를 하고, 있어?”

불리해졌다 싶었던 라현이 백을 놓고는 이현을 향해 대뜸 주먹을 날렸다.

#Private collectio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