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유는 몰라도
2018.02.13.
“…….”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백은 늘 예상 밖에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떨어져서 말하라니. 더 좁혀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할 얘긴 아닌 것 같은데.”
“그럼요?”
“……장소를 옮기거나.”
“아, 혹시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손끝에 잡힐 것 같았던 분위기가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었다.
이현이 어색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짧진 않을 것 같지 않아?”
“그럼 조금 있다가 할까요? 저는 지금 현라현 씨를 뵈어야 해서요.”
멀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듯했다.
“라현이는 왜.”
“말씀해주실 게 있다고 해서요.”
저도 모르게 입술이 실룩거렸다.
할 말은 내가 더 많아. 그 녀석이 할 말이란 게 뭔지는 몰라도.
“그럼 나는 왜 찾아왔어. 얘기하려고 온 거 아냐?”
“현라현 씨 방이 어딘지 몰라서요. 현이현 씨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요.”
“…….”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는데, 반대로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갔다.
뭐지, 이건.
그 녀석으로 대상을 바꾼 건가. 그사이에?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라현이 말을 믿어?”
이현이 묻자 백이 고개를 갸웃댔다
“어떤 말을요?”
“그 땅을 자기가 주겠다는 말.”
“음……. 아뇨, 믿는 건 아니에요. 그 땅은 현이현 씨 소유지 현라현 씨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백이 생긋 웃었다.
“하지만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믿고 싶어요.”
“…….”
망할.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그 방법이란 게 헛소리야. 그런 일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지금 제게 의지할 수 있는 건 현라현 씨밖에 없기도 하고요. 그럼 이제 현라현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이제는 기분 나쁜 걸 넘어서서 울컥 화가 났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왜 라현이야.
그 녀석은 발바닥에 뿔난 망아지 같은 인간이라고. 상식도 예의도 배려도 없는 놈이야. 현라현을 믿느니 차라리 이 집 고양이를 믿지.
“……현이현 씨?”
계속 쳐다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백이 시선을 맞추려 애를 쓰며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습니다.”
그런가. 그 정도인가.
대꾸가 없자 백은 입술을 잘근대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을 이리 주시겠어요? 맥을 한번 짚어볼게요.”
“……괜찮아.”
“아닌데. 목소리도 안 좋아요. 정말 아픈 걸지도 몰라요.”
백은 양손으로 이현의 손을 덥석 잡아 끌어당겼다.
말이 안 되게 예쁜 손가락이 잠시 손목을 더듬었다.
백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손을 잡아 뽑지 않은 것은 저렇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이유가 궁금한 탓이었다.
믿을 사람은 다른 놈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나는 왜 걱정해.
사람을 땅문서 뽑는 자판기 취급하면서 아픈 건 왜 신경 써.
그렇게, 진심인 것처럼.
“아프지 않은데 안색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너 때문에.
네가 번번이 기대 밖이라.
“너는 내가 아픈 걸 왜 신경 쓰는데.”
“그야 현이현 씨가 아픈 건 싫으니까요.”
“그게 왜 싫은데.”
“그야 아프면…… 어? 응?”
이현은 백의 표정이 제 눈앞에서 확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하더니 혼란스러워했다.
“아프면 걱정이 되고 그래서 도울 수 있는 대로 돕는 게 하늘 아래 생물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하는 측은지심이고 본분인데…….”
“그런데?”
“그래서 서로 돕고 다 같이 어우러져 화목하게 살아가고 그러는 게 조화이고 상생이라 그게 바로 산의…….”
“산의?”
산의 일족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백은 배운 대로 입에서 흘러나오려는 말을 다급히 삼켰다.
그랬다. 화목과 조화와 상생은 산의 일족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인간은 진작 그 이치에서 벗어났다.
인간은 산의 일족을 마음대로 죽이고 잡아 가두었으며 동물원에 팔아 넘겼다. 산이라는 소중한 터전을 조금도 아낄 줄 몰랐다. 무분별하게 파헤치고 맥을 끊어 놓았다.
“그래서 더는 보살펴줄 필요가 없는 일이라 했는데…….”
산신령도, 영수도.
영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신수도.
모두 인간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인간은 그저 산 아래서 프라다나 만들 줄 알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저는 이현을 자연스럽게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현이 아프다고 생각하면 싫은 걸까.
정작 이현은 그가 지닌 독기로 매일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데.
“제가 너무…… 여기에 오래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너무 인간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던 걸까요?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던 백이 속눈썹을 흔들며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직 그 뚱보 고양이가 다 나은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가 현이현 씨를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걸요.”
백은 상처를 핥아주었을 때 이현이 얼마나 차게 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선의를 거절당한 기분이 얼마나 뜨끔하고 아팠는지도 기억했다.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끼기 싫어서 앞으로 절대 다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남 몰래 다짐도 했다.
“물어보셨지만 저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백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현의 눈에는 새하얀 뒷목을 타고 머리칼이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같은 이유라고 보는데, 나는.”
백이 제 방을 찾아온 이유가 고작 라현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라고 했을 때 울컥 화가 나는 것도, 믿을 만한 사람은 현라현뿐이라는 말을 했을 때 기분이 몹시 나빠지는 것도,
그런 주제에 생글 웃으며 손을 잡는 걸 힘대로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뻔한 답을 모르겠다며 울상을 짓는 게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것도,
그 와중에 머리칼이 사르락대는 뒷목에 숨을 삼키게 되는 것도.
사람을 땅문서 자판기 취급하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멈추지 못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 같은 이유였다.
“뭐가 같나요?”
“네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말이야. 내가 너한테 그러는 것처럼.”
“아……?”
백은 무슨 말인지 영 모르겠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관심이야 있지요. 아니, 있어야지요. 저는 현이현 씨한테 바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런 관심 말고.”
“그럼요?”
“저절로 생기는 관심. 이유도 모르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 그래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없이 생기는 관심과 그냥 관심이 뭐가 다른지요?”
“생각해봐.”
이현이 고개를 숙였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워진 얼굴은, 그러나 불시에 허락 없는 성적 자극을 남기는 게 아니라 가볍게 이마를 맞부딪쳤다.
“생각해보면 알 거야. 그런 다음에 얘기하자.”
“아…….”
백이 뻣뻣하게 몸을 굳히는 사이 이현은 백을 지나쳐 제 방의 문을 열었다.
“아, 그런데 현라현 씨 방은요!”
뒤늦게 백이 이현을 불렀다. 이현은 고개를 돌리고는 어쩐지 심술궂은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안 가르쳐줘. 이것도 같은 이유야.”
탁.
가볍게 문이 닫혔다.
“……나빠.”
혼자 문 뒤에 남은 백이 작게 속삭였다.
“불친절해. 결국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
그래서 혼잣말을 했다.
“다시는 걱정 안 할 거야.”
그게 맞았다. 이현은 산의 친구들처럼 친절하지도, 저를 위하지도, 예의가 바르지도 않았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을 대하듯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왜 계속 생각이 나는 걸까.
이유가 없는 관심이라는 말이. 그게 서로 같다는 말이.
백은 양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잘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안 할 거야.”
손바닥 아래 이마가 뜨거웠다.
키스도 하지 않았는데.
* * *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현라현 씨. 늦은 시간 실례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실례는 무슨. 어서 들어와.”
백에게 라현이 쓰는 별채를 알려준 사람은 윤 실장이었다.
백이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귀를 쫑긋대는 모습을 마침 지나치다 본 것이었다.
현라현 씨가 내는 소리를 찾고 있었어요, 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백에게 윤 실장은 흐무진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친절하게 별채 앞까지 길을 안내했다.
원뿔 모양의 세련된 온실을 지나 그 건너편에 있는 건물이 별채였다. 담쟁이 넝쿨이 조롱조롱 매달린 회색 벽돌 건물이 한옥 안에 자리하자 재미있게도 개화기 시대의 느낌이 났다.
“당신이 알아서 찾아오고 그러니까 되게 기분 좋은데.”
응접실 옆의 다이닝 공간에서 막 새 와인병을 뜯고 있던 라현은 백의 등장에 반색을 했다.
“거기 앉아. 잘됐네. 같이 마시자. 혼자서는 심심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술을 들고 찾아갈까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백은 술이라면 입에도 안 댈 것 같아서 망설이던 중이었다.
“밤이라서 그런가. 더 예쁘네, 고 선생님은.”
저가 마시려던 와인잔을 백에게 쥐어준 라현이 은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백이 제 발로 찾아왔다.
물론 백을 데려온 윤 실장이 “매우 늦은 시간이니 제가 잠시 후에 곧 즉시 신속하게 모시러 다시 오겠습니다.” 라고 허튼 수작 말라는 눈치를 잔뜩 남기긴 했지만, 뭐 어쩔 것인가.
백이 안 가겠다고 하면 그만이지.
현 여사의 말대로 젊은 남녀 사이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이렇게 몸이 달아 있는 상태인데.
“마셔.”
“그럼 대접해주신 것이니 잘 마시겠습니다.”
얼떨결에 와인잔을 받아든 백이 가느다란 목을 두 손으로 쥐고는 꿀꺽꿀꺽 마셨다.
“아니, 꼭 그렇게 안 마셔도……,”
“하아.”
글라스를 반이나 채운 술을 한 번에 넘긴 백이 빈 잔을 내려놓으며 귀여운 숨소리를 냈다.
“머루주네요. 저 이거 좋아해요.”
“응? 머루주였어, 이게?”
라현이 재빨리 와인병의 빈티지 라벨을 읽었다.
샤또 브리옹에서 1998년 생산한 와인으로 주로 사용된 포도는 메를로였다.
“제가 먹던 것과 맛은 좀 다르지만요. 산 아래서 자라는 머루는 맛이 다른가 봐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입맛에는 맞아?”
백이 배시시 웃었다.
“네. 아주 맛있어요. 머루가 잘 익었나 봐요.”
“그랬나 봐.”
뭐가 됐든 무슨 상관이랴.
백이 맛있다는데.
“더 마셔. 많이 마셔. 병째로 마셔도 돼.”
라현이 백의 잔에 아낌없이 와인을 따랐다. 의도하지 않은 미소가 와인향처럼 번졌다.
별이 총총 떠오르는 시간에, 호젓이 떨어진 별채에서 단둘만 있는데다 상대는 주는 대로 꼴깍꼴깍 술을 받아 마시는 지금.
언젠가 친구들과 떠났던 요트 여행이 생각났다. 그때처럼 지금도 순풍에 돛을 편 기분이었다.
“안주도 갖다 줄까? 뭐가 먹고 싶어?”
안주라는 말에 백이 또 배시시 웃었다.
“산삼 양갱이요.”
“……응?”
“머루주와 잘 어울리거든요. 아니면 송이 절편이나요.”
“…….”
성격이 독특하니 입맛도 독특한 모양이다.
“치즈는 안 될까? 과일도 있을 텐데.”
“아, 다른 건 괜찮습니다. 없다면 할 수 없지요. 마음 쓰지 마세요.”
“어, 음…….”
왠지 자신이 또 잘못한 기분이었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준비성이 없어서야. 산삼 양갱도 없이 어떻게 술을 권할 생각을 했지.
“미안해. 다음부터는 꼭 준비해 놓을게.”
백이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역시 도의와 예의를 아는 인간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뭘.”
어쨌거나 지금 부는 것은 순풍이 분명했다.
라현이 탁자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있지, 그럼 이제 이 시간에 당신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같이 얘기해볼 순서 같은데.”
라현이 의자를 끌어당겨 백과 거리를 좁혔다. 무릎이 닿을락말락했다.
“아, 맞습니다. 그건,”
“쉿.”
라현이 손을 뻗어 백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쥐었다.
“내가 맞춰볼게. 그게…….”
라현은 천천히 머리칼을 입술로 가져가며 시간을 끌었다.
사실 더 노련하게 굴고 싶은데 사춘기 애새끼처럼 심장이 떨려와 죽을 맛이었다.
“키스. 마저 하자고. 맞지?”
“네?”
백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와인을 꿀꺽 삼켰다.
“아닌데요.”
“왜 아냐?”
“제가 왜 현라현 씨하고 키스를 해야 하는데요?”
그야 키스를 해야 다음 진도를 나갈 테니까. 그게 상식이잖아, 이 둔하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사람 돌아버리게 야한 여자야.
“보통은 이 상황에서 키스를 하지 않나? 그게 상식이라고.”
“음…… 아니요. 그런 얘기는 못 들어봤는걸요.”
“상식이라니까.”
의외로 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키스를 하는 건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예요.”
그건 미혹술이 성공했을 때에 이어지는 일종의 대가 같은 것이었다.
저는 미혹술을 걸지도 않았고 라현에게 미혹술을 쓸 필요도 없었으니 키스를 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라현도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여기서 키스를 안 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 아냐?”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키스도 없이 우리가 하려는 일을 하려면 굉장히 이상할 거라고.”
백이 또 와인을 꿀꺽 삼켰다.
이 와중에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제 목도 탔다.
“현이현 씨의 취향을 알려주시는데 왜 키스를 해야 하지요?”
“……뭐?”
백이 그새 또 빈 와인잔을 내밀었다.
“술이 떨어졌습니다, 현라현 씨. 제 책에 적어놓으셨잖아요. 현이현 씨 취향을 알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고요.”
펄쩍 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네. 물심양면으로 대모산 고 씨 일족 일을 돕고자 하는 현라현 씨의 노고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건 내가 아……! ……니지 않아, 맞아. 맞네.”
그새 머리가 굴러간 게 퍽 다행이었다.
라현이 와인병을 들어 생수를 마시듯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갑자기 목에 불이 붙은 기분이었다.
“맞아. 내가 그랬어.”
내가 그러긴 개뿔. 나는 그놈의 책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다 떠나서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누구 좋으라고.
그러니 이현이 했다는 말이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 형놈이 진짜 연애라도 할 생각인가. 그것도 땅문서를 내놓으라는 여자하고.
그게 내가 알던 현이현이 맞아?
어쨌거나 그러니 두고 보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고 선생님 좀 너무하네.”
라현은 와인으로 물든 입술을 손등으로 쓸며 말했다.
“낮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꾸만 공짜로 받아가려고 드는 게.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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